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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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성한 오독(誤讀)의 즐거움

한동우 | 2008.05.16 15:28 | 조회 1467
조선시대 학자인 이덕무는 책에 대한 집착과 반복해서 읽는 버릇이 지나쳤는데, 자기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간서치, 看書痴)라고 부를 정도였다. 남산골에 어딘가에 살았던 모양인데, 아침에 일어나 방안에서 해가 비치는 쪽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여, 햇빛이 옮겨갈 때마다 따라 다니며 글을 읽고, 새 책을 구해서 읽게 되면 비로소 웃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덕무가 웃는 소리를 들으면, 그래서 새책을 얻어 읽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서자 출신이었던 이덕무는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직업을 유일하게 가졌을 뿐, 평생 백수이거나 농부로 살았다. '책을 읽는 것은 벼슬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조선시대에 이덕무의 책읽기는 지식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삶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었다. 이덕무는 책을 천천히 정독하고, 소리내어 읽으며, 옮겨 쓰며 읽고, 완전히 이해할 때 까지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앗! 문병준???). 두보의 오언율시를 좋아했던 이덕무는 입속으로 웅얼거리며 시를 읊는 걸 즐겼는데, 마치 앓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고 하고, 그러다가 새로운 이치를 깨닫게 되면 방안에서 벌떡 일어나 까마귀 우는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를 일러 바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듯 싶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미쳐야 미친다 (不狂不及)", 학문이든 예술이든 미치지 않고서 깨우치지 못한다는 道에 충실했다. 이덕무는 책읽기에 미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는 책을 빨리 읽는 것에 대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일이라고 했고, 늘 '다시 읽기'를 권했다. 또 일본의 문학가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는 "슬로우 리딩"이라는 걸 제안하면서, 대부분의 텍스트는 속독이 불가능하거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아무리 사소한 텍스트라도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입속으로 따라 소리내어 읽으며, 저자의 쓰는 속도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생각의 속도를 제어하면서 천천히 읽으라는 것이다.

난, 비교적 책을 빨리 읽는 편에 속하고, 많이 읽으며, 여러권을 동시에 읽으며,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소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책의 전체적인 내용, 작가의 이념정향, 중요한 메세지 정도가 얼마간 기억 속에 남아 있긴 하지만, 나중에는 아예 잊어 버리거나, 어떤 경우에는 엉뚱하게 기억하고 있거나 한다. 그러니,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이름이 각각 무엇이었던지 잘 기억하지 못하며, 셰익스피어니, 헤밍웨이의 명문장 하나 제대로 외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어쩌면 책읽기를 즐긴다기 보다 일종의 활자중독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정독하라는 걸까 (그러고 보니, 종로의 옛 경기고등학교 자리에 만들어진 도서관 이름도 정독도서관이군).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다른 방식의 행위와 구별되는가.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예술을 감상하는 행위로서, 그림을 본다든지, 음악을 듣는 것과 결국 같은 행위인가, 아니면 구별되는 행위인가. 일단 골치 아픈 질문들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그렇다면 책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무얼 갖고 책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부터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까, 책은 정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독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책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나 자크 데리다는 글을 어렵게 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걸 영어나 일어로 번역하고,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글을 읽다보면 욕지기가 터져 나오기 일쑤다. 사르트르도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원저자 하이데거의 판단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만 어려운게 아니니 뭐 창피할 일도 아니다. 지난 봄에 제주도에 있으면서 난 제임스 조이스에 흠뻑 빠졌었는데, 완전 흠뻑은 아니다. 왜냐하면 글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즈'의 원본을 찾았는데, 차라리 찾지 못하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그저 이게 영어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어려운 문장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이런 제길, 어떻게 빨리 읽나. 이걸.

다시. 왜 정독하라는 걸까.
빨리 읽으면 줄거리를 파악하고, 메세지를 건져낸다. 아하. 오비디우스는 삼라만상이 변화하는 것이라는 걸 신화를 통해 말하고 있었구나. 파우스트는 치열한 자기 고뇌와 번민, 혼란과 방황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기 위해 애썼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구나...책중의 책. the book. the bible. 성경으로 가보자. 신구약 66권을 통해 사랑의 메세지를 주는 거구나.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어디로 갔으며, 지레네와 나르시스는 또 어떻게 된 건가. 헬레나와 오이포리온은? 아브라함과 이삭은? 물로 포도주 만든 이야기는?
빨리 읽으면 잘못 읽을 염려가 없다. 적어도 읽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걸로 땡이다.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천천히 읽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오독(誤讀)이다.
물론, 문장 자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독도 있다. 그러나, 천천히 읽으면서 생기는 오독은 '창조적 오독'이고 '풍요로운 오독'이다. 라우라 에스키벨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렛에서 보여 주는 수많은 요리들을 통해 어떤 암시를 보이려고 했던 것일까. 김소진과 안도현은 갈매나무를 서로 어떻게 다르게 보았던 것일까. Read between the lines. 풍요로운 오독은 행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행간에는 저자의 의도가 숨어있기도 하고, 저자 스스로도 모르는 보물들이 숨어있게 마련이다. 그러니 정독은 풍요로운 오독의 조건이고, 오독은 저자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즐거움인 것이다. 게다가 같은 텍스트를 읽고 난 후 서로 오독한 결과를 나누며 낄낄거리는 일은 풍요로운 오독의 제곱, 세제곱이 될 테니 이제부터 오독을 권장해야 할 판이다.

파우스트를 읽고 글쎄다 멤버들이 각자 스스로 어떻게 그 책을 오독해 냈는지를 뽐내는 걸 보고서 아! 이 얼마나 풍요로운 오독인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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