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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secret sunshin)을 보고

하늘기차 | 2007.06.03 17:41 | 조회 1552




세간에 이 영화에대한 이야기가 꽤 회자되고 있습니다. 전도연, 송강호, 그리고 이창동이라는 탁월한
영화인들, 그리고 단역배우들에의해 우리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진 느낌이 듭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영화에대한 느낌 중에 더러 교회를 폄하하였고, 더구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대항하는
모습에 참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댓 글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선적으로 영화 제목에 친근감이 갔습니다. ‘밀양’, 그러니까 ‘비밀한 볕’인데, 어떤분은
밀(밀)을 ‘빽빽하다’. ‘촘촘하다’로 보고 빈틈없이 들어찬, 여지가 없이 들어찬 볓으로 보는데 저는 그
보다는 영어번역처럼, 'secret sunshin' 즉 ‘비밀한 볕’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추어 있는,
드러나 있지 않은 볕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볕은 따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 처음
장면에서 밀양 가까이에서 차가 고장나 차 안에서 바라보는 하늘 볕이나, 차에서 내려 뚝방 밑에서 아들과
쪼그리고 앉아 쬐는 볕이 참 따스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 날 때에도 신애의 집 마당 하수물이
흐르는 한 쪽 결코 깨끗지 않은 한 구퉁이 를 내리 쬐는 볕도 따사로웠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새로운 희망, 따사로움을 그것도 감추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특히 보이는 것, 드러내기가 주종을 이루는 시대적 흐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작다는 의미도 있고, 보이든 보이지 않던 자기 모습 자기 자리에서 지킨다는
그런 자기 정체성 까지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어 - ‘비밀한’, ‘은밀한’ 보다는 - ‘감추인 볕’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사별하고, 나중에 밝혀지지만 남편이 바람을 피는 과정 속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아픔을 미쳐 추수르지 못하고, 남편의 고향에 아들과 함께 내려옵니다. 사실 그러한 신애에게 밀양은
“밀양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요.” 하고 송강호를 통해 두 번이나 이야기되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이 있는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그 곳에서 신애는 아들을 잃게됩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신애에게 삶의 희망을 열어준 것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통해 신애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신앙을 통해 삶의 새로운 의미를 얻게됩니다.

교회의 예배, 구역 예배, 밀양역에서 전도집회 하는 모습, 여름 수련회 모습...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희화화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카메라가 클로즈업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바로 그대로 교회의 모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낯 설고, 다소 깍아내린 듯한 느낌이
들었는지, 그래서 오히려 좀 더 진지하게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들었지만,
그래도 원래 교회의 모습이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항상 희화화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에도 적은 수가 모였을 때, 멸시, 핍박을 받았는데, 물론 밀양에서는 멸시나 핍박과는
거리가 멀지만 교회의 모임 자체의 희화성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여간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생활을 통해 믿음을 키워가는 중에 주인공 신애는 아들을 살해한
사람을 면회가서 그의 죄를 용서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런데 정작 면회 장소에 나온
죄수의 표정은 평안하고, 보기에도 말끔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는
신애에게 이미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고 모든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애는
완전히 넋을 잃고맙니다.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느님에게 용서받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가 있다는 거야, 나는
이렇게 고통 속에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살인범은 그렇게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거야”합니다. 아니 내가
용서해야지 왜 하나님이 용서해, 용서할 사람은 내가 아닌가 하며, 견디지 못해합니다. 내가 아직 용서를
안했는데, 이미 그 살해의 죄에서 벗어나 자유하며, 평안해 하는 죄수에게 견디지 못해합니다. 그 때부터
신애는 하나님께 항거하며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자결하기도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릅니다.

여기서 작품에대한 한 단편적인 이야기가 있는데,
『청문회 열기가 한창이던 1988년 '외국문학'이란 계간지에서 이청준 선생의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즉각적인 느낌은 ' 이게 광주 이야기구나'란 것이었다. 청문회에서는 광주학살의 원인과 가해자를 따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제 화해하자는 공론화 작업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벌레 이야기'에는 광주에 관한 내용이 암시조차 없는데도 나는 광주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그 소설이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 라고. 그리고 가해자가 참회한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누가 알 것이냐. 다른 한편으로는 이청준 소설의 큰 미덕인데, 그 이야기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을 느꼈다. 어찌 보면 되게 관념적인 이야기인데 그게 늘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 개인사와도 관련이 있었겠지. 그러다가 '오아시스'를 끝낸 뒤 밀양이라는 공간의 느낌과 그 이름이 이루는 아이러니한 대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게 나도 모르게 '벌레 이야기'와 결합된 것 같다.』(<씨네 21> 허문영- 이창동 대담 중에서)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도 이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언젠가 로마의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교황께서 광주에 내려가 광주 시민들에게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메세지를
전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저도 다소 분노하였습니다. 당사자들은 아직 준비가 안되어있는데,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 당사자에게 화해를 하라 하는가
하는 분노를 느낀적이 있었습니다.

누가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이 창동 감독은 기독교의 본질인 화해, 용서, 죄사함에대한 화두를 이 영화를
통해 과감하게 던진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밀양은 교회의 신앙의 모습을 다소는 희화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전형적인 우리의 신앙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이 유괴범은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자신의 죄를 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죄수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신애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신애는 이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됩니다. 배신감을 느낍니다. 절규합니다. 내가 용서해야지,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어 합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 익숙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고,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죄라는 것이 그냥 허공에 떠있는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죄에대한 당사자가 있고, 대상이 있을 터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로 모든 것이 일단락되는 것으로
봅니다. 구원의 은총이 단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만 규정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창동 감독은 칸 영화제의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살아야 할 의미는 하늘이 아니라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 있다는 걸 <밀양>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과 나와의 1대1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겠지만 구원의 표출은 함께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나타날 수 밖에 없고, 그 구원의 양태가여전히 이기적이며, 관용이나, 배려가 없다면 결국
허구적인 종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밗에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신애는 자기연민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나’입니다. 내가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해야 그래서 나와 죄인이 서로 하나가되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있을텐데,
대표적으로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기 아들을 살해한 무장간첩을 용서하는 것이 전통교회의 신앙이고
용서인데 여기서 그러한 관계는 어그러져 버립니다. 결국 신애는 교회에 안티를 걸고, 어긋장을 놓습니다.
교회의 장로님을 유혹하기도 하고, 집회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미 닫혀져버린 신애의 마음을 어느 누구도 열 수 없다는 것에 보다 더 큰 아픔, 비애가 있습니다.
신애는 영화 중반을 넘어가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도전장을 냅니다. 하나님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장면을 매우 못 마땅해 합니다. 보수적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이 모습을 바라보기가 영 거북스러웠을 것입니다.

야외 신앙집회에서 신애는 목사의 설교 중에 ‘거짓말이야!’라는 김추자의 노래를 확성기를 통해 틉니다.
거짓된, 틀에 박힌, 이기적인 종교행위를 통쾌하게 한 방에 날려 보냅니다. 그 ‘거짓말이야’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목사가 이 장면을 보고 통쾌해 하며 좋아한다면 이상하게 보실지 모르지만, 만약
희곡을 직접 쓴 감독이 설정을 다른 종교로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마찬가지 아니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적, 제도화한, 권력화한 그래서 일상의 삶, 즉 “밀양이라고 뭐 다르겠어요? 사람
사는 데가 다 그렇지요.” 하는 우리내 삶의 자리에 깊이 들어 와 있지 않는 어떠한 종교, 정치, 단체도
결국 희화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신애의 몸부림은 구원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자신의 처지를 온 몸으로
드러내는 신애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계실까요? 마치 욥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욥의 모습과 중첩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 욥기에서 하나님은 욥의 죄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욥이 고통을 받는 것일까요?
의로운 자의 고통인데, 욥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죄 없는 욥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밀양에서는 이러한 주제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지만 하여간 그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신애의
모습에서 욥을 연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신애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실제 신애는 두 번이나
아들 유괴범을 만나게 되는데 한 번도 그 유괴범의 딸에게 화해나, 용서, 관용의 몸짓을 보이지 않는
자기 폐쇄의 틀에 갖히어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바로 밀양이라는 영화제목의 무게감을 맛 보게
됩니다. 바로 송강호입니다. 자동차 정비업소 사장 송강호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신애곁에 항상
있습니다. 일상에서, 위기에서, 즐거움 속에서 마치 밀양과 같이 ...

신애는 누구로부터도 자기의 고통을 해결받지 못하는데, 그 고통스러워 하는 신애 곁에 늘 송강호가
함께 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신병원에서 나와 머리 손질부터 해야겠다는 신애가 들어간 미장원에
마침 유괴범의 딸아이가 직원으로 일을 합니다. 머리를 맡기고 몇 대화를 하는 과정 속에 그 딸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힙니다. 용서와 화해의 자리가 될 성 십던 자리에서 신애는 그 미장원을 박차고 일어나
자기 집으로 향합니다. 결국 용서, 관용, 화해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와서 마당에 나와 스스로 거울을 앞에 놓고 머리를 자릅니다. 그 때 그 거울을
송강호가 붙들어줍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마당 수채의 더러운 작은 또랑을 보여줍니다. 그저 일상의
작은 마당 구퉁이, 그 곳을 햍볕이 따사로이(이 것은 나의 느낌인데, 반드시 따사로워야 합니다. ㅋ, ㅋ...)
내려쬐입니다. 그리고 머리를 자르려고 거울을 응시하는 신애의 얼굴이 거울에 비쳐 관객과 눈이 마주칩니다.

“당신 같으면 이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것 같에? 느낌이 어때”하는 것 같습니다. 고통은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어찌 우리가 이 아픔 고통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앞에
송강호가 있습니다. 밀양은 바로 송강호입니다. 내 입장에서 밀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햇살입니다. 그런데 신애는 그것을 전혀 못 느끼면서 이미 송강호의 함께함 안에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던, 모르던 느끼던, 느끼지 못하던 하나님은 송강호처럼 웃는
모습으로 거울을 붙들어줍니다. 바로 곁에서 밀양으로...

첫 장면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자동차 수리센타 주인 송강호의 정비차에 함께 동승한 신애가
송강호에게 반문합니다. “밀양의 뜻이 한자로 무언지 아세요? 그러자 송강호가 대답합니다.
“글쎄예”, 그러자 신애가 비밀 밀(密), 볕 양(陽) ‘비밀의 햇볕’이라고 하자 송강호가 ‘비밀의 햇볕’
하고는 허허하고 넉넉한 웃음지으며 ‘좋내예’합니다. 짧은 대화이지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놓칠 수 없는 대사인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비밀의 햇볕을 쬐이면서도
무심코 그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이다. 질문하는 신애도, 그리고
허허하며 사람좋게 웃는 송강호도 누리면서도 누리는 것을 모르는 비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마치 예수님이 빌라도법정에 섰을 때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드러나 있지만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영화 속 대화에서도 신애가 영화 앞 부분에서 거듭 여기 어디 하나님이
있어요, 하나도 안 보이지 않는데 합니다. 그러나 영화 뒷부분으로 가면 신애는 그 안보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야기 합니다. 봐라, 똑똑히 봐라 하면서 하나님에게 온갖 해꽂이를 합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송강호입니다. 항상 신애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애는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도움을 받습니다. 머리를 자르며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신애 앞에서 송강호는 거울을 들어줍니다.

드러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손 길이 지금 우리 가까이에,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항상 오고 있다는 소중함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자신의 처지가 힘들고, 어느 누구도 나를 이해
못해 하실지 모르지만 섬세하고도 세밀하게, 그리고 사물에대해 존귀한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 분은
항상 나와 함께 하였음을 여러 가지 정황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당면한 문제를 척척 들어주며, 응답해주는 그러한 하나님, 해결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가장 힘들어 할 때, 하나님은 그 힘든 일에 같이 힘들어하며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아니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은 지금도 송강호입니다. 바로 밀양입니다. 즉 비밀한
햇볕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마당 한 쪽, 그렇다면 그 마당은 온 우주이지요, 그 마당 한 쪽 별로 깨끗지
않은 무심한, 하수 개천 한 곁을 햇볕은 항상 천연하게, 따사롭게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밀양 뿐만아니라, 바람, 들꽃, 흐르는 시냇물, 작은 돌맹이 하나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늘 나와
함께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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