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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의 진정한 의미를 찿아

하늘기차 | 2017.03.07 16:00 | 조회 743


                종교개혁 500주년의 진정한 의미를 찿아

                                                                                                                                                         박종화 목사

    역사적 사건마다 시대적 배경이 있고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메아리가 큰 사건일수록 배경의 폭은 넓고 교훈은 더욱 풍성하다. 종교개혁이 바로 그러하다. 종교개혁 당시에 기독교는 크게 이분화되어 있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313) 나아가 국교로 삼은(380) 이후 종교개혁으로 중세의 막이 내려지기까지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를 넘어 로마 제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세계의 지배체제로 군림했다. 다만 로마 제국의 기독교가 동서로 분열된(1054) 이후로 동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본래 지명은 비잔티움, 현재는 터키의 이스탄불)을 본거지로 오늘날까지 정교회’(Orthodox Church)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정교회는 동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비잔틴 문명권에서 이슬람과 경쟁하며 생존하다가, 터키의 이슬람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정복당한(1453) 이후 환난과 핍박을 겪어야 했다. 정교회의 상징인 성 소피아 성당’(이스탄불 소재)이 몰수되어 이슬람의 박물관으로 변형된 모습과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이 지금도 서로마 천주교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다. 20세기 초부터 정교회는 동유럽 지역이 공산화되면서 또 다른 수난의 역사를 겪다가, 이제는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 사실 정교회는 서구 중심의 종교개혁과 역사적·시대사적 연관성이 없다.

    종교개혁이 개혁하고자 한 종교는 서로마 중심의 로마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였다. 이는 서구의 라틴 문명권을 주도하며, 기독교 우위의 제국 지배체제를 형성했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통일과 함께 국교로 군림하면서 과거의 탄압받던 종교집단에서 지배자의 종교로 코페르니쿠스적 체제 변모를 누리기도 했다.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속 지배체제의 분열은 자동적으로 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그 반대로 교회의 분열은 곧 그와 공생하는 지배체제의 분열로 귀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열된 동로마 제국은 7세기 이슬람의 등장과 함께 온갖 간난고초를 당하며 힘겨운 자기방어에 나섰지만 그 세력을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는 곧 동로마의 국교인 정교회의 비극적 운명을 수반하고 말았다.

    이와는 반대로 서로마 제국은 승승장구했고, 서로마 교회 역시 교황 우위의 정교일치 지배구조를 강화시켜 나갔다. 특히 중동지역의 이슬람에 의해 빼앗긴 실지를 회복한다는 명목하에 6차에 걸쳐 진행된 십자군 전쟁’(1096-1229년에 걸쳐 띄엄띄엄 65차례나 진행됨)의 실제적 실패가 몰고온 역풍은 고스란히 서로마 제국과 그의 상위 지배체제인 로마가톨릭이 져야만 했다. 동로마 제국은 실제로는 실패한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콘스탄티노플이 점령(1261)당한 이후부터 힘을 잃었고, 공식으로는 이슬람 제국의 정착(1454)과 함께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교회는 이슬람 제국의 지배하에서 수난의 교회 역사를 써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서방교회 영역에서 전개된 종교개혁과 동방교회인 정교회가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역사적 관련을 맺을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교회의 분열을 넘어 교회다움의 회복을

   세계 기독교의 첫 분열을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의 상호 저주와 파문 선언을 통한 서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로마 정교회의 분열(1054)이라 한다면, 두 번째의 분열은 서로마 교회 안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인한 분열이다. 아직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의 서로마 제국 위에 군림하던 로마가톨릭과 새로 등장한 개신교의 분열이 바로 제2의 교회 분열인 것이다. 종교개혁운동으로 세계 각 곳에서 이미 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분열된 것은 사실이지만, 쌍방이 합의하여 상호 인정을 담보로 분열이 공식화된 것은 종교개혁의 본산지인 독일의 황제 카를 5세가 소집한 제국의회에서 결의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협정”(Augsburger Religionsfriede, 1555925)이라 할 수 있다.

    주요 내용은 자치지역의 선제후에게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택권을 부여”(cuius regio, eius religio)하고, 지역의 주민은 이 결정에 따르되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자유의사로 재산과 가족을 동반하여 원하는 교회의 자치지역으로 이사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개신교는 루터파 개신교’(Lutheran)만을 의미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이후에도 분열이 순조롭게 정리되지 않아 쌍방 간의 ‘30년 종교전쟁’(1618-1648)을 거친 후에, 제국의회가 다시 소집돼 베스트팔렌 평화조약”(Westfaelischer Friede, 16481024)을 선포하고 개혁파 개신교’(Reformed)에도 동일한 선택권을 부여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할 것이 있다. 개신교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고 또 자유로 교파교회를 세우게 되었지만, 유럽의 경우, 특히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제국들의 경우에는 지역 단위별 또는 국가별 단일 개신교를 세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선제후의 결정에 따른 자치지역 단위의 단일 개신교가 등장했고, 이 전통이 국교(state church)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국민교회’(Volkskirche)라는 형태로, 곧 국교에 준하는 위상으로 교회의 자율과 자치권을 보장하는 체제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역지방자치체인 주(Land)마다 독립된 단일 주 교회’(Landeskirche)가 있고, 독일연방(Bund) 차원에서는 주 교회의 전국적 연합체인 독일개신교연합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가 있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국왕의 결정에 따라 교회의 자율자치권을 보장하는 국교(루터교)의 형태로 그 체제를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체제상 특징은 철저한 감독제를 다양한 모습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주교제와 비견되는 형태인 셈이다. 이것은 분명히 같은 개신교에 속하면서도 한국교회처럼 국교도, 국민교회도 아닌 자유분방한 자유교회’(free church)의 형태를 띠고 있는 세계 곳곳의 개신교 전통과 크게 차이가 난다. 이것이 개신교의 특징이요 장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자유교회는 대개 교파 전통에 따라 교파교회를 세우고, 나아가 한 교파의 전통 안에서마저 내적 분파와 분열을 즐기기도 하며, 이를 스스로 정당화하면서 교회일치를 남의 일인 양 취급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교회의 화두는 단연 교회일치의 문제이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개신교 안의 교파 분열은 그 신학적 정당성이나 객관적 타당성이라는 면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며, 오히려 비신학적인 요인, 곧 집단이기주의적 이해타산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을 정도로 조속한 극복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분열은 악이고, 모든 일치는 선이라 단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신학적으로 또는 비신학적으로 보아 정당한 분열은 오히려 아름다운 다양성으로 하나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일로 칭송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의 제국주의적 이해에 따라 조선 기독교를 일본 제국교회인 그리스도교단으로 강제 합병시킨 소위 조선교회 단일화와 같은 일치는 오히려 몸을 병들게 만드는 일이며 수술의 대상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그 뜻을 계승하고 계속하여 펼치려고 한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 만든 일치와 분열은 무엇인가.

    흔히 분열과 일치 문제를 논할 때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두게 된다. ‘신앙’(faith)직제’(order)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명확히 구분되기도 하지만 서로 섞여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반 정치사회의 경우 민주주의 원칙을 신앙의 축이라고 한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통령 중심제 혹은 내각책임제 등을 직제의 영역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예컨대 루터가 불길을 당긴 ‘95개조 테제나 종교개혁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sola)의 신학, 곧 믿음만(Sola Fide), 은혜만(Sola Gratia),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 성서만(Sola Scriptura)은 분명히 신앙측면에서의 저항이요 개혁 대안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자.”라는 외침이었다. 동시에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권체제를 거부하고 개신교라는 별도의 교파를 만든 것은 직제의 측면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처음에는 순수한 교회개혁, 곧 신앙개혁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 운동이 조직화되고 현실화되어 개신교로 등장하게 된 과정은 왕이나 제후의 정치적 결단으로 이루어진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어야 교회일치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나 한국의 소위 자유교회형태의 교파 분열과 일치 문제는 그 성격과 틀이 다르다. 장로교만 하더라도 기본 신조나 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의 문제에 관한 한 분열의 정당성이 모자란다. 설령 신조나 교리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런 차이가 교단 분열의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직제의 관점에서도 종교개혁 시대처럼 결별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만 분파적 분열 이후의 고착된 기득권이라는 이름의 집단이기주의가 일치를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교파 간 또는 교파 내부의 단일교파나 단일교단 형성이라는 온전한 일치가 아닌 느슨한 형태의 교회연합체, 예컨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한교협), ‘한국기독교총연맹’(한기총), ‘한국교회연합’(한교연) 등등의 기구마저 하나가 되지 못한 형편에서 종교개혁 전통 고수 운운하는 것은 듣기마저 역겹다.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가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바로 우리 세속 사회가 개신교를 향해 개혁을 요구하며 개신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하여, 제발 믿음만, 은혜만, 그리스도만, 성서만!”이라고 쓴 푯대를 각 교회 십자가 종탑 아래 못질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

지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교회체제는 물론 그와 연관된 세속 지배체제의 개혁까지 포함한다. 교회에 대한 비판과 도전은 지배체제로 공생하던 당대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 비판을 포괄한다. 도전과 비판은 역사적 상황의 변화와 인간의 사고와 의식의 변화에서 왔다. 중요한 몇 가지 역사의 흐름을 보자. 예컨대 천동설을 신봉하고 강요하던 교회의 과학관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로 무너졌다. 과학은 교리에서 해방되었고, 교회는 자신의 비과학적 과학관을 개혁해야 했다. 스페인과 터키를 세계지도의 양 끝이라 여겼으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필두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종래의 지구관이며 우주관도 개혁해야 했다. 건축술과 미술이 융성하면서 예술적 표현을 교리적으로 규제하던 틀을 넘어 인간의 창의성과 예술성이 기지개를 크게 펴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발흥이었다.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비전이 꿈틀거렸고, 기존의 옛 하늘, 옛 땅에 대한 비판과 개혁 욕구가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기리는 휴머니즘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동시에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원전으로 돌아가 사상 본래의 모습을 밝혀보자는 인문주의적 각성이 중세 지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고전 문헌들이 속속들이 손에 들어왔다. 고전어를 습득하여 원전을 밝히는 행복한 작업이 유행하였다. 사상의 자유가 날개를 크게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교리와 신학에서도 커다란 폭풍을 몰고왔다. 당시 인문주의 사조를 수용한 선두주자 중 하나였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 교회 정문에 그 대학의 교수였던 루터가 교회의 개혁요구 95개조를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 것도 이해가 간다. 특히 교회가 세워놓은 종교의례, 성상·성물 숭배, 교리 등 소위 거룩한 전통의 틀에 맞게 진리를 추구하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규격화된 상황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그 대신에 그 모든 것의 원천인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각자 열린 가슴으로 성서를 직접 읽고 느끼고 수용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강인한 욕구가 용솟음쳤다. 라틴어로만 번역되어 있어서 보통 사람들이 읽을 수조차 없던 성서가 유럽의 곳곳에 각 나라 말로-루터의 경우 독일어로-번역되어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인문주의 계몽운동이 닫힌 교권주의 전통에 도전하면서 열린 지성을 자극하여 성서를 재발견하게 하고, ‘오직 성서로의 기치 아래 추진한 종교개혁이 교회와 신앙생활의 변혁을 이끌어내고 나아가 역사변혁으로까지 연결되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기독교세계를 떠받치면서 동시에 교황청과 힘을 공유하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스페인 왕국과 프랑크 왕국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가톨릭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지방분권적인 제후 중심의 게르만족은 중앙집권적인 왕정이 성립되지 않아 그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따라서 교황청이 비교적 손쉽게 그들 위에 군림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종교개혁의 구체적 촉발제가 된 면죄부 판매가 왜 하필 독일 게르만족 교회에서 횡행했고 또 반발이 있었는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성 베드로 성당 건립 자금 충당을 위한 면죄부 판매는 그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오류의 가장 타락한 모습이다.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으로의 기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심장을 울렸을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오직 믿음으로는 구원이 왕권이나 교권이나 거룩한 전통의 중재로 유무상통될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니기에 당연히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슬로건과 동전의 양면처럼 한통속이다.

    이런 교회 내적 자각과 함께 교회의 외적 요인도 개혁의 물결을 이끌었다. 독일의 일부 제후들은 불만 속에 자주독립을 원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루터를 정치적·경제적으로 후원하여 종교개혁이 성공에 이르게 되었음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일 작센 주 선제후의 목숨을 건 보호가 없었던들 루터는 개혁운동의 성공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적이기는 하지만 독일 개신교의 경우 지금까지 교파별이 아닌 지방자치 권역별로 단일 연합교회가 형성되고 있음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글을 마치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에 동참하는 것은 지나간 역사적 전통을 머리로만 되새기자는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 있어야 할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찾아 한국교회의 개혁을 맛보자는 것이다.

먼저 한국교회는 다시’, ‘새롭게성서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이 그렇게도 반대하던 교권주의와 유물주의가 마치 거룩한 전통처럼 군림하며 성서의 진리를 변방으로 쫓아내거나 특정 교리가 그 위치를 대신하게 하면서 성서의 위상을 오히려 율법서 정도로 위축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또 반대로 종교개혁이 말하는 오직 성서로를 통해 누구나 성서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아전인수격으로 제멋대로 말씀을 해석하여 이단 사상과 단체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 종교개혁 전통의 교회는 성서의 말씀을 공동체적인 영성, 덕성, 지성을 묶어 넓고 바르게 읽고 올바로 살게 하는 준거를 속히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연합운동의 한 핵심목표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 루터의 기치인 만인사제직을 새롭게 조명하고 실천해야 한다. 물론 루터가 당시에 이것을 교회 밖의 일상 영역으로까지 폭넓게 구체화시킬 겨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터의 본뜻은 교회 내에서 성직자와 평신도가 영역별로 평등하고 능동적으로 봉사해야 한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만인사제직의 한 본보기를 예배를 집전하는 신부가 홀로 찬트(chant)로 인도하던 찬송을,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어우러진 찬양대가 단음이 아닌 다음으로 부르는 것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직업을 소명’(Vocation)이라고 강조하면서 삶 속의 신앙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매일의 직장과 가정과 사회에서 사제처럼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교인 숫자나 재원이나 물량이나 사회적·정치적 출세가 아니라, 삶 속에서의 사제직으로 말하고 선교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원을 위해 성육하셨듯이, 우리 교회는 그분의 몸인 이상 그분과 함께 세상 구원을 위하여 삶 속으로성육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내야 한다. 십자가의 을 보게 해야 한다. 세상이 타락하고 썩지 않도록 십자가의 소금을 뿌리고 세상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고 부활의 을 좌절과 절망에 찌든 이 땅에 희망의 등불로 밝혀주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칼뱅의 말대로 우리 개신교는 이미 개혁된 교회’(ecclesia reformata)이지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스스로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로 살아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함께 기념하자. 동시에 종교개혁의 정신이 지금, 여기에서살아 움직이게 함께 나서자.

 

박종화 | 독일 튀빙엔대학교(Eberhard-Karls-Universität Tübingen)에서 박사학위(Dr. Theol.)를 받았다. 한신대학교 교수,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임마누엘 신학대학원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경동교회 원로목사이다.

                                                                                  <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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