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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 『자전거 도둑』- 상처입은 영혼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한동우 | 2006.10.28 19:51 | 조회 2660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의 온갖 부조리의 책임으로부터 한가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라도 한번 비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그건 너무 심합니다. 그건 비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방어기제입니다. 살아남지 않고서야 저항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70년대와 80년대를 어떤 모양으로 살았든, 우리 모두에게 남은 것은 자괴감과 죄의식입니다. 그래요. 21세기는 이 죄를 씻어 구원을 얻는 희망의 세기입니다.

"차라리 죽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 (자전거도둑)

혹부리 영감 앞에서 버러지가 되어 버린 아버지. 축 처진 어깨를 들어 올려 아들의 뺨을 후려치다. 어깨에 힘이 빠졌으니 완벽한 스윙 곡선을 그리면서 - 타이거 우즈도 흉내 내기 힘든 follow-thru와 함께 - 제대로 올려 붙였겠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맑아지는 느낌뿐이었다." (자전거 도둑)

아버지의 모습이 또렷이 들어 왔어요. 오히려 히죽거리던 나를, 그래 내 새끼! 니가 나를 돕는구나. 그래도 내가 니 애빈데. 기특한 것! 하며 후려치던 아버지 모습이 말이에요. 영감님 앞에서 아들 교육 단단히 한번 시키겠노라고 다짐하며 어금니도 굳게 다무셨지요. 하지만 대책없이 흔들리던 그 눈동자. 아, 이런 제길. 그 눈물가득 고인 눈동자를 어떻게 하라구요!

"사내란 모름지기 한때는 웅크리며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말하자면 풍뎅이처럼... 알간? 그게 필요할 때가 있는 게 인생이야.
그렇게 해서라도 살다 보믄 거저 맹탕으로 걷어 치우는 것보다 낫단다.
버러지가 돼도 좋다는 데까지 가봐야 한다이" (원색생물학습도감)

새 자전거를 훔쳐 탄 여인.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신도시의 자전거 전용도로를 달린다. 알은체를 하려고 준비하던 나를 비켜가며. 내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고. 죄의식은 나만의 문제도 아니다. 탄천의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 고관대작이며 부자들, 건물 지하 단란주점 마이크 앞에서 정신없이 노래부르는 이들,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구원하겠다고 떠드는 이들, 섹시한 젊은 여성, 어느 누구 하나라도 이 세상에 빚지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가짜가 왜 가짜인 줄 모르는 군.
소위 원본을 닮으려 애쓰기 때문에 가짜로 몰리는 거라구.
가짜도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으면 그건 진짜지.”
“그럼 가짜라도 좋다는 말이에요?”
“뭐가? 가짜? 그런 건 애시당초 없대도 그러네.” (마라토너)

이로써 나는 구원을 얻는다. 내가 김소진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비겁함 때문이리라.

"하지만 불화가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어찌 새로운 절망의 시작이 아닐 수 있으랴!
왜일까? 내가 한때 뭔가와 불화했거나 적어도 불화하는 시늉을 했을 때,
사실 그것은 거꾸로 세상과의 화목을 목마르게 꿈꾸었기 때문이 아닐까? 경복여관에서처럼.
하지만 이제 경복여관을 또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경복여관에서 꿈꾸기)

불화(不和). 우리는 무엇과 和하려는가. 그렇다면 반드시 무엇과 불화해야 하는가.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 갔다
..........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잎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오히려 죽은 자는 말하고, 산 자는 침묵한다.
80년대를 통과한 이들은 이제 21세기가 되어 이주 노동자를 착취하는 회사의 관리자가 되거나 (달개비꽃) 권력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려고 전향하고 (처용단장), 과거를 회고하면서 자신의 운동경력을 무기력하게 팔아 먹는다 (문산행 기차). 그러니까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의 운동은 '낭만적 허위'일 뿐이다 (혁명기념일). 사람들은 현실의 법칙에 따라야 한다는 전향의 논리가 생기고, 혁명을 꿈꾸던 사람조차 가짜 외제물건을 팔러 다니는 보따리장수가 되고 만다 (마라토너). (황명국)

"지옥이 있으니까 아름다움이 있어. 그 둘이 본래는 하나이듯이......
왜냐하면 아름다운 건, 그리고 어떤 걸 아름답다고 부르기로 한다면 그건 애진작부터 지옥이 아니었지요. 물론 그걸 낙원이라고 부르기도 어렵고......
하지만 어떤 꿈을 가리키는 것만큼은 분명해요. 그 꿈은 뭘까요?
그것은 아득한 기억뿐일지도 모르죠. 사실인지 착각인지도 잘 모르겠고......
아무튼 흔적없이 지나간 시간을 붙드는 유일한 육체처럼 흔들림없이 버티고 섰는 그 기억의 집 말예요. 바로 저 갈매나무 같은 것" (갈매나무를 찾아서)

열매와 함께 독한 가시를 품고 있는 갈매나무처럼 삶은 오히려 역설적이다. 불화는 화해와 공존한다. 이 진리에 대한 통찰없이 어찌 자유로울 수 있으랴. 세상은 변화되는 곳이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순간 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좌절한다.

"이어도는 피안의 섬이고 가멸진 낙토입니다. 그러나 이어도는 동시에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 머무르는 눈물의 섬이며 비극의 섬이기도 합니다......
기쁨과 아픔, 환희와 비탄은 하나의 창문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풍경인지도 모릅니다. 빛과 그림자, 이 둘을 동시에 승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용기이고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빛은 어둠을 만들고, 어둠은 빛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S. Freud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무의식(id)에 잠재해 있다가 의식수준(ego)으로 떠오르는 것을 문화와 교육을 통해 형성된 초자아(super ego)가 억압하기 때문에 왜곡되어 발현되는 것, 다시 말해 방어기제를 통해 왜곡된 행동이 현실에서의 인간의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무의식에 잠재해 있는 결정적 시기 (critical period)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그러니까 초자아의 방해없이 원기억을 떠올리는 것), 그것을 직접 다시 경험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문제의 근원을 없애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통찰 (insight)이다. a-ha experience. 깨달음이다. 거듭남이다.

어떤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가능한가? 다시 말하자면, 어떤 문제이든지 그 근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어 해결할 수 있는가? 선과 악은 분명히 구별되는가?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인가?

인간문제의 해결은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김소진은 분명하다고 믿는 선과 악의 기준이 자신의 20대를 통해 급격히 변화하는 것을 경험한다. 실향민 아버지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선과 악의 기준과 대학 입학 이후 - 그 당시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 새롭게 학습된, 혹은 깨닫게 된 선과 악의 기준이 그것이다. 김소진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자신이 끝내 극복해야 할 현실이었지만, 결국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자기 자신의 거울이라는 것을 느끼고 또 느낀다.

이토록 한가지 문제에 집착한 작가가 있을까. 김소진을 살게 한 것은 그가 가진 단지 몇가지 기억들이다. 아버지, 신촌역 (백마나 일산으로 가기 위해서만 필요하다), 글쓰기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자신을 받아 줄 여인. 김소진에게 있어 이러한 소재들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문제에 관한 글을 쓰기에는 충분하고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김소진의 글에 등장하는 토속적 표현들은 그가 끊임없이 되묻고 있는 질문, 그리고 독자와 공유하는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메시지에 견주면, 오히려 어색한 분칠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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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진. 기형도. 이효석. 이상
김현식. 김광석. 유재하. Janis Joplin. Jimi Hendrix
모차르트,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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