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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타락 부추기는 저급한 구원론(1)

하늘기차 | 2015.08.08 09:49 | 조회 727



                개신교 타락 부추기는 저급한 구원론(1)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목사

 

   '구원론'은 메가처치 신학 중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이다. 사실 구원론은 가장 강력한 추진력을 갖는 신학이다. 신앙생활이든 종교 생활이든,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추진력은 바로 ‘구원에 대한 관심’일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구원론을 다룰 때는 대단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신학과는 다르게 대단히 민감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이 그토록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개혁가들이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 문제가 있을 경우 기독교의 계시와 예수를 따르는 삶은 심각하게 왜곡될 수 있으므로 부득이 구원에 관한 교리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구원의 삼중적 의미

   성서는 하나님을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칭송하고 있다. 하나는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창세기에 나오고, 구원의 하나님은 출애굽기에 잘 나온다.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는 구약과 신약을 망라하는 전체 구원 이야기의 원형(archetype)이다. 때문에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는 신약의 구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따라서 구원론을 논할 때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던 히브리 민족을 야훼께서 당신의 종, 모세를 보내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드라마를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의 이 구원 이야기 속에 세 가지 차원의 구원이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애굽을 탈출하는 구원이요, 둘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구원이요, 셋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구원이다. 첫째 구원을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둘째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이라고 할 것이고, 셋째 구원은 '안식에 들어가는 구원'이라고 할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좀 더 넓게 말하면 모세오경 전체에서 이 세 가지 차원의 구원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하나로 얽혀 웅장한 구원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구원의 각각의 차원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차원은 구분된다. 구분될 뿐만 아니라 서로 비교되기도 하다. 서로 비교된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구원의 삼중적 차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은 무엇일까?

노예 생활로부터의 구원…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차원을 비교해보자. 첫 번째 차원은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의 구원이고, 두 번째 차원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이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모세가 바로를 맨 처음 찾아가 히브리 민족을 내놓으라고 할 때 그가 한 말을 들어보자.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하셨습니다.”(출 5:1) 다시 모세는 바로에게 이렇게 청원한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출5:3)

   모세에 따르면 히브리 민족이 애굽을 나가야 하는 이유는 광야에서 야훼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다. 후자가 전자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야훼께서는 히브리 민족을 단지 곤경으로부터 건져 주실 목적으로 출애굽하신 것이 아니라 야훼의 신민(臣民)을 세우실 목적으로, 그러니까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을 위해서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니 광야의 고난이 이해될 리 만무하다. 출(出)애굽은 입(入)광야다. 애굽의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임과 동시에 광야의 곤경으로의 진입이다. 그러니까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니라 ‘고생 끝, 새로운 고생 시작!’인 셈이다.

   새로운 고생은 이전 고생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어쩌면 훨씬 더 가혹하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다”(출 16:3)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출애굽의 구원 사건은 단순히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출애굽의 목적은 시내산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

   그렇다면 구원의 두 번째 차원과 세 번째 차원을 비교해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과 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혹시 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시내산 계약을 맺으신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전자가 후자의 목적은 아닐까? 아니다! 안식으로 들어가는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된 구원의 목적이 아니라 부산물(by-product)일 따름이다.

   출애굽기 32~33장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세 번째 차원이 두 번째 차원의 목적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복락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택하신 줄로 안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안식을 얻는 구원을 출애굽 사건의 주목적으로 여겼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복락의 땅으로 인도해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시내산 계약을 체결했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셈이다. 하나님의 본 의도는 시내산 계약을 맺고 언약에 충실하면 안식을 허락해주신다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본심이 드러난 것은 모세의 실종 때였다. 시내산 계약을 중개한 뒤 모세는 시내산으로 올라간 뒤 도무지 함흥차사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출 32:1) 이들의 말 속에서 하나님은 '인도할 신'으로 전락한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주목적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에 불과했다. 지금 그들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가이드였다. 아론은 그들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의 가이드(guide)를 금송아지 형상로 근사하게 만들어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금송아지의 이름이 ‘야훼’였다는 사실이다.(출 32:4~5)

 

'가이드를 원한다면 가이드를 보내주마'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낸다. 야훼가 순식간에 송아지의 탈을 쓴 웨이터, 벨보이, 혹은 여행 가이드로 전락한 셈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쓸어버리고자 한다. 불같은 진노에 휩싸인 하나님을 진정시킨 이는 다름 아닌 모세였다. 모세 덕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멸을 겨우 면했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분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제안하신다. “내가 한 천사를 보낼 터이니, 그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너희는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출 33:2-3) '가이드를 원한다면 가이드를 보내주마' 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의 두 차원이 날카롭게 비교되고 있다. 복락의 땅에 들어가는 구원의 세 번째 차원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시는 구원의 두 번째 차원 말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이 없다면 유토피아는 무의미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는다. “백성은 이렇듯 참담한 말씀을 듣고 통곡하였다”(출 33:4) 옳다. 통곡할 일이다.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천국이라는 유토피아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주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천국 가는 것이 신앙의 주목적이 되는 순간 예수는 천국행 가이드로 전락하고 만다. 황금 길이 깔리고 수정 같은 맑은 물이 흐르는 새 예루살렘성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예수가 안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는다면 어찌 그곳이 천국일 수 있으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을 선물 받다

   구원의 중심 차원이 두 번째 차원이라고 한다면, 이 구원의 두 번째 차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앞서 말한 대로 두 번째 구원의 차원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19장부터 나오는 시내산 계약 체결 사건에 잘 나타나 있다. 시내산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은 계약을 통해 특별한 관계로 묶이게 된다. 이스라엘은 세상의 허다한 민족 중에서 유일하게 야훼의 백성으로 선발된다. 그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이었다. 최소한 집단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계약 체결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물’이 되며,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었다.(출 19:5-6) 그리고 야훼는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에 이제 야훼는 더 이상 하늘에 계시거나 흑암 중에 계시거나 저 멀리 산 위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 ‘한 복판’에 계신다. 들락날락거리시지도 않는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로 이사 들어오신다. 손님으로 잠깐 방문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들어와 사신다.

   그러자니 하나님의 집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내산 계약 체결 직후 성막을 만들라는 주문이 모세에게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성막·성전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지어진 야훼의 아파트로서,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 거주하신다는 극적인 표지다. 바로 이것이 구원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 이것이 구원의 진수다! 다른 말로 구원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얻었다는 것에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선물로 받았다. 두 번째 구원의 차원에서 구원의 중심 내용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다.

노비 출신의 여인, 이스라엘이 야훼의 신부가 되다.

   이 사건 이후로 야훼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마누라’로 여기신다. 그러니까 시내산 언약은 실상 혼인 언약이었던 셈이다. 신부는 얼마 전까지 강대국 애굽에 짓눌려 종살이 하는 비천한 민족, 히브리인들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막일을 전전하던 불학무식하고, 비열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던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존재, 하비루! 그런 그녀가 시집을 갔는데, 그녀의 신랑은 누군가? 만군의 야훼 하나님이시다! 신데렐라 이야기나 영화 <프리티 우먼>, 드라마 <파리의 연인>, 그 어느 것도 이것만큼 극적이지 못하다.

창녀 출신 테오도라가 순식간에 비잔틴 제국의 황후가 된 것처럼, 길거리 여인 에바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국모이자 성녀가 된 것처럼, 노비 출신의 여인, 이스라엘이 야훼의 신부가 되다. 이 극적인 드라마가 바로 토라의 구원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구원의 차원에서 볼 때 구원이란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의미한다.

 

추악한 옛 생활로부터의 구원

   한 가지 더 있다. 창녀가 황후가 된 것만으로 온전하지 않다. 창녀는 이제 진짜 황후가 되어야 한다. 출신이 창녀였을지라도 황후가 된 뒤에도 밤마다 궁을 빠져 나가 윤락가를 전전하며 쾌락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 이제 그녀는 옛 창녀 생활은 버리고, 황후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시내산 계약에 이 ‘새로운 삶’을 요구하는 율법, 곧 십계명과 토라가 함께 주어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출 19:5) 이것은 다른 말로, “짐의 황후다운 품위를 지키시오”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두 번째 구원의 차원에서 볼 때 결국 구원이란 추악한 '옛 생활로부터의 구원'인 셈이다.

   테오도라가 위대한 황후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의 지혜와 용기로써 남편을 보좌하여 비잔틴 제국 1000년의 역사 중 최고 전성기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 이것이었다. 최하층 출신의 히브리 민족을 온전한 왕의 신민(臣民)으로, 하나님의 신민(神民)이자 성민(聖民)으로, 그리고 야훼의 황후(皇后)로 삼아 그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야훼의 구원은 완성된다. 따라서 본래 율법, 곧 토라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족쇄가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상이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의 대략이다.

   이러한 구원의 삼중적 차원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구원 사건은 하나다. 구원 이야기는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에서 시작하여, 야훼의 신민으로의 발탁을 거쳐, 약속의 땅의 진입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하나의 이야기(one narrative)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이야기의 절정은 야훼의 신민으로 발탁되는 것이다. 구원의 두 번째 차원, 곧 야훼의 신민으로의 발탁은 첫 번째 차원, 곧 곤경으로부터의 구원의 목적이다. 그리고 구원의 세 번째 차원, 곧 약속의 땅에 진입하는 것은 두 번째 차원, 곧 야훼의 신민으로의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야훼의 신민으로의 발탁과 신민으로서의 새로운 삶'이 결국 구약의 구원 이야기의 중심이다.

 

다시 읽는 신약의 구원 이야기, 예수의 출현

   출애굽기의 구원 이야기를 읽었던 방식으로 신약의 구원 이야기를 한 번 읽어보자. 출애굽기에 나타나 있는 구원의 삼중적 차원, 곧 곤경으로부터의 구원,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는 구원, 그리고 안식에 들어가는 구원은 신약의 구원 이야기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질병과 마귀, 그리고 죄로 인해 눌리고 찢기고 종살이하던 인간들을 해방시키셨다. 이것이 첫 번째 구원의 차원이다. 그리고 예수는 열 두 명의 제자를 새 이스라엘, 곧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하셨다. 이것이 두 번째 구원의 차원이다. 세 번째 구원의 차원은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을 주신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신약의 구원 이야기는 구약의 구원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커다란 변화, 혹은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라는 인물이 출현한 것이다. 구약의 구원 이야기의 중심에는 보이지 않는 야훼가 계셨다. 이 야훼는 보면 죽는 그런 분이셨다. 그러나 신약의 구원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람 예수가 자리하고 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사람, 예수 말이다.

   신약의 구원 이야기의 삼중적 차원은 예수라는 한 사람을 중심으로 얽혀 돌아가고 있다. 예수가 사람들을 곤경으로부터 구원한다. 예수가 제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택하신다. 그리고 예수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신다. 예수의 구원 이야기는 출애굽의 구원 이야기를 따르지만 혁명적으로 진전된 이야기다.이 모든 것이 옳다면 우리는 신약의 구원 이야기도 구약의 구원 이야기와 다를 바 없이 핵심은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는 것에 구원의 강조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질병·마귀·죄로부터의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부르시기 위한 방편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의 부르심은 질병·마귀·죄로부터의 구원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새 백성이 되어 그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은 영원한 안식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의 새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 이것은 두 번째 차원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의 구원 이야기의 세 차원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의 구원이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구원 이야기

   예수의 구원 이야기가 하나의 구원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중심은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의 발탁'이다. 옛적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시내산 계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새 계약'을 통해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발탁된다. 최후의 만찬석에서 예수가 ‘새 언약’(눅 22:20)과 ‘새 계명’(요 13:34)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는 옛 언약과 옛 계명, 곧 시내산 계약과 토라를 염두에 두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예수는 충격적이게도 조그만 다락방에서 고작 열 두 명의 제자들에게 시내산 계약과 토라를 갈아치울 만한 새 언약과 새 계명을 반포하신다. 그리하여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고, 새로운 계명을 준수하는 하나님의 새 백성, 곧 새 이스라엘을 창시하고 계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약의 구원 이야기의 중심이다.

시내산 계약을 맺은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이사 오셨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아파트가 세워졌으니 이름 하여 성막·성전이다. 그런데 새 언약은 옛 성막·성전을 폐기 처분한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한 인간의 몸을 통해 새 이스라엘 안에 들어오신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예수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예수의 몸이 성막·성전이 된다. 기독교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예수의 육체, 곧 살과 피를 나누어 먹은 것은 예수의 육체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큰 진전이 있다. 예수의 육체는 이제 그의 육체를 먹는 교회 자체가 된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다. 그리하여 교회 공동체 자체와 구성원들 자체가 하나님의 새 성전이 된다. 옛적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막·성전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제 교회와 성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하나님은 돌로 지은 집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모임 속에 들어와 충만히 임하신다. 이것이 새 구원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의 '혼인 언약''의 특성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시내산 계약의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누라’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누라’가 된다. 이를 신약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부른다. 그 옛날 지구상에서 가장 비루했던 천민, 하비루가 지존자의 황후가 된 것처럼, 역시 가장 비천하고, 불학무식하고, 가난하고, 작은 소자(小子)들이 그리스도의 황후가 된다. 놀라운 신분의 상승이 이루어진다. 신분 상승은 새 구원 이야기의 핵심 내용 중 하나다. 예수는 새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나의 친구이자 하나님의 친구다'고 선언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을 자신의 '친 아버지'인 양 여기셨는데, 이제 예수는 우리를 당신의 동생으로 맞아 주심으로 우리도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길을 여신다. 참으로 놀라운 신분 상승이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구원이다.

 

‘구원은 새로운 삶의 양식’

   옛 언약은 황후가 된 이스라엘에게 그에 걸맞은 품위와 존엄을 요구한다. 이것이 십계명과 토라다. 토라는 황후다운 삶의 스타일을 알려주는 왕실 규범이다. 토라는 이스라엘을 추악한 '옛 생활(old life)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방편이다. 이제 새 구원 이야기는 새 백성들의 '옛 생활로부터의 구원'으로 나아간다. 옛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새 이스라엘에게도 황후다운 삶을 살라는 새로운 왕실 규범이 주어진다. 이것은 갱신된 토라, 곧 '새 계명'이다.

   새 계명은 무지 간단하다.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사실 십계명과 토라, 율법과 선지자 전부가 이 한 계명 안에 다 들어있다. 이 새 계명은 새 이스라엘을 옛 생활에서 구원하여 새 생활로 인도한다.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하는 새로운 백성이 지구상에 출현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가 의도하셨던 구원 이야기의 대략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관건은 새로운 삶(new life)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기독교를 ‘새로운 삶의 체계’라고 했고, 자끄 엘룰은 기독교를 ‘새로운 삶의 양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새 언약을 맺은 새 백성의 새로운 삶은 구원의 세 가지 차원 중에서 가장 중심적 차원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새로운 삶의 양식이 없다면 구원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를 ‘행위 구원론’이라고 부를 것이지만 그러나 이런 용어는 성서를 오해케 한 신학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츰 논의하도록 하겠다.

천국 가는 방법론으로 전락한 구원론

   이상의 관점에서 볼 때 개신교 구원론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지 않은 개신교 구원론은 죽은 다음 ‘천국이라는 이름의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방법론(methodology)'의 성격이 짙다. 시중에 유행하는 천국 가는 방법론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이다.

죽은 다음 천국이라는 좋은 데가 있고, 지옥이라는 무서운 데가 있다. 우리는 천국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무엇인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생전에 예수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를 마음에 영접하면 된다. 예수를 영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영접 기도를 따라하는 것이다. 영접 기도를 따라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있다. 너무 쉽다 그렇다. 천국 들어가는 건 너무 쉽다. 그래서 은혜라고 부른다. 이게 전부인가? 전부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전부가 아니다. 뭔 소린가? 전부가 아니라면 또 구원에 필요한 다른 ‘방법’이 있는가? 있다. 뭔가? 교회 다니는 것이다. 교회를 다닌다 함은? 매주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내고, 성가대나 교사로 봉사하고, 목사님 잘 섬기는 것이다. 이상이 구원 받는 비결이다.

   이러한 통속적이고 저급한 구원론은 오늘날 개신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는 주범 중 하나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몇몇 목회자나 신도들의 윤리적 타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오해한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듯이 오늘날도 적지 않은 교회와 신도들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앞으로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위에서 말한 구원의 삼중적 차원을 가지고 보자면 그것은 구원의 가장 중요한 차원이 가장 많이 무시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개신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구원의 삼중적 차원을 각각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 영화(glorification)라는 틀로 이해하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이 세 차원 중에서 칭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성화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화 없이도 구원 받을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칭의는 없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화는 점진적으로 '장차'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칭의라는 것이다. 때문에 통속적 구원론은 칭의에서 영화로 건너뛴다. 이와 함께 새 언약을 맺은 새 백성의 새로운 삶(new life)에 대한 강조는 무시된다.

 

'칭의'에서 '영화'로 건너뛰는 구원론

   구원의 두 번째 차원, 곧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의 발탁과 그에 합당한 삶이 무시되자 성서의 구원 이야기는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었다. 칭의의 구원은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해주는 개신교식 '면죄부'로 화하고 있다. 교회는 ‘믿겠습니다’는 단 한 마디 립 서비스만으로 죄인들에게 천국을 무상 증여하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을 한 마디로 하면 과도한 티켓 남발로 말미암아 천국 티켓 인플레이션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는 것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빈의 ‘견인 교리’가 유치하고 저급하게 융통되는 통에 천국행 티켓은 ‘살인 면허’로 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인 면허증이 되어 버린 천국행 티켓은 과거의 모든 죄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몽땅 용서해준다고 경악할 만한 약속을 남발한다. 때문에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도무지 지옥에 갈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메가처치는 다소 세련되지기는 하지만 본질상 대동소이한 저급한 구원론을 대량으로 유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메가처치는 구원을 교회 출석과 맞바꾸고 있다. 적지 않은 메가처치는 예수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오해하여 교회 안에 가라지가 존재할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 놓는다. 많이 모이면 그 중 알곡도 많아지리라는 단순 논리를 적용하기 때문에, '많이 모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무조건적으로 교회 성장을 부추기고 있다.

   메가처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회로 물어오는 것 자체를 전도와 선교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가 신자의 지상 과제인 양 선전함으로 전체 교인들을 사람들 물어오는 호객꾼들로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 모든 호객 행위가 불신 영혼들에게 구원을 수여하는 자비로운 은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 백성의 새 생활이란 '예배'와 '전도'뿐이다. 조금이라도 삶을 강조하면 '행위 구원론' 혹은 '율법주의'라고 낙인 찍어버린다.

그러니 오늘날 개신교회는 구조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교인들 중에 허다한 이들이 온갖 범죄와 비리에 연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행여 누가 뭐라고 한 소리 하면 한다는 말이, “알곡인 줄 알았는데, 가라지였나봐”이다. 이건 완전히 ‘아니면 말고’식이다.

 

'새로운 삶'으로 접근 차단하는 왜곡된 구원론 

   여기 저기 교회의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고, 열매 없는 모습들이 노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들은 소수의 몇몇 사람들을 지목하여 희생양으로 매도하고 자신들은 도무지 바뀔 기미가 없다. 이러한 잘못과 오류의 밑바닥에는 바로 교회가 그릇된 구원론의 기초 위에 굳게 서 있기 때문이리라.

필자가 너무도 민감한 구원론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구원론 이야기를 하자니 솔직히 좀 떨린다. 이단 소리를 들을까봐. 하지만 이 그릇된 구원론이 교회의 타락과 부패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 조금 더 자세히 문제를 추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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