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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한동우 | 2008.09.14 23:47 | 조회 1122
태초에 질서가 있었다

나는 십여년전에 한동안 움베르토 에코의 덫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헤맸었다. 그가 가진 방대한 지식의 양에 압도되기도 했거니와, 세상을 향한 온통 삐딱한 시선, 게다가 유머와 독설을 겸비한 그의 글쓰기가 오히려 싫을 정도로 좋았다. 도올이나 김훈은 에코의 亞流, 혹은 亞亞流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이 에코와 비교해 달라고 한 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작자 앞에서 옴짝달싹못하는, 일종의 구속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저 굉장히 놀랐다거나, 아니면 압도당했다거나 하는 정도의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건 그가 언어의 속박을 벗어나 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었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에 당시 유럽과 아시아의 이곳 저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방언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언어의 속박을 벗어난 것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예수님은 그의 첫 번째 기적으로, 물론 그는 그의 어머니에게 때가 되지 않았다고 난감해하긴 했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는데, 나는 그것 역시 일종의 속박을 벗어나는 유쾌한 퍼포먼스였다고 믿는다 (목사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시길!). 그 스스로 이탈리아인이면서 라틴어와 독일어, 영어와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스페니시와 포르투기즈를 유창하게 하며, 북유럽과 동유럽의 지역언어, 러시아어까지 막힘없이 한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느낌을 갖게하는 선행학습요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글은 언제나 언어의 속박을 벗어나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 이건 그의 글을 주로 번역한 이윤기의 요사스러움에 기만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장미의 이름에서, 아예 시작부터 그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진정한 화자가 누구인지, 누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정신을 바짝 차려도 도무지 정확한 출입구를 찾기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그의 영화에서 교묘하게 등장하면서 시나리오 작가로서, 감독으로서, 배우로서,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알프레드 히치콕처럼 에코는 작가로서, 서문의 저자로서, 그리고 작중 화자인 아드소로서, 아드소가 인용하는 그의 스승 윌리엄으로서, 윌리엄이 인용하는 로저 베이컨과 아리스토틀로서, 그리고 엉터리 라틴어쟁이 살바토레로서, 그리고 적그리스도를 오히려 기다리며 그와의 대면을 기다려오던 호르헤로서 (아, 호르헤 보르헤스는 또 누군가. 아르헨티나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던가. 그야말로 인간이 사용하는 것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책이며,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독자들을 현혹하고 독자들을 놀리며, 혹은 그 스스로 독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복잡한 구도는 정말로! 치밀한 계획속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소설로 구현되었다. 이건 마치 수도원의 장서관같은 미로이다. 미로는 길이 없는 곳이 아니라 길이 복잡하게 설계된 곳이다. 그래서 미로를 설계한 사람, 혹은 미로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미로는 더 이상 미로가 아니다. 그러나 미로 속에 있는 사람에게 미로는 길이 없는(것 처럼 보이는) 곳이고, 긿을 잃는 곳이고, 심지어 나가는 길은 고사하고 들어왔던 길 조차 찾기 힘들어 보이는 곳이다.

“장서관은 거대한 미궁이며, 세계라고 하는 미궁의 기호”

“장서관이란 수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있는 막강한 권력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

"보편적 법칙과 기정 질서라는 개념의 존재는 하느님이 이러한 개념의 포로라는 사실을 포함"


태초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고 계셨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첫마디는 “Let there be light." 그리고 나서 “보기에 좋았더라”한다. 모세가 썼다는 이 창세기의 첫장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한다 (모세는 그 바쁜 중에 언제 창세기를 쓸 수 있단 말인가. 그 또한 정신나간 자다). 하나님은 온세상을 언어(logos)로 창조했지만, 사람만큼은 흙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코에 숨을 불어 넣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무엇을 허락했는가. 바로 이름짓기(naming)다. 아담이 이름을 지으면 그것이 곧 존재가 되었다.

존재의 근본으로서의 언어, 만물을 표상하는 기호로서의 언어, 언어로 형성된 담론과 그것의 물리적 표현으로서의 서책, 그 서책을 담아두는 서가와 장서관, 이 모든 것은 발생학적으로 진화과정을 반복한다. 마이크로스코픽한 존재로서의 언어와 이름은 매크로스코픽한 존재로서의 세계와 그것을 표상하는 장서관과 정확히 닮아 있다. 자! 언어와 서책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존재가 있는가.

세속의 군주인 황제와 신성의 군주인 교황은 성직자들을 앞세워 이단논쟁을 일으키고 이를 통해 마녀사냥과 광장에서의 공개 화형식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성직자와 권력자의 기호, 상징 폭력에 갇혀있던 중세의 언어는 이른바 비밀의 서책,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다, 아리스토틀의 시학 2권을 통해 해방되는 것이다. 지식추구라면 사족을 못쓰던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단 한번만이라도 이 서책을 완독해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호르헤는 이러한 수도사들의 열정을 통제하는 것으로서 중세의 엄격주의 교리를 수호하고자 한다. 수도사들은 독살되거나 맞아 죽고, 혹은 자살하거나 타죽는다. 장서관은 서책과 함께 스스로 번제단이 되어, 화형주가 되어 지옥같은 불길에 사로잡히는데, 이는 마치 그들 스스로 발목잡혀있던 묵시록의 말세와 개체발생을 반복한다.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을 두려워 한 것은, 이 책이 능히 모든 진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망령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줄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호르헤게는 처음부터 구상이 있었다. 그러나 이 구상이 그에게 과분했기에, 결국에는 일련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인과관계, 다시 서로 모순되는 인과관계, 계획과는 전혀 무관한 관계가 창출됐다...나는 가상의 질서만 좇으며 죽자고 그것만 고집했다.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나...이것이 어리석은 것이다."

수십년이 지난 후 아드소는 불타 없어진 장서관 터를 찾는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니다. 타다 남은 양피지 조각과 서책들이 흙속에 아무렇게나 굴러 다닌다. 아드소는 그것들을 모아 다시 장서관을 만든다. 장서관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무엇이 남았는가. 사실 남은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있었던 것은 지금 남아있는 바로 그것 뿐이다. 이름.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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