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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켤레의 구두를 가졌던 사내

박영주 | 2009.02.12 00:18 | 조회 1682
어쩌다 보니 책을 소개해 놓고 제일 나중에 후기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발제하는 날부터 계속 지각입니다.
강기숙님 글에 어느새 대부분의 글쎄다 회원들이 답글을 올렸더군요.
착실하고 성실한 글쎄다 여러분들께 우선 박수와 감사를 보냅니다.

전 단편을 좋아합니다. 단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간결하면서도 뇌리를 찌르는 듯한 위트와 반전을 즐깁니다. 그래서 주로 단편집을 보면 일단 손이 갑니다. 그 중에서도 윤흥길의 책은 제 손을 여러번 가게 했습니다. 그의 책은 위트와 반전을 넘어 더 깊은 속을 찌릅니다. 읽고 나도 그 여운이 가슴에 길게 남습니다. 80년대초 사방에서 사람들이 내몰리고 저항할 때 저는 감히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저에겐 조세희의 난쏘공(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모두들 줄여서 이렇게 불렀지요...)처럼 직접적인 메세지를 주는 글보다 오히려 윤흥길의 글이 더 가슴에 깊이 박혔더랬습니다. 이번에 다시 예전에 읽었던 글을 다시 읽는 동안 나는 이미 40이 넘었고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고 하는데도 그의 글이 주는 무게는 여전히 똑같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어쩌면 더 깊은 무게로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전히 제가 놓지 못하고 있는 구두들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매우 하찮은 차이지만 분명히' 말하고 있듯이 권기용의 구두는 '열' 켤레였습니다. 남의 일에 조금도 신중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자기 멋대로 '아홉' 켤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쉽게 '남아 있는 아홉보다 없어진 하나가 갖는 절실한 의미'를 몰각해버림으로써 원래의 것은 없어지고 처음부터 아홉이었던 것처럼 생각합니다.(직선과 곡선) 본질은 없어지고 엉뚱한 것이 주제가 되어 회자되는 일은 너무나 흔해서 새롭지도 않습니다. 지금도 용산참사에서도 집을 빼앗기고 그것을 지키려다 죽어 간 사람들에 대한 것은 누구도 안중에 없고, 경찰 진압과정에 용역이 들어갔는지, 시위대에 다른 배후세력이 있었는지만이 주요 뉴스거리입니다.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말장난에 휩쓸려 경찰과 시위대의 불법여부에만 온통 관심이 쏠립니다. 또다시 절실한 한 켤레는 아홉 켤레 속에 묻·혀버립니다. 어떨 땐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났던 미스 정을 모르는 사이라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 한 켤레의 구두를 숨기기도 하고, 다시 버스에서 내려 부르는 미스 정의 눈빛에서 숨겼던 한 켤레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엄동)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부자는 경멸해도 괜찮은 것이지만 빈자는 절대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다....(중략)....우리는 우리 정부가 베푸는 제반 시혜가 사회의 밑바닥에까지 고루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우리는 거리에서 다방에서 또는 신문지상에서 이미 갈 데까지 다 가버린 막다른 인생을 만날 적마다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긁어모으느라고 지금쯤 빨갛게 돈독이 올라 있을 재벌들의 눈을 후벼파는 말들로써 저들의 딱한 사정을 상쇄해버리려 했다. 저들의 어려움을 마음으로 외면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배운 우리들의 의무이자 과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임을 나는 솔직히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분노란 대개 신문이나 방송에서 발단된 것이며 다방이나 술집 탁자 위에서 들먹이다 끝내는 정도였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찰스 램과 찰스 디킨즈 사이에서 고민하는, 램의 가슴을 배반하는 디킨즈의 완강한 머리’를 가졌노라고 고백하는 오선생에서 제 모습을 봅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니 나는 여전히 오선생처럼 밤새 램의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잠을 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구두를 버리지도 지키지도 못하면서 남이 가진 열 켤레의 구두를 멋대로 아홉 켤레로 둔갑시키는 우리 모습을 윤흥길은 너무도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 가슴 한편이 아립니다. 나에게 있는 한 켤레의 구두라도 버릴 수 있는 내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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