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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들>을 읽고(111번째 글쎄다)

하늘기차 | 2016.07.15 13:55 | 조회 968


                   <당나귀들>을 읽고(111번째 글쎄다 소설)

   호불호가 확실하게 나뉘었다. 글쎄다 100회가 넘어가면서 이렇게 호불호가 갈린 적은 처음이다. 작가는 ‘나’를 통해 자서전적인, 그리고 철학에쎄이식의 생각과 사고 그리고 감성을 한 껏 풀어낸다. 거기에 자신의 기호인 음악, 그것도 서양의 클라식 음악에대한, 더 나아가 로코코, 그리고 바로크의 아버지인 바하에 이르는 음악의 섭렵을 자랑한다. 또한 무수히 제시되는 낯선 문학 작품들에대한 나열이 마치 자기를 과시하는 사춘기의 소년같아 보이며, 배설물을 쏟아 붇고 혼자 시원해 하는, 혼자 골방에서 지위하는 식의 쾌감으로 비추어져 혐오스럽기 까지한 분위기를 감출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또 한 쪽에서는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쿤데라의 주제와 서슬기법에 따르는 것이어서, 보통 한국 작가들을 통해 익숙해 있는 이야기 서술 보다는 의식의 흐름과 쿤데라 작품에 녹아내린 클라식 음악의 변주 형식들을 틀로 잡아 작품을 썼기 때문에 나름 인고의 흔적이 보이는 이전의 한국소설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도라고 하였다.

    책의 제목인 당나귀들에서 첫 작품<존 쿳시의 ‘동물의 샘’으로 시작되는 리스트>에서 작가는 <당나귀들>에서 계속 이야기되는 작가의 정체성, 더 나아가 오늘 자본주의를 살아야하는 키치, 그러니까 단순반복재생산의 존재방식을 탈피하여 개별자로 살고자하는 고뇌가 한껏 담겨있다. 작가는 이 책의 첫 마디에서 ‘나는 내가 믿는 것을 말한다. 나는 나이 많은 여자다. 믿지도 않는 것을 말할 시간이 내게는 더 이상 없다.’고 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말을 빌어 변주적 기법의 서언을 선언한다(박경장님은 음악의 변주기법에서 제1 테마가 흘러나오고 끊임없이 제1주제를 변형하여 여러 음절들을 만들어 내듯이)

“ . . . 작가는 스스로 믿는 것, 알거나 확신하는 것, 정신적인 영역에서 자기가 신념을 가지는 것을 말하거나 써야 하며(p10). . .”, “ ...영혼의 불가지론이 제공하는 쾌락, 영원한 미성숙이라는 부력으로 가득 찬 매혹의 거미줄에서 벗어나 불투명하고 가혹한 신념이라는 세계로, 가능성으로 유예된 정신적 교태로 가득찬 은폐의 숲에서 벗어나 영혼의 요소를 고백하는 알몸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렵고 내키지 않는 일이다. 신념을 고백하는 일은 자신의 정신적 경계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p11). . .” 이러한 내용의 철학적 사고가 책 전체에서 표현되는데, 독자로서는 의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고, 철학은 철학으로 풀어야지, 아니면 좀 더 부드럽게 수필이거나, 그래서 우리 글쎄다 회원들은 모두 마뜩치 않게 여겼고, 혹평이 대세였다.

p23에서 T가 등장하며 공항의 모습을 보며 “한국도 이젠 어디에서도 ‘가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이라는 말을 던지며, 가난의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계몽과 이성의 기간을 건너 띠어 천박한 자본 만능주의의 사회로 넘어감으로 인해, 지금 우리 시대의 풍요 속에는 그저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한 야만, 원시적 적개심만 가득하여, 철저하게 굶주림 아닌 것에만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동화시키는데 성공하여, 소비지향적, 무의미한 군중으로서의 개인들, 획일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한다. 또한 마치 컨베이너 벨트에 실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면서 굶주림에서 천박한 풍요로움으로 바로 건너뛰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역사적인 진행만이 아니라 물려받은 유전적 소인처럼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모든 철학과 윤리의 가르침 조차도 오직 욕망을 실현하는 틀로 전락해 버린 참담함을 ‘살쪄라 살쪄라!’는 외침일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 . .왜 나는 이 컨베이너 벨트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멍하니 앞으로만 밀려가고 있는 건지! 그건 바로 이성 없이 살찜을 선택한 역사가 그대로 내 안에서 나날이 그렇게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야! 라고 <나>를 통해 토로한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 . .사방을 구분할 수 없이 황폐한 황야에서도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알고 달리는 비루먹은 당나귀가 그 자리에서 고정된, 금덩이로 만들어진 아랍산 순종 말을 탄 황제의 조각 보다 더 고귀한 법. . .”(p30)라고 하며 “. .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하고 묻는다면 ‘나는 눈 멀고 귀먹은 어리석은 당나귀요, 나는 내가 이룬 것이 아니요, 나는 내가 가진 것도 아니며 단지 내가 추구하는 것이지요.’하고. . . ”자기에대해 답한다. ㅎ, ㅎ, 그런데 이 독백은 사도 바울이 빌2:12에서 말하고 있는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와 닮은 꼴이다. 그렇다는 것이다.

T와의 논쟁 속에서 T는 <나>에 대해 예술과 몽상을 혼동한다고 하며, 가톨릭 교회와 신비주의를 혼동하는 할머니 같다고 하며

“예술이 인간의 이야기임을 부정하고 마치 예술이 예술 아닌 것, 혹

은 예술을 초월한 다른 것인 양 말하는데, 그런 너의 예술은 지독한

우상 숭배자의 교리처럼 들린다. 예술이 인간의 일임을 잊어서는 안

돼! 그리고 모호한 몽상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와 이해의 영

역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도 그의 운명이야. . ."라고 하지만 <나>는

“난 지금 한 마리 당나귀야.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나는 내 존재에

대해서 계속해서 사유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거야. 내 생각은 거

기서부터 나왔어. 그래, 네 말대로 그것은 몽상의 시작이야. 그러나

나는 삶이 몽상에서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분리될 수 있다는 네 생

각에는 찬성할 수 없어. . .”라고 합니다.

첫 장부터 느끼는 것은 철저히 자서전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우리 시대의 정체성을 이으며. . .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선험자인 밀란 쿤데라에게서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이야기가 녹아내린다. 그래서 글쎄다 한 회원은 낙타와 함께 영물로 인식되고 있는 당나귀의 느낌에 비하면 작품이 그 메타포를 충족시켜줄 만한 내용이 없으며, 이러한 내용의 생각과 사고, 철학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인데,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낼 것인가에대한 아쉬움이 있는데, 하여간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서 흘러 나오는 <몽상>을 7장에서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변주한다.

7장에서 작가는 쿤데라를 인용하여 몽상가란 <부재하는 사람의 시선에 대한 구애>라고 하며,

“. . . 시간과 인생이란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의 순환으로 이루어

진 자기 복제의 언어라고 규정한다면, 존재를 가벼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묘사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존재의 방식을 스

스로 성공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면, 이후부터 가벼움은 무거움

에 반대되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무거움의 지독한 성질을 나타낸다

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무거움이 의도적인 사색의 과정을 거쳐 다

다른 존재의 개성의 한 별명으로 예언될 것이다.”라고 한다.

여기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작가는 단절을 통해 기존의 복제, 키치를 넘어서기 위해 익숙해진,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서 떠나기 위해 여행을 택하지만, 언제나 연락이 가능해져서, 결국 그 여행 속에서도 이미 똑 같은 반복되는 삶 속에, 세계는 주어진 것이고, 우리의 얼굴과 이름은 빌려온 것 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개별자(나의 개인적인 표현)가 아니며 무수한 변이체 중에 하나, 결국 다시 갖혀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러한 가벼움을 떨쳐버릴 롤 모델로 뜬금없이 성안토니우스(A.D250에 이집트에서 태어난 신부? 수사?)와 기호논리학자인 비트켄슈타인의 은퇴의 삶을 이야기하고(p253), 또 6장의 래드클리프 홀의 <너의 존>에서 ‘존’과 ‘우나’, 그리고 ‘에브게니아’와의 레즈비안 동성애 삼각 관계를 키치가 아니라 개별자의 삶의 모델로 삼는다. 그러한 이유를 이미 대중화 되고, 미스미디어에의해 획일화 되 버린 오늘이 아닌, 이전 시대(1920년 이전)의 정신질환적인, 우울한, 신경증적인 독특한 예술가적 기질의 사랑의 이야기야 말로 키츠의 삶을 넘어서는 삶-황무지에서 이상의 광채를(P253)-이라고 풀어낸다. 과연 그럴까?

그나마 <당나귀들>을 읽으면서 키치, 반복되는 복제의 삶이 아니라 개별자의 삶에대한 삶이 쉽게 와 닿았던 것은 2장의 미국의 시인 <부코우스키>이다. 작가가 부코우스키에 매료된 것은 바로 음악이었고, 그것도 부코우스키가 술과 쎅스와 마약에 중독된 서민적 삶에도 불구하고 클라식을 즐기는 삶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절제되면서도 자연스러운 시(독자의 느낌)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음악의 마력에대해 손끝이 전율로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입안에 틀어박고 싶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견디기 힘든 아름다움(p109)이 로코코 음악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쿠프랭에게 있다고 부코우스키를 빌러 이야기한다. 특히 바로크 음악에 심취하는 것은 그 당시의 작곡가들은 그 시대의 양식속에서 작업하며, 자신들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보다는 영원한 것에 헌신하는 것이 음악이며, 예술이 원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것, 결핍한 것에대한 그리움을 무한히 반복하여 일깨우는 것이지 완전함이나 포만이 아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유한하므로 아름다웠던 그것, 소멸을 노래한다. . .(p111)

작가는 이렇게 자신과 부코우스키를 동일화 하며, 스스로의 예술성을 드러내 보이는데, 사실 독자로서 작품에대한 논란을 뒤로하고 독자인 <내>가 작가 <배수아>와 <부코우스키>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젊은이들의 혼을 일깨운 시스토 로드리게즈의 다큐 영화 <써칭포슈가맨>이라는 다큐를 통해서이다. 로드리게즈는 디트로이트의 막노동자이면서 음악을 하였다. 앨범은 단 6장 만 팔리고 그리고는 끝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I WONDER)를 들어보면, 베이스 기타의 울림에서 나는 그 원초적 힘은 하드락이나, 밥딜란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포크음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을 느낀다. 로드리게즈의 노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정책(아파트르헤이트)를 거부하는 백인 아프리카인들의 상처받은 영혼과 좌절감을 달래줬고, 급기야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디트로이트의 노동자 로드리게즈가 <써칭포슈가맨>을 가지고 남아프리카의 무대에서 그들을 만나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독자인 <나>는 작가 배수아가 그렇게 화두로 삼고 있는 <키치>가 아니라 개별자의 모습으로 로드리게스를 <부코우스키>의 시를 읽으며 불연듯 떠올랐다. 그리고 참 멋진 떠올림이라 생각한다. 로드리게스는 개별자의 삶을 살은 멋진 동시대인이다.

<야니네의 교회>는 자신이 느끼고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언어들을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풀어낸 것 같은데, 낯설고 익숙치 않다. 중간 중간에 나오는 작가와 작품이 이 장의 매듭을 풀어주는 것 같다. 예를들어 ‘파울 첼란의 <푸가>’를 통해 쏟아진 우유,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실마리가 풀리는 듯 하며, p126의 거미줄은 앞의 작품에서 언급되는 ‘영원한 미성숙이라는 부력으로 가득 찬 매혹의 거미줄에서 벗어나’(p11)에 근거하여 나름의 단초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작가가 여기서 자신의 상상력을 풀어낸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해야하는 것은 아닐텐데, 그렇다고 이 작품을 붙잡고 세월아 내월아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보기에 작가도 그렇게 독자들에게 친절하지는 않기에 나도 그렇게 진지하게 접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카덴차 [cadenza]

악장이 끝날 무렵 등장하는 독주악기의 기교적인 부분. 특히 거장적인 기교를 요구하는 독주 협주곡에서 화려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19세기가 상당히 경과하면서까지 작곡가가 적당한 곳을 지정해주면 연주자가 카덴차를 마음대로 연주했다. 연주자들은 이때 연주 기교뿐만 아니라 다소 즉흥적인 착상과 상상력을 과시한다.

박경장님은 “작가는 마지막 8장(내 어깨 위의 검은개)에서 한 껏 카덴차를 연주한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3장의 (야니네의 교회)처럼 읽어 내려가기 가 어렵다. 불편하고, 짜증이 난다. 작가의 생각, 느낌 감정을 순서 없이 써내려 가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 하여간 작가는 <당나귀들>을 통해 자기정체성에대해 끝 없이 묻고 있는데, 그러한 모습은 4장의 <내출처는 어디인가?>에서 절대적 채식주의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곤욕을 치르는 이야기를 풀어내며 ‘어느 나라에서 왔는가?’라고 묻지 않고 ‘당신의 출처는 무엇인가?’라는 낯 선 질문을 통해 역시 이야기는 정체성을 향한다. 배 작가가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밀란 쿤데라 역시 작품들 속에서 끊임없이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 , , 특히 언젠가 글쎄다에서 읽은 <불멸>에서 야녜스라는 등장인물이 어느 수영장인가에서 나이든 여인의 몸짓(손짓)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에놀랐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공허하고, 허무한지? 그리고 몇 장에서인가, 수영장 벽면에 설치된 여러 각도의 거울에 비추어진 등장인물의 모습이 서로 교차되어 끊임없이 복사되어 비추어지는 아이디어는 참 기가막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말 탁월한 글쟁이다. 이렇게 정체성, 지향성에대한 질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 . .

 

교회 절기에 따르는 예전의 색깔 중에 빨강색이 있다. 빨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성령, 순교,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한다. 이제 빨강색보를 정성껏 만들려고 하는데, 그 빨강에 들어갈 문구를 이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대상에는 <하나 하나님>, 그리고 성찬상에는 <나도 하나>로 하려고 한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150억년 존재 이래 <나>는 하나 밖에 없는 너무 귀중한 존재라는 것,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을 닮아서 그렇다는 것. 키츠는 한 가지 모델에 따라 반복재생에의해 무수히 많이 생산되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나로서 자기 존재 가치를 창조주 하나님과 동일하게 갖는다. 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 하면, 모세가 출애굽기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나다>라고 한 것 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이름인듯 아닌듯,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으나 규정지어야 하는 그런 존재로 표현된다. 그런데 바로 그 <나는 나다>가 바로 <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는 나>로서의 실존을 보여주셨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나는 나>라고 대답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끊임었이 자기 정체성에대해 묻고 또 물었는데,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정체와 방향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물으셨다. 그렇게 하나님도, 예수님도 그리고 나도 <나는 나>이다.

무수히 많은 문학과 예술이 애타게 절절하게 끊임없이 추구하는 . . . <나>에대한 집착을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칼로 매듭을 베어버리듯이

 

                                                     그렇게 <나는 나>다.

세월호 가족 304명과 그 가족들, 세월호 잠수사 김관홍, 백남기 농민과 그 가족들, 밀양과 강정의 주민들, 영덕과 삼척의 주민들, 쌍룡자동차 노동자들과 가족들도, 그리고 산과 강, 풀, 새, , , 돌맹이 하나 모두 다 <나는 나>, , ,그래서 언제나 한 바탕 생명의 잔치를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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