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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誤讀이다.

한동우 | 2008.10.02 17:31 | 조회 998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대화를 했다고 생각하면 그건 착각이다. 그러니, 이 두 멍청이들이 나눈 '대화'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건 착각 중의 착각이고, 심지어 이 두 인간이 통하지 않는 대화를 하면서도 함께 길을 가려고 하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말의 인간미를 느낀다면 그것은 착각 중의 착각 중의 착각인 것이다. '대화'란 그런 것이다. 인생이 그런 것이듯이. 사뮤엘 베케트는 인간들 사이의 대화가 실제로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대화의 무의미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대화를 통해 확인하는 것일진대, 대화가 무의미하다면 인간 존재는 또 무엇이며, 존재에 대한 인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대화의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나의 말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으며, 상대방의 말은 나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상대방은 없는 것이며, 마치 거울 앞에서 허무하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야말로 語不成說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책이라면, 자연도 책이고, 인간도 책이다. 자연을 읽고 인간을 읽는 것, 이것은 책이 실제로 어떻게 씌여 있는가 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 책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그저 읽을 뿐이다. 誤讀이다.
키에르케고르까지 인용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한 것이며, 그래서 신과 홀로 마주 앉아야만 한다. 자신의 존재를 준엄하게 응시해야 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오히려 침묵해야 한다. 고도를 기다리든, 신을 기다리든, 아니면 이미 내 곁에 와 있는 그들을 깨닫든 그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그래서 올 수도 없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현대의 인간존재로 묘사했던 사뮤엘 베케트는 인간존재의 부조리(absurdity)를 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사뮤엘 베케트는 오히려 고도가 있느냐 없느냐, 그가 올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단지 태양빛 때문에 멀쩡한 아랍인을 쏘아 죽였다고 말하듯이. 누군가 신이 없다고 하면 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이 없다고 하는 말은 실제로 신이 있거나 없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없는 신을 있다고 한들 신이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양이라는 말은 고양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고양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고양이도 없다. 그러나 고양이는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사르트르에 의하면 부조리는 존재 자체의 부조리이기도 하고, 존재에 대한 인식의 부조리이기도 하다. 죽음에 의해서 확인되는 존재, 이것만큼 부조리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세상은 온통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인식으로부터 존재한다는 근대 서양철학의 커다란 물줄기로부터 발생하는, 존재 이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논리적 모순 또한 부조리하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생애가 반복됨으로써 만들어진다. 이 또한 부조리하다.
부조리한 인간은 생의 에너지를 가져야만 한다. 뫼르소는 권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인 댓가로 감옥에 갇혔지만, 그는 그것도 감옥 밖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인생이면 그렇게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단지 끊을 수 없을 만큼 오래 피운 담배를 더 이상 피우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것도 이내 해결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담배를 피울 수는 없는 것이었기에. 하루하루가 하늘이 주는 찬란한 선물처럼 다가온다는 소로의 말처럼, 매 순간을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실존의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이 에너지가 없을 때, 없다고 느껴질 때,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길, 죽음을 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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