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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한동우 | 2008.07.29 17:03 | 조회 1321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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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그것이 표상하고자 하는 대상을 실제로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언어의 벽 속에 갇히게 된다. 그것은 잔소리이고, 잡초이다. 사라지는 것 들이다. 어머니의 잔소리, 어머니의 걱정, 어머니의 이야기는 실제로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는 이제 무덤 속에 누우셨다. 어머니는, 그러나, 무덤속에 누워있어도 되고, 누워있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는 나의 관념 속에 존재하고, 나 역시 나의 어머니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 어머니는 무덤 속에 누우셨지만 나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 나는 무덤에 찾아가 어머니의 마음을 본다. 그것은 말씀보다 큰 것이다. 나는 늘 어머니가 걱정하시던 서울 살이를 했는데, 지금도 여기까지 따라온 나의 삶의 조각들조차, 사실은 실제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저 시냇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나는 이 커다란 여백 속에 혼자 남아 앉아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서울 살이를 했던가. 내 어머니의 걱정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었던가. 아니면, 나의 서울 살이는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한낱 나를 위해 시냇물에 방생기도를 하시던 어머니의 걱정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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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그렇다, 한갓 말에 불과했구나. 말이 없어져도 존재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그러나 이제는 말이 없다. 그러니 존재의 집이 없어진 것이다. 그것이 여백이다. 말로 들려지지 않는 존재는 쓸쓸하다. 그러나 그 쓸쓸한 여백을 통해 더 큰 존재가 다가오고, 그것은 새로운 탄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 탄생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함을 가졌다. 내가 있는 한.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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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로 인해 존재한다. 관계를 통해 존재가 확인된다. 이것은 실존주의적 관념과는 다르다. 절대적 존재자란 없다. 존재란 이미 공존을 내포하기 때문에.
있는것(being) vs. 존재(existence)
존재하는 것은 관계하는 것이고, 관계는 서로 의존하는 것이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은 내가 너에게서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내가 죽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의 언어 속에서 내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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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 방생의 시냇물은 나를 일깨운다. 아무것도 말로 할 수 없다. 그것들이 나의 삶이다. 나는 나의 삶을 일일이 너에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의 감정과 나의 생각을 너에게 하나하나 일깨워 주지 못하고, 나는 나의, 그것이 사랑이든 분노든, 아니면 슬픔 또는 기쁨이든, 어떤 느낌도 네게 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사라질 것이다. 그때, 나는 네 발아래 흐르는 이 시냇물, 방생의 시냇물처럼 기억되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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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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