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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 산투리와 춤과 여자

한동우 | 2008.06.23 19:47 | 조회 2245
19세기에 이르러 극단으로 치달은 산업혁명은 유럽과 미국에서 첨단의 자본주의 얼굴을 내보인다. 지식인들은 20세기의 세계는 합리적 이성을 통해 인류구원의 체제와 제도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꾼다. 과학과 이성의 세기가 밝아 온 것이다. 신화적 상상력과 광기는 정신병원과 감옥에 감금되었다(Foucault). 자유주의는 개인의 도덕적 삶을 강조하였다. ‘국부론’의 아담 스미스가 경제학자 이전에 도덕론자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실을 실증한다. 도덕적인 생활과 자유로운 경쟁이야말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현실 유럽의 20세기는 극단적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고, 전쟁을 통해 잠을 깼다. 온 유럽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불바람 속에 휩싸인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

카잔차키스는 반식민지투쟁의 선봉에 서기도 하고, 종교와 철학에 심취하기도 하고, 신화와 이교(異敎)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의 사유의 결정체인 것이다. 실존 인물이기도 한 조르바는 소설 속의 인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여전히 카잔차키스는 그를 창조해 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얻은 신화적 상상력과 니체의 초인은 조르바에서 인격을 갖추었다. 생에 대한 의지에 충만한 조르바는 누구보다 노동에 열중하는 사람이었으면서, 동시에 산투리를 놓지 않는, 오히려 산투리를 통해서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종국에 그는 주인공인 ‘나’에게 산투리를 보낸다. 산투리를 통해 얻은 생명의 기쁨과 평화와 구원을 주인공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우상화된 신과 종교를 조롱하고 거부하라.
수도원의 승려들은 협잡꾼 조르바와 결탁하여 땅을 팔아먹는다. 그리고는 거기에 케이블카를 세워서 큰 돈을 벌려는 조르바와 ‘나’의 세속적 물욕을 방관한다. 질탕하게 놀고 난 조르바가 세운 케이블카는 작동하자마자 타락한 수도승들이 만든 성상 (칼을 든 성모)에 의해 벼락과 바람을 맞으며 무너지고 만다. 컬트(cult)와 우상은 서로가 서로를 만든다. 이 사이에 성직자가 있다. 혼비백산한 수도승들은 수도원도 태워먹고 땅도 빼앗기고 모조리 도망가버리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단죄하는가?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
문명의 발상지이자 생각(thoughts)의 발상지인 그리스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조르바에게 있어서 오르탕스는 ‘조국’ 그리스이다. 이교도인 오르탕스는 크레테에서 온갖 제국의 침략자들을 몸으로 받아낸 그야말로 백전노장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남자를 기다리는 여인, 그러나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소용돌이에 휘말려 빠져 죽는 운명을 맞게 되는, 사이렌인 것이다. 사랑할 수 밖에 없으면서 동시에 미운 조국이다. 가엾고 불쌍하면서도 저주하고 부인하고 싶은 조국이다. 식민지들의 여성은 바로 그 식민지의 땅과 닮아있다. 그리스는 땅위의 모든 식민지, 제국주의의 식민지, 자본의 식민지, 종교의 식민지, 그리고 이성의 식민지를 표상한다. 이것이 조르바를 ‘그리스인’으로 특정한 이유인 것이다.

조르바에게 돌을 던져라.
남자를 원하는 여자를 혼자 자게 두는 놈은 지옥에 간다. 그렇다. 조르바는 가는 곳 마다 그곳의 여자들을 탐했다. 그런데 과부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누구나 음탕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누구나 자신에게 기회가 오면 그 여자를 자빠뜨릴 생각에 빠져 있던,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실제로 그 여인과 정을 통했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부활절이 되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금을 바치던, 바로 그 마을 사람들이 여자를 죽이는 것이다. 잔인하게 죽여서 그 머리를 교회 대문에 던져 버린다. 내가 살기 위해서 여자를 죽이는 것이다. 만약 조르바가 돌을 맞아야 한다면 그건 종교와 도덕과 합리적 이성의 껍질에 둘러싸여 있는 내가 살기 위한 속죄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르바에게 돌을 던져라.

생의 의지로 가득찬 죽음.
조르바는 죽어가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창틀을 붙잡고 선채로 그는 “천년을 살아야 할 내가 죽다니.”하면서 죽었다. 그의 손톱은 창틀에 아마도 깊이 박혔을 것이다. 곡괭이 하나로 갈탄 광산을 파면서 노동했을 그의 손에는 생의 끝자락을 잡으려는 힘이 충만했을 것이다. 술과 음식과 춤과 여자라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떠들던 조르바의 손바닥은 자신과 이 세상을 가르는 창틀을 부수고도 남을 정도로 거칠었을 것이다. 삶을 부정하면서 등장하는 우월한 가치체계는 한낱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생의 의지는 부정적 세계관을 뒤엎고 그것을 극복하는 힘이다.

조르바는 찾아왔다가 떠나갔다. 어느날 부둣가에서 만난 조르바는 여느 선술집이나 늦은 저녁 골목에서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다. 직설적이고 거칠며, 행동이 빠르다. 그는 제발로 왔다가 제발로 간다. 떠벌이기 좋아하는 뻥쟁이다. 용감하다기 보다는 무모한 인간이다. 사려깊다기 보다는 해본 일이 많은 사람이다. 예술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놀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널리고 널린 인간이다. 이런 인간들은 언제나 찾아온다. 그리고 또 언제나 떠난다.

또 한세기가 지나갔다. 21세기.
첨단 정보통신과 교통수단은 인터넷과 지구적 감시체계를 통해 전 지구를 하나의 감옥으로 만들었다. 조지오웰의 상상은 오히려 낭만적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포획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합리적 이성이라기 보다는 신화적 낭만과 상상력이다. 지구라는 나뭇잎 끝자락에서 끝도 없는 어둠의 나락을 내려다 볼 때, 바로 그 때 그곳에서 시(詩)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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