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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 삶 한편

박경장 | 2007.01.18 11:36 | 조회 1217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싹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내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의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가만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학과 지성, 2006. 문태준 시집 <가재미>에서 "가재미". * 이 시는 2006년 비평가들에게 가장 주목 받은 시다. 실험적 난해한 현대시, 더욱 개인의 의식 속으로, 그것도 20세기 초의 혁명처럼 일어난 모더니즘자가들의 의식의 깊이도 결여된 채, 후기 소비산업사회와 발맞추어가듯 일회용 소비상품처럼 읽자마자 날아가 버리는 화려하게 포장된 설익은 ‘풋시’들 사이에서 이 만큼 여물지고 단단한 서정시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를 읽으며, 문득, 길가 횟집 수족관 바닥에 누워있는 넙치를 떠올렸다. 자기가 누워있는 바닥이 수백 미터 심해의 바닥이 아니라, 50센티도 못되는 수족관 바닥이라는 사실을 넙치는 알까 라는 다소 실없는 생각의 바닥에 잠시 닿았었다. 찰랑찰랑 물밑 바닥이 다 들어난 삶의 바닥에 그녀가 한 쪽으로 눈이 쏠린 가재미 모양으로 모로 누워있다.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시 속 화자 역시 가재미 모양으로 그녀 옆에 모로 눕는다. 누워, 얼마 남지 않은 물밑 수평 같은 그녀의 바닥 삶에 물을 넣듯 그녀가 살아 온 수직 삶의 깊이를 부어준다. 좌우를 흔들며 살아 온 파랑 같은 삶들이며. 더 이상 서서 지고 가기엔 너무 무거워, 어느 겨울 날 “폭설을 견디지 못해” “가랑이 사이가 버러지고” “등뼈가 구부정해져”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수직의 삶들을 떠올리며 화자는 그녀의 삶의 바닥에 깊이를 부여하려한다. 이 시는 이런 삶의 시간과 공간을 각각 수직과 수평이라는 이미지로 잘 응축 시켜놓고 있는데, 이 이미지들의 대비의 중심에 가재미가 있다. 더 이상 삶의 시간이라는 수직의 깊이가 없어 삶의 바닥에 수평으로 누운 그녀의 공간적 이미지가 가재미로 응축된 것이다. 모로 누울 때 퀭한 눈이 한쪽으로만 쏠린 환자의 모습에서 비유된 가재미는,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 내재된 생명의 시계가 다 가서, 죽음 쪽으로만 쏠린 삶의 한 단면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그려낸 ‘객관적 상관물’인 것이다. 이젠 더 이상 그녀는 수직의 물 안쪽 삶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안과 바깥을 코 하나 사이에 두고 가재미눈을 맞춘 화자에게 그녀는 삶과 죽음이라는 심해의 거리를 둔다. 그 사이의 깊이만큼 그녀는 오히려 화자에게 생명의 물, 인식의 물을 "적셔준다." 그녀가 바닥에서 적셔주는 물은 잠시 바닥에 함께 엎드렸던 화자가 다시 일어서 새삼 느끼게 될 훨씬 깊어진 삶의 수직의 깊이고, 그것의 아름다운 서정적 형상인 "가재미'라는 한편의 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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