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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시대의 자화상(채만식과 김유정)

돌자(돌아온자유인) | 2014.08.12 18:17 | 조회 1514

궁핍한 시대의 자화상

- 채만식과 김유정 작품 분석 속 ‘글쎄다’의 '합평' 부분 풍경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 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채만식, 김유정과 동시대를 산 작가 중에 이효석의 글이다.

특정 시대에 교과서에까지 실린

유명한 미셀러니(miscellany)「낙엽을 태우면서」의 일부이다.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이를 태울 때 나는 연기의 이미지를 원두커피 향에 비유하였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고 수십년만에 다시 읽어본다.

명문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시간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지나칠 만큼 풍요로운 개인의 일상이다.

 

채만식은「레이메이드 인생」과「논 이야기」를,

김유정은「봄·봄」과「동백꽃」을 중심으로 비교, 분석해본다.

채만식과 김유정의 작품에서는

동시대를 살아낸 이효석과 같은 개인의 풍요가 없다.

이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공통적으로 사회 경제적 취약 계층이다.

도시 실업자, 몰락한 농민,

머슴(데릴사위), 소작농 자식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이들 두 작가들 작품 속의 인물들은

교육받은 정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채만식 작품의 주인공들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다.

「레이메이드 인생」의 P.는 당대 신학문인 대학교육을 받았고,

「논 이야기」의 한문덕은 생원과에 합격한 구한말의 마지막 유생 그룹원 중에 한 사람이다.

이에 반해 김유정의「봄·봄」,「동백꽃」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의 화자들은

모두 중등교육조차 받지 못한 무식계층이다.

 

 

「레이메이드 인생」의 P의 궁핍은 인텔리의 궁핍이다.

구직활동 중에 겪는 P.의 자괴감은 

20세기말과 21세기 초  금융위기를 살아낸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과,

오늘을 살고 있는 고학력 청년 실업자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서 시간을 초월한 공감을 얻는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실업상태인 P.가 겪은 어느 봄날의 묘사는 탁월하다.

‘맛깔스럽게 뽑아낸',

그 시대 입말(구어:口語)’(문학평론가 박경장 님, 동화작가 이상권 님의 표현)로 엮어낸

시대의 아픈 풍경화이다.

 

「논 이야기」의 한생원은 세 시대의 궁핍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다.

동학 이전의 조선이 그 하나이고,

일제강점 시대가 그 둘이며,

815 해방 이후에 살아낸 시대가 그 셋이다.

첫 번째 시대의 궁핍은 조선조 탐관오리로 인해 생긴 궁핍이고,

두 번째 시대의 궁핍은

일제강점기 때의 경제적 모순인 전답(田畓)의 매점매석으로 인해 발생한 궁핍이며,

세 번째 궁핍은 자신이 살아낸 앞선 두 시대의

배신(개인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의 한계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정신적 공황상태가 빚어낸 궁핍이다.

그래서 한생원은 국가를 부정한다.

 

 

 

 

 

 

 

 

 

 

김유정「봄·봄」과「동백꽃」화자들은 답답하다(성함을 모르는 동시:童詩 쓰시는 선생님).

채만식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타계하려고 하는 노력(적극적 구직활동과 땅 찾기)에 비해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머슴과 소작인의 약자의식이 부옇게 그들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대응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무지의 의식은 예비 장인의 ‘혼례 미룸’에 대해 항변하는 인물(「봄·봄」)과

소녀의 프로포즈에 대한 딴청을 부리는 소년을 창조함(「동백꽃」)으로서 구체화된다.

바로 이 대목이 김유정 작품의 미덕으로 읽힌다.

주인공 화자들이 처한 사회 경제적 현실과

소설 속의 현실과는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만 존재할 뿐

인과관계로 설정하지 않음으로써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다.

예술 범주 속에 있는 소설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해보인다.

하지만 주제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대신 인물들의 성격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독서를 마친 후 시는 이미지(Image)만 남고 소설은 인물(Character)만 남는다>(문학평론가 박경장 님).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채만식은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사회에 대해 퍽 할 말 많은 사람이었나보다.

그래서 작품 속에 서술자가 자주 개입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거북하게 읽힐 수 있다(박진숙 님).

 

채만식과 김유정의 작품들을 읽은며

때로는 앞에서 진술한 서술자 개입과는 다른 측면에서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를 근근히 살아내고 있는 ‘궁핍한 시대의 자화상’을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창조해내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가난도 때로는 추억이다(안홍택 목사님).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대한 현실인식,

이것은 어쩌면 작가에게 주어진 필수인식인지 모른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당대를 사는 지식인은 공허하다.

이런 면에서 채만식과 김유정은

이러한 ‘공허함’에서 어느정도 비껴서 있는 작가들이다.

 

반면에 국가공동체의 총체적 빈곤상태인 일제강점기 상황 속에서도

'낙엽을 태우며 커피 향을 향유하는' 정신적 풍요를 얘기하는 개인도 존재해야만 할 거다.

하지만 항일운동 등의 거창한 사회참여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지식인인 작가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사회의 모습에 대해

최소한의 스케치만이라도 하는 것이 후대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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