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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칼날을 다시 세우라!

하늘기차 | 2017.03.07 11:09 | 조회 727


             종교개혁의 칼날을 다시 세우라!

                                                                                                                        - 성서와 오늘의 위기가 촉발한 94개 논제

Radicalizing Reformation-Provoked by the Bible and Today’s Crises 94 Theses

너희는 온 땅에 해방을 선포하여라.”(25:10)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95개 논조를, 마음과 방향을 바꾸어 회개하라는 예수의 요구로 시작한다. “회개하여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500년이 지난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성서의 희년”(25)을 생각나게 하고,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회개와 방향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나 그에 뿌리를 둔 많은 해방운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의 실체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한 증언(고전 1:18)과 착취당한 피조세계의 신음소리(8:22)를 들을 때, 또한 초자본주의가 내몰고 있는 ()질서한 세상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의 절규소리를 적극적으로 듣고자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의 종교개혁의 축제를 해방의 희년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의(自己義)는 지배체제를 지지하면서 종교개혁을 통해 선포된 믿음의 의와 모순 속에 있다. 이 믿음의 의는 정의롭고 모두를 포괄하는 연대(連帶)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루터교 신학자들이 대부분이지만, 세계 도처에서 모인 개혁교회, 감리교회, 성공회, 메노나이트에 속한 신학자들로서, 오늘날 종교개혁 신학이 직면해 있는 현대적 도전과 성서적 근거를 다시 살펴보는 기획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돈과 탐욕, 시장과 개발착취의 전체주의적 독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파괴적인 현실과 비인간적인 삶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성서 말씀을 근본적으로 다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경제체제와 그 제국주의적 구조와 정책은 지구와 인류공동체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까지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교회와 회중 그리고 개별 그리스도인들은 왕왕 기존 현실에 연루되어 안주하게 되었고, 지금 전개되고 있는 현상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예언자적 비판정신을 상실하였다. 은총에 의한 하나님의 칭의(稱義論, God’s justification by grace)는 사회정의에서 멀어지고 짠맛을 잃은 소금’(5:13)으로 전락했다. 종교개혁의 유산이 이렇게 왜곡되었기 때문에, 오늘이 결정적인 변혁의 시대(카이로스의 때)가 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루터가 말하고 행한 것의 어떤 것들은 단호히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사상과 유산의 일부로 돌아가야만 한다.

    다음에서 천명하는 신학적 논제들은 개혁운동의 다른 전통과 이해뿐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적정치적 배경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는 철저한 연구를 통해 이 논제들을 발전시켰고, 이를 다섯 권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우리가 모든 점에서 합의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다양성과 다원성 때문에 여기서 논의된 논제들을 진지하게 토론할 것을 요구하며, 또한 모두에게 사고의 전환과 회개(메타노니아)를 요청하는 바이다. 위기가 모든 차원에서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는 지금은, 삶의 새로운 문화를 향한 희망으로 우리자신을 재정립하기 위해,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 안에 들어 있는 약탈적이고 파괴적인 특징들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5:1)

 1. 성서에 따르면, 해방은 하나님의 으뜸 되고 가장 중요한 구원 역사이다. 신약성서에서도 메시아적인 해방은 출애굽의 예를 따라 묘사되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로마제국의 치하에서 공포에 떨게 하는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신다고(5:12-8:2) 증언한다. 칭의론이 출애굽의 해방 전통에 따라 해석되지 않고, (아우구스티누스와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그랬던 것처럼) 개인의 죄의식과 그에 대한 용서로 축소된다면, 이것은 성서 배경의 다양하고 풍부한 사회정치적 함의(含意)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일이다.

2. 바울은 죄의 권세가 로마제국의 모든 사람을 포로로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하마르티아)에 대한 바울의 주요한 표현들의 공통점은 죄를 지배-통제의 관계로 이해하지, 좀처럼 개인적인 죄의식과 죄의 영역에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죄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고 공포에 떨게 하는 권세의 지배이다. 죄는 노예를 부리는 상전처럼 군림하고 지배하여 모든 사람을 제국주의의 체제와 법운용의 협력자로 만들어버린다.

3. 바울은 지배질서에 전면적인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드러난바,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인간 세상에 개입하시어 희망을 일구어가신다. 바울이 눈에 보이는 정치적 목표를 설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지배체제가 결국 변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에는 깊은 정치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그는 그리스도만을 주(퀴리오스)로 믿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해방이 모든 피조세계, 모든 사람,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리라고 믿는다.

4. 믿음은 신앙인들을, 자신의 신앙공동체와 다른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서 해방받은 백성으로 살아가게 한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삶의 출발이다. 로마제국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삶의 현실에서의 해방은 전통적이고 보편화된 죄로부터의 해방보다 더욱 시급한 과제이며, 금융과 폭력적인 시장경제의 지배를 받고 사는 오늘날의 모든 사람에게 더욱 큰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6:24)

 5. 맘몬()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최소한 20억의 사람들이 극단적인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맘몬의 현대식 표현인 자본의 지배야말로 신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다. 돈은 단순히 각국의 은행에서 발행하는 것이거나 우리 주머니에 있는 현금이 아니다. 상업 자본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대부업을 통해 고금리 부채로 사람들을 옥죄고 있다. 이미 16세기에 루터는 맘몬이 이 세상에 있는 가장 강력한 우상임을 선언하였다.(대요리문답서, 십계명의 첫 계명에 대한 설명에서)

6. 돈의 지배력은, 신학적인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화폐와 사유재산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의 확장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던바, 구약 예언자 시대의 화폐경제로부터 무역과 고리대금업에 기초한 루터 시대의 초기 자본주의를 거쳐 오늘날 산업과 금융자본주의의 형태로 점차 공고화되었다. 종교개혁 시대 이래 오늘날 세계화된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자행된 유럽 제국의 착취와 식민주의 그리고 대량학살에서 이러한 자본주의의 특징이 명백히 드러난다.

7.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25:23) 성서에 따르면, 재산은 그 가치를 통하여 모든 사람의 삶을 복되게 하는 데 존재이유가 있다. 반면 자본주의 경제는 사유재산을 절대적 가치로 삼고, 공공 목적의 토지나 자원을 최소화한다.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대토지의 개인 소유 현상과 토지 특허를 통해 인류 공동의 유산(토지, , 공기 등)이 사유화되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8. 고대나 현대나 할 것 없이,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자본(money)과 사유재산이 일상의 삶에 침투함으로 시작된다. 세계화가 진행된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주의의 삶을 산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중립적이고 관망하며 뭔가를 계산하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지배받거나 죄의 권세에 지배받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게 지배받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특별히 가장 작은 사람(5:31이하) 서로 긍휼히 여기거나 공의의 관계를 맺는다. 반면에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사람은 왜곡되고 자기중심적인 인생을 살며 결국은 모든 피조세계를 파괴하고 만다.

9. 자본주의 경제는 무한 성장에 집착함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산을 섬기고(아바드) 지키는 사명(2:15) 띠고 이 땅에 태어난다. 루터는 95개 논제를 회개하라는 예수의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우리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를 말씀하신 것은(4:17)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에 모아진다는 것을 말한다.”(95개 논제 1) 오늘날 이 말씀은, 돈의 파괴적인 지배력에서 개인 혹은 집단이 자유하게 되어야 함을 뜻한다.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의에 의지함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모든 피조세계와 더불어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연대로 부름을 받는다.

10. 성서에 의하면 사람은 서로를 섬김으로 많은 지체가 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이지만(고전 12), 발전된 자본주의의 논리와 실생활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 경쟁하며 살도록 되어 있다. 루터는, 인간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창조되었고 그것을 위해 생명을 유지하며 힘과 용기를 가진다고 한다. 이는 경제와 정치질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다.(노예의지론) 이런 점에서 루터는 왈도파, 위클리프, 그리고 얀 후스의 계승자이다.

11. 경제적 개인주의의 경향은 종교에서 구원의 개인주의화로 나타난다. 하지만 성서와 루터는 정의로운 관계 안에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말한다. 중세 이래 오늘날까지 교회 역사에는 정신화의 경향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성서 본문을 개인주의적으로 읽고 설교하는 것은 암암리에 혹은 드러내 놓고 오늘날 자본가들이 의존하는 왜곡된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12. 예수에 의하면, 채무변제의 규정을 강제하는 자가 아니라, 빚진 자의 입장을 생각해 빚을 탕감해주는 사람이 의로운 자이다.(6:12) 사도 바울은 죄의 권세(로마제국의 법령에 드러난 탐욕적 경제구조와 제국주의적 지배)가 법을 죽음의 도구로 전락시킨다고 말한다. 바울은 제국주의가 십자가에 못 박은 메시아의 정신으로 연대하고 하나가 되어 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대안공동체를 제안한다. 이는 로마제국에 의해 적대적인 관계로 살아온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또한 서로 화해하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13. 대부분의 교부(敎父)들은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속전(贖錢)이론(ransom theory)으로 해석해왔다. 결코 빚을 탕감해주지 않는 악마는 인류 해방을 위해서도 속전을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고 우리를 해방시키신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1033-1109)는 자신의 보상설(satisfaction theory)에서 이 주장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안셀무스에 의하면 채무상환의 법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공로의 보고(storehouse of merits, 寶庫)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루터가 거부했던 중세의 참회제도뿐만 아니라 채무상환을 절대적인 법으로 규정하는 자본주의의 근거가 되었다.

14. 루터는 성서의 가르침으로 돌아와, 하나님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며, 하나님의 용서에서 이웃과의 연대에 근거하는 신뢰가 커나간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필요로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이자 없이 빌려주거나 거저 줌으로 응답한다. 이것으로부터 유추되는 정부의 역할은, 공공의 복지가 위기에 처할 때는 시장에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는 시장을 절대화하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오직 자본의 축적을 통해 이윤이 기대될 때만으로 제한한다. 하지만 성서와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르면, 믿음의 공동체들은 이런 자본주의에 단호히 저항해야만 한다.

15. 성령강림 사건에서(2), 하나님의 영은 문화적언어적인 다양성을 긍정한다. 4세기부터 종교개혁 시대까지 성서는 오직 라틴어로만 읽혀왔다. 위클리프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성서를 각자의 말로 읽을 수 있도록 다양한 언어로 번역함으로 성령께서 긍정하시는 다양성을 거듭 드러내었다. 오늘날 시장이라는 동질적인 세력이 지배하는 세계는 다시 한 번 이 다양성을 위기로 몰아간다. 모든 개인은 소비자로 동질화된다. 농업은 농작물 산업으로, 신토불이의 생산 소비는 지구적인 차원의 소비 사슬로, 지역 산물은 표준화된 수출지향의 단일 상품으로 변질되고 있다.

16. 성서는 모든 구성원의 공동의 선을 위해 주어진 것을 나눔으로써 모두가 충족하는정치경제를 주장한다.(16) 개혁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에 따르면, 경제는 한 사회의 공동의 선과 이웃의 필요에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에,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판명된 사회주의라는 역사 발전 단계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경제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근거하여 발전하는 경제, 공공의 재화를 보호하는 경제,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경제체제이다.

17. 성서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 가치가 평등하다고 증언한다.(1:26-28) 율법서와 사사기에서는 피조물의 평등성이 공동체의 연대를 이끌어간다. 이 전통은 초대교회에서 실천되었다.(2, 4) 철저한 종교개혁의 목소리는 이 성서 본문에 반응하고, 정치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18. 오직 그리스도 한 분을 믿음으로, 은총에 의해 의로워진다는 루터의 칭의론은 중세 말 억압적인 경건 전통에 대한 정당한 해방의 선포이며, 오늘날 이자 수익 창출을 위해 돈을 빌려주는 경제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은총을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것,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 등은 영적인 자유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이 곁들여진 화해를 위한 해방을 의미한다.(그리스도인의 자유)

19. 루터에게는 오직 은총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이 평등의 사상을 나타내지만, 종교개혁은 이 평등사상을 사회경제적으로 구체화하는 데 실패했다. 사실상 후기 루터주의는 심지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계질서로 변질시키기까지 하였다. 시장과 국가의 자율성에 대한 주장에서 그 왜곡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와 루터의 가르침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20. 성서는 자기 공로(업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총에 의해 의로운 자로 인정받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20) 자기 공로와 업적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공로의 신화는 필요한 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필요의 원칙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이 원칙은 믿음의 의와 동일한 것이다. 믿음의 의에서 비롯되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결과들은 공로의 이데올로기와 그로부터 초래된 파괴적인 결과들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노동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21. 루터의 두 왕국론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국가에 대한 수동적인 복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잘못 사용되어 왔다.(13:1) 두 왕국론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의식화와 적극적 행동에 대한 요청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평화, 정의,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하여 이웃과 연대를 이루고 공동의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12:2) 루터는 일반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 시대의 은행과 무역업의 이윤창출 구조와 관행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외쳤다. “이런 업종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 회사를 지속하려면 정의와 정직성을 포기해야만 하고, 정의와 정직성을 세우려면 회사를 포기해야만 한다.”[독일어판 루터전집(WA) 15, 312] 오늘날 경제성장과 자본의 확장 그리고 사유화가 지구촌 전체에 재앙을 가져오고 있다. 사회체제를 일부 개선하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장기적인 대안 모색이 절실히 요구된다. 많은 경우, 공동선과 공적 책임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화폐경제와 대안적인 사유재산의 질서를 요청받고 있고, 또한 이 대안 모색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2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5:6) 이 새로운 질서는 어느 지역에서든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교회공동체는 각 지역으로 분산된 에너지 공급에 참여하거나, 다음과 같은 대의를 가지고 사회운동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에게 이런 일들을 맡겨두면 성과는 아주 작고 또 무한정 지체될 것이다. 우리 각자가 (연대 없이) 이 일을 하고자 해도 성과는 아주 작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일한다면 그 일을 제 때에 충분히 해낼 수 있다.”(마을변화운동)

    십자가의 말씀이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24. 중세 이래로 교회와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희생시킨 것으로 이해해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가한 가학적인 지배자이다. 하나님은 폭력을 통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 분이다.

25. 십자가는 반란자들과 탈출한 노예들을 다스리기 위한 로마제국의 형벌제도였다.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공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었다. 방독면을 쓰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그림이나 십자가형을 당하는 여성들과 농민(campesino)을 그린 작품들은 오늘날 지배 권력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자들의 죽음을 상기시킨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이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26. 성서 전통에 따르면, 의로운 자의 순교는 인류를 위한 죄의 용서를 가져오고(마카베오 417:21), 하나님의 죄 없는 신실한 종의 죽음은 사람들을 의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53:11이하)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새로운 의미이다.

27.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십자가에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24) 하나님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신다.(4:17)

28. 부활하신 예수는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신다(22:2, 15:34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22:26 “가난한 사람들도 축배를 들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29.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와 식민주의 시대 십자군전쟁 사이의 오욕으로 얼룩진 교회의 모습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민중(minjung)과 만인을 위한 경제정의와 생태적 생명망의 보존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드러난 생명신학(부활)을 위해 십자가의 신학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30. 예수의 부활은, 폭력적 권력에 대한 심판이며 모든 창조세계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연대를 가장 철저하게 나타낸 것이며, 인간과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정의의 표현이다.

31. 성서는 믿음을 회개로 이해한다. 루터는 이렇게 천명한다. “회개는 개인 내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회개란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95개 논제 3) 우리는 한편 종교개혁의 윤리적인 실패를 목도하면서 진리와 화해의 선포를 위해 부름받았다. 다른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정의를 실천해나감으로써 해방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받았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본회퍼)

32. 루터의 칭의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특별히 복음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간주하는 루터의 정당한 관점에서 그 의미를 확대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칭의에 관한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서구 사회의 탐욕적 개인주의와 정치적 침묵주의의 굴레로부터, 즉 인종적 특권, , 성별, 종족, 종교, 민족 그리고 계급 등과 같은 우리 삶의 근거를 이루는 모든 헛된 우상의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칭의론은 정치영역과 경제정의의 영역에서 그리고 타자를 긍정하고 수용하는 실천적 행위에서 우리의 공적 책임을 강화하면서 모든 이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깊은 연민의 표현방식으로 새롭게 선포되어야 한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 5:17)

 33. 기독교의 복음은 실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이다. ‘복음이 피조세계 전체의 화해를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복음이 아니다.(고후 5:18)

34.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인식은 현존하시는 은혜의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에 응답하신다는 깨달음이기도 하다.(8:18-23)

35. 16세기에 종교개혁자들이 물질적 실체를 예배하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신학적 정당성을 확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상파괴의 과정에서 물질적인 요소 전체를 제거하고, 성만찬에서 눈에 보이는 유형의 요소를 모두 거부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이로써 모든 생명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스며들어 있으며 따라서 온 피조세계는 성만찬의 실제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36. 믿음을 통해, 은총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깨달음은 또한 모든 피조물 안에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상이 교통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세상과 교통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모든 피조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때 이 세상을 긍정하는 우리의 믿음이 실현된다.

37. 어머니인 대지(Earth, )는 고통을 당하지만 부활을 경험한다.(8:22) 이것은 인간, 동물, 식물, 공기, 물과 땅으로 존재하는,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인간인 것은 소비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땅과 우리 생명을 돌보기 때문이다.

38. “모든 피조물을 위한 복음”(16:15, 루터의 번역), 즉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11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불의를 행하고 질서를 파괴한다면 그 빛을 잃게 된다.(1:18-20)

39. 복음은 의로운 개인이 자리를 지키고, 온 세상과 모든 사람의 안녕을 위한 새로운 경제, 사회 그리고 생태 정치를 통해,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동산으로 여기고 보존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40. ‘넘치는 생명(10:10) 경제발전이라는 과거의 환상을 부수고, 인간공동체가 당연히 지향해야 하는, 벗어날 수 없는 창조세계와의 관계에 주목한다. ‘넘치는 생명의 목적은 축적과 성장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계와의 조회와 균형을 지향하는 데 있다.

41. 모든 인간과 자연세계는 빵과 장미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필요로 한다. 인간과 자연세계는 빵과 아름다움에 대한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신학의 완성되지 않은 과제는 모든 창조세계의 넘치는 생명을 위해 투쟁하고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42. 대지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준다.(1:24) 자연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제자로 부름받은 우리는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잘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104)

43. ‘넘치는 생명은 소비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세계가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이나 인간이 일구는 산업이 창조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세상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마지막 행위는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예배드림으로써 우리에게 안식일의 휴식을 주신 것이다.(2:2)

44. 복음은 창조된 세상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보존하고 새롭게 할 것을 촉구한다.(2:15, 65:17, 벧후 3:13) 이것은 개개인이 소박한 삶을 살고, 문화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이웃들과 함께 협력하여 생명을 긍정하는 경제사회적 환경정책을 실현함으로 이루어진다.

45. 창조된 세상의 문제는 미래 세대의 삶과 매우 깊게 연관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것은 성인(成人)들이지 어린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과 어린이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은 그와 함께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것은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해당하고, 따라서 위기에 처한 어린이들의 미래를 바라보며 신학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이다.

46. 어린이들의 권리에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억압과 착취로부터 어린이가 보호받아야 하는 권리가 들어 있다. 그렇지만 성인들의 경우처럼 어린이들의 재능과 연약함, 독특한 개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신학에서도 어린이들이 대상화되면 안 되며 자신의 미래를 위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5:9)

 47. 폭력을 당해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라. 특별히 종교개혁의 후예들에게 희생당한 농부들, 재세례파(메노나이트), 유대인, 이슬람교도들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오늘날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주목하라. 가정 내 폭력, 경제적 착취, 인권유린, 창조된 세상에 가해지는 불의한 행위, 국가 제국주의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등의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48.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일을 위해 방향을 돌려야 한다.(2:2-4) 예수께서 보여주신 평화를 이루는 길은, 비폭력적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하나님의 비폭력적 실천에 참여하는 것이다. 비폭력적 실천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샬롬(평화)의 통치를 의미하는 표시이다.(11:6-9)

49. 평화를 이루는 일이 방해받는 곳이면 어디서나 폭력현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많은 희생자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곳에서는 사회정치적 차별, 경제적 억압 그리고 국가 폭력이 특별히 기승을 부린다.

50. 폭력은 여러 모양으로 이 세상에 퍼져 있다. 구조적인 폭력, 기술에 의한 폭력, 군사적 폭력, 또한 모든 종류의 물리적심리적인 폭력이 현실을 지배한다. 나와 다른 타인을 적대자요 희생양으로 삼는 현실 풍토 속에서 폭력의 보편성은 분명하게 드러난다.(7:54-60)

51. 폭력의 원인을 고찰하고 분석할 수는 있으나, 모든 폭력은 앞서 행해진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52.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합법화할 수 없다. 폭력은 언제나 불법이다. 목적에 부합하는 폭력은 없다. ‘정당한전쟁도,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도 없다. 루터, 츠빙글리, 칼뱅은 더 큰 폭력을 막기 위한, 매우 제한적인 폭력에 대해서만 여지를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지조차 오늘날의 대량살상무기가 난무하는 현실에서는 구시대적인 발상일 뿐이다. 폭력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1:19-20)

53. 폭력에 의존하여 법을 집행하는 것 또한 정당화될 수 없다. 인간이 폭력으로 고난받을 때, 평화를 이루는 일을 행함으로 그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국가권력이 폭력으로부터 시민을 구한다는 명분 하에서만 전쟁을 하거나 경찰력을 사용하였다. 철저히 제한적으로만 폭력을 사용하도록 한 규제가 그 이후에는 광범위하게 완화되었다. 하지만 철저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용인되는 폭력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 대한 경고의 표시이다.

54. 법제도는 폭력 곧 일종의 기본적인 폭력에 기초하여 성립된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조차 더 이상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고 오히려 정의로운 행동을(5:38-42) 요청한다. 법제도는 얼마나 정의로운 방식으로 평화를 이루어 내느냐에 따라 그 정당성이 판단되어야 한다.

55. 평화를 실현한다는 것은 폭력 없이 살아가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를 실현하는 일은 또한 평화를 증진한다는 뜻으로 정의를 행하고, 잘 들어주고, 용서하고, 나누고, 내 것을 주고, 치유하고, 자비를 베풀고, 남을 돕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폭력에 저항하는 행위이다.(5:3-11) 이것이 바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이며(12:1-2), 따라서 예배드리는 일은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56. 또한 평화를 이루는 일은 말의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다.(5:33-37) 복음은 근본에 있어서 비폭력적이며, 약속과 초대의 말씀이지 결코 강압적인 말씀이 아니다.

57. 평화를 이루는 일은 평화적 실천이 유일무이한 특징인 정치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의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일은 이 확신의 결과를 믿고 책임감 있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이 이 평화가 이 세상에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5:43-48)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6:2)

 58. 종교개혁은 루터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를 창조적이며 새 생명을 주는 능력으로 재발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루터는 칭의론에서 이 정의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오직 은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으로(오직 믿음으로) 해석한다.

59.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서’‘악마적인 세상 질서(1:4) 대립과 계급제도가 극복되는 미래지향적인 통찰이다. ‘우리는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별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서로 연결시키는 존재이다. ‘다른 사람의 적 혹은 경쟁자로 를 설정하는 국가와 종교, 성별과 계급의 차별적 세계 질서는 묵은 옷을 벗는 세례의식에서 제거된다. 상호인정과 연대를 통하여 한 몸을 이루는 새로운 실천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를(6:2, 15) 만들어낸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3:28) 하나님의 정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칭의 그리고 인간의 정의는 모두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60. (종교개혁자들이 틀을 만들고 그 후 개신교가 해석해온) 칭의론에서 가장 곤혹스러우며 비바울적인 측면은 율법에 대한 개념이다. 루터는 율법을 통한 의믿음을 통한 의를 자주 대립시키고, 이 대립을 유대교와 기독교의 화해 불가능한 상극으로 이해한다.

61. 양자 사이의 이 치명적인 양극화는 루터의 갈라디아서 해석에서 시작된다. 루터는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을 율법서(토라)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에 따라, 루터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유대교의 할례의식이 불필요하다는 갈라디아서의 요지를 유대교 자체에 대한 거부로 이해했다. 최근의 연구들이 보여주는 대로, 바울이 갈라디아의 적대자들과 벌인 투쟁에서 우선 공격 대상은 유대교의 토라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강제로 순종을 요구한 로마제국의 법과 질서이다. 바울공동체가 보여주는 그리스도 안에서유대인과 비유대인이 하나라는 연대방식은 로마황제종교의 틀 안에서 가장 먼저 제국의 질서와 사회규범과 크게 충돌한다.

62. 더 나아가 종교개혁은 유대교를 로마가톨릭교회와 동일시했다. 종교개혁은 이 둘 모두를 율법을 지킴으로 의가 성취된다.”라고 주장하는 율법주의 종교로 간주하고 적대시하였다. ‘행위 대 은혜/믿음그리고 복음 대 율법의 양극화는 이후 신학의 역사에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해석은 반유대교적이며 반가톨릭적인 성서해석에서 끝나지 않고, “열광주의자들”, 재세례파들,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다른 이교도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났고 때로는 매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63. 오늘날까지 해방신학, 여성신학, 사회운동은 행위를 통한 의혹은 율법주의로 왕왕 비난받았고, 올바른 신앙의 표현이 될 수 없다고 무시당했다. 이렇게 해서 칭의신학과 이 세상의 정의를 지향하는 운동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

64.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개신교 전통은 그 핵심에 있어서, 바울이 경계와 차별을 극복하고 서로 철저히 연대했던 사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않고, ‘타자곧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믿고, 다르게 살아가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정체성을 정의함으로써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현재 세상의 위기를 고려할 때, 개신교의 칭의신학이 하나님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고 그 성서적 뿌리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매우 화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5. 유대교와 율법을 부정적으로 분류한 것 또한 구약성서 전체를 평가절하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모든 교회의 공통적인 고백인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삼위일체론은 신약과 구약이라는 경전의 두 부분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다. 신구약의 통일성을 회복하는 일은 오늘날 종교개혁의 유산을 물려받은 신학에 있어 핵심적인 과제이다.

66.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초대는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에 약속된 미래, 즉 율법에 나타난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의 초대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대리자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뿌리이다.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11:18)

67.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정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다.(4:17) 희망 가운데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율법(토라)을 자기의 시대 배경에서 해석한다.(5-7) 예수의 율법 해석의 기준은 하나님 한분만을 예배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특별히 가난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을(12:28-34)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자의 상황이(25:31-46) 율법 해석 방식을 결정한다.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율법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안내자가 될 것이다.(5:17-20, 28:19-20, 3:31) 예수께서 자신의 율법 해석에 따라 제자들의 삶을 이끄신 것은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가운데서 끊임없이 율법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68. 로마서에서 우리는 로마제국의 압제에 눌린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죄란 추상적인 인간의 상황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정황 안에서 현실적인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바울에 따르면, 제국의 권력구조는 죄의 권세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주는 율법을 불가피하게 범하도록 강요하며 죽음과 사망의 권세에 순응하도록 만든다.(7:24)

69. 믿음을 통해,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는 바울의 칭의론은, 따라서 죄의 권세로부터 인간과 율법(토라)를 구해내는 이중의 해방을 포괄한다. 메시아적인 공동체들은 유대인과 비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서로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생명의 법인 율법을 성취할 수 있다.(8:2, 12:1-21, 13:8-10)

70. 바울과 종교개혁신학에 나타나는 율법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사회 일반의 법질서를 직접 겨냥한 것이 아니다.(usus civilis legis, 율법의 세 가지 용도 가운데 첫 번째 시민적 용도’) 법의 지배와 법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도구이다. 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생긴 것은, 예언서에 이미 기록되어 있듯이, 결정적으로 법을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아 남용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랍비들이 강조하듯이 법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2:27, 바빌론 탈무드 Trakt. Eruvin 41b) 사람의 입법행위를 언제나 비판적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그 법이 합법적으로지배적인 질서의 불의를 은폐하는 데 이용되지 않고, 약자들을 위해 정의를 세우는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1. 루터가 십계명을 단순히 자연법이라고 언급한 것은 구체적인 문제를 야기한다.(‘유대인최고법전인 모세) 그 말은 토라가 안식일법의 준수, 빚의 탕감 혹은 탐욕적인 재산축적의 금지(10계명) 등과 같은 결정적인 점들에서 당시 주변국들의 착취적인 법과는 거리가 먼 대안적인 법이라는 특성을 가리운다. 토라(율법)를 사유재산을 절대화하는 로마법과 같은 기존의 법과 동일시하면 율법의 비판적 기능은 사라지고 만다.

72. 무엇보다도 루터는 소요리문답에서 분명한 정치적 입장을 담고 있는 십계명의 다음 전문을 다루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20:2, 5:6) 또한 루터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조항을 확대 해석하여 권위자들을 존중하라고 한다. 루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교리문답서에서 성서적 근거를 변형시킨 이 두 가지 사항은 일종의 징후로서 루터주의가 해방의 하나님에게 신실하고(오직 믿음으로) 짓밟힌 자들과 연대하는 대신 지극히 불의한 질서들을 포함하여 기존 질서에 얼마나 쉽게 복종하고 영합하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73. 기존의 질서가 보통 사람, 특히 작은 자들의 삶에(25:31-40) 무관심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결여해서 우상숭배와 받아들일 수 없는 불의한 삶을 강요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죄악의 세력에 대하여 불복종과 저항을 이어가야 한다.

74. 제국주의의 구조 하에 살아가는 우리는 자유하게 하는 성서의 가르침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에 얽매인 논리와 폭력의 법칙, 노예화하는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이러한 저항은 신구약성서를 관통하는 자유하게 하시는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 종교개혁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진지한 성서연구가 새롭게 살아나야 한다. 성서연구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경제적 이슈를 포함하며, 비판적이며 해방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빚의 탕감과 하나님의 죄의 용서는 성서에서 구분되지 않는 동일한 행위이다.(6: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 성서인 구약성서를 특히 잘 알아야 한다. 구약성서는 일상의 삶을 풍요롭게 하며 윤리적인 판단을 도와준다.

75.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마찬가지로 신의 계시로 기록된 다른 종교의 거룩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욕구를 옹호하고,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그리고 아프리카와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의 나라들, 아시아와 태평양의 나라들, 중동과 유럽의 다른 모든 종교와 문화권 사람들과 함께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더 많이 대화하는 기쁨을 지지한다.(49:6) 복음은 모든 형태의 문화적종교적군사적 침략과 압제를 거부한다.

76. 종교개혁 신학의 후기식민주의적 성서 읽기(postcolonial reading)는 종교간의 대화가 예언자적인 대화임을 뒷받침하기 위해 문화적응(enculturation)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개혁신학을 통해 식민화를 비판하거나 권력에 봉사하는 개혁신학 남용 사례를 비판함으로 새로운 출발점을 채택한다.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3:8)  

 77. 종교개혁에서 발원한 교회의 정신에서,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의 아우성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고통과 억압, 문화적인 현실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고개를 돌린다고 비판한다.(25:31이하) 우리의 무관심과 무지는 교회와 사회 속의 차별을 심화시킨다.

78. 종교개혁운동은 교회가 사회에 속한 한 기관이 아니라 지역공동체에 모여 있는 세례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해한다. 공동체인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편적인 말씀이 선포되고, 상처 난 세상을 치유하기 위하여 성례전이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다양한 전통으로 그리고 다양한 믿음의 고백으로 행해지는 거룩한 공간이다.(tikkun olam)

79. 만인사제론은 그 시대의 가장 권력 지향적인 제도인 로마교회를 민주화하기 위해 흘린 처절한 눈물이었다. 오늘날 만인사제론은 보편적인 시민권과 노동 생산물의 평등한 분배를 위한 혁명적인 요구로 해석되어야 한다.

80. 교회는 16세기에 개혁되었으나, 곧 교회는 또다시 가부장적이며 위계적인 질서 구조에 편입되었고, 다시 권력 지향적인 정치 경제의 이윤 추구에 협조하게 되었다. 유대인과 재세례파 신도들, 이슬람교도들을 박해한 역사에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더불어 하나님의 성령은 콘스탄틴적인 교회의 역사로부터 새로운 역사로, 즉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포용력으로, 참된 보편적 교회로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이 교회는 종교와 인종, 지역과 자기중심주의의 장벽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끌어안고 협력하는 길을 찾아간다.

81.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사색과 영적 정화, 계몽,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명을 요구한다. 우리가 라합(2) 혹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1) 가졌던 경외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존재 깊은 곳에 모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성서와 철저한 종교개혁의 전통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제자의 길, 신비적 연합, 증언 그리고 순교자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82. 교회를 갱신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은 언제 어디로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분다. 성령의 바람은 한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고, 이윤의 추구나 교리적 주장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83. 성령의 바람은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신과 다른 종교, 이데올로기, 사회운동과 함께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게 한다. 또한 사랑과 연대 그리고 정의를 위한 헌신에 따르는 고난을 견디게 한다.

84. 루터가 십자가를 교회 됨의 상징으로 간주한 것은,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하여 가난한 이들과 연대해야 하며, 불의한 구조와 정책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가운데 직면하게 될 온갖 사회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85. 교회는 개인에 대한 관심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과 변화를 향한 비판적이고 공동체적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불의가 늘 세상을 지배할 것이며,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상호 간의 관계와 모든 창조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파괴할 것이다. 설교, 교육, 축제, 돌봄, 공동체 형성, 조직화 등을 통해 교회는 제국주의의 지배가 만들어내는 죄와 압제와 앞을 못 보게 하는 현실에 저항하게 된다.

86. 임재하시며 서로가 이어지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힘을 통하여 전혀 다른 존재가 한 몸 혹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다.(고전 12:12, 고후 5:17) 갱신과 변화를 추동하면서 성령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치에 이르게 한다. 이 일치로 인하여 교회의 분열은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개혁하는 교회는 동양과 서양,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다양한 개혁교회 전통 사이에서 나타나는 분열을 극복하며 화해를 이루어낸다. 이 모두는 주님의 성찬에 함께 참여하여 기쁨을 나누게 된다.

87. 개혁교회는 다른 신학 전통과 문화에서 받아들인 것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성령이 말씀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강조하면서 루터는 성서에 계시된 것과는 다른 성령의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루터의 이러한 비판을 다른 전통이나 다른 종교를 포함해서, 사람들 가운데 또 창조의 나머지 부분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한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8:22-23)

88. 열광주의자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오늘날 성령운동에 대한 비판으로 동일시 될 수는 없다. ‘번영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에 근거하여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실업과 약물중독,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주변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살려내는 공동체를 세우는 오순절운동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운동에 대해서는 매우 주의 깊게 판단해야 한다.

89. 세상 곳곳의 현실에 대한 사회분석과 상황적 성서 읽기, 다문화적 맥락에서 성서 읽기 등에 근거하여 주변화된 사람들의 시각에서 행해지는 성서에 대한 재발견과 새로운 성서 읽기는 고무적인 희망의 증거이다. 이것은 종교개혁 전통의 해방적 해석학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표식이다.

90. 종교개혁의 핵심은 그 시대 상황에서 성서를 비판적으로 다시 읽는 것과 함께 보편적 교육기회의 제공이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뿌리를 둔 교회가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나감에 따라 성서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충분하게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철저한 이윤추구를 정당화하며 미몽을 영속화하는 개인주의적 영성, 기독교 근본주의가 날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다.

91. 성서신학과 비판적인 신학 교육(일반 교육과 함께)의 중차대한 역할을 재발견하는 것이 21세기의 지구촌적 기독교에서 필요한 지속적인 개혁과 갱신을 위한 핵심 열쇠이다.

92.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계속되는 십자가의 저항에 굳건히 서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자이다.(12:2)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이웃과 협력하여 정의와 평화의 새 세상을 일구는 사람 역시 복 있는 자이다.

93. 이 시대는 새로운 종교개혁을 요구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쉽게 경건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실제 세계의 현실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에서 경건이 적절하지 않게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마르틴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언어의 갱신을 이루는 한편 복음의 해방하시는 메시지로 돌아가야 한다.

94. 본회퍼는 세상에 참여하는 기독교 곧 묵은 복음에 새 언어를 찾아주는 기독교를 제안한다. 이 제안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의로운 자의 기도와 실천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의 담론은 이러한 기도와 실천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하고, 바른 실천과 정통 신학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해방신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성서와 오늘의 세계적 위기가 촉발시킨 종교개혁의 정신을 더 철저히 하라는 요구는, 오늘날 교회와 신학을 위한 다른 길이 없는 단 하나의 지향점이다. 루터는 성서를 모든 전통에 대한 진리 판단의 척도로 이해했다. 상황적 성서해석은 이러한 해석학의 전통을 비판적이고도 예언자적으로 갈고 닦았다. 현대자본주의 맹아기에 살았던 루터는 체제 비판의 문을 열었다. 살인적이며 자살을 유발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요소에 귀 기울여야 하며, 이웃과 더불어 술에 취한 운전자가 차를 운전할 때, 차 바퀴에 펑크를 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정의와 평화의 순례의 길을 이웃과 함께 계속 걸어가야 할 것이다.

 

할레(Halle) 201487

 

                                                                      ‘94개 논제해설(정승훈)

    종교개혁 500주년에 즈음하여 종교개혁을 향해 급진적인 질문을 던진 신학자들의 ‘94개 논제가 전 세계 신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94개 논제는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리며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 정문에 써 붙였던 그 자리에 붙게 된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95개 조항을 연상시키는 94개 논제는 독일과 북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의 신학대학에서 강의와 세미나 시간에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질 정도로 학문적으로 정선되고 날카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프란시스 교황은 94개 논제를 환영했고,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는 94개 논제를 격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94개 논제는 무엇인가? 논제 작성을 위한 5년간의 워크숍 통해 유럽과 북미에서 종교개혁 신학에 정평이 난 학자들과 성서 신학자들, 그리고 비서구권 출신의 학자들 가운데 종교개혁의 사유를 해방과 타자의 인정에 대한 관점에서 발전시켜 온 학자들이 관여했다. 이 운동은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의 협력기구인 세계루터란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 LWF)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대회를 발의하면서, WCC가 협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분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울리히 두크로프 교수(은퇴)이지만, 이분을 중심으로 독일의 진보적인 학자들, 그리고 북미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이 운동에 연대하는 신학자들이 대거 함께하였다.

    30명의 전문 신학위원과 20여 명의 초빙학자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첫째로 논의되었던 내용은 어떻게 종교개혁의 사유를 급진화(철저화)하겠는가하는 것이었다. 논의를 거쳐 급진화의 방향은 두 가지로 잡혔는데, 하나는 루터 안에 있는 급진적인 사상을 재발견하는 시도이다. 일례로 루터의 경제비판은 마르크스가 자본론1권에서 본원적인 축적론과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경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격찬할 정도였지만, 500년 종교개혁 운동의 해석사에서 거의 망각되다시피 한 부분이었다. 흔히 루터는 토마스 뮌처를 억압한 기존 세력을 옹호하는 보수 집단의 우두머리 정도로 여겨지지만, 루터의 경제비판의 내용을 되살려보면, 그의 예언자적인 경제비판이 오늘 21세기 세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불의와 폭력에 내재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500년간 종교개혁 해석사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내재적 비판을 시도하는 것이 첫 번째 급진화 작업에 속한다.

    두 번째는 우리 시대의 여러 문제 가운데 특히 세계 경제화, 반유대주의, 팔레스티나 분쟁, 생태학 위기, 타문화와 종교에 대한 인정 등을 문제 틀로 삼아 루터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를 비판적으로 발전시키는 현재적인 급진화이다. 이렇게 내재적 비판과 현재를 위한 의미의 재발견이 루터를 급진화시키는 두 축으로 움직이면서 94개 논제는 5년간의 논의 끝에 작성되었다.

    종교개혁의 급진화와 내재적 비판을 도출하기 위하여 분야별로 모인 학자들은 루터의 사상 가운데 중심에 속하지만 주변으로 밀려나 버린 경제정의, 율법에 대한 심오한 이해, 두 왕국론에 대한 오해, 창조신학에 대한 개방성, 타자를 향한 인정 등 많은 부분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워크숍을 개최하면서, 이런 주제들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상이한 입장을 합의하는 절차를 거쳤다. 94개 논제 가운데 루터의 율법과 복음, 그리고 반유대주의 문제는 바울과 로마제국과의 연관성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로 유명한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의 브리키테 카 교수가 독일의 루이제 쇼트로프, 그리고 프랑크 크뤼제만 교수와 더불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급진화의 방향을 위한 두 번째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루터는 유대인이나 이슬람 문제에 관하여 신학의 내적인 측면에서 열린 개방성을 갖지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한계와 실패를 갖는다. 루터는 성령에 대한 열린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카리스마 성령운동과 사회정의 문제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루터는 창조신학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생태신학(eco-theology)에는 접근하지 못한다. 94개 논제는 이러한 21세기의 문제를 루터사상과 비판적으로 연관 지으면서 종교개혁 사상의 급진화를 담고 있다. 그러나 94개 논제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지, 시대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담거나 대변하지는 않는다. 탈중심에 속하는 학자들은 대변’(representation)이라는 식민주의적인 언어에 대단히 신중하게 반응했다.

    전문 신학위원들과 초빙학자들은 초교파 차원에서 모였는데, 독일, 아프리카, 캐나다,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가나, 파키스탄, 인도, 한국 등 많은 나라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독일, 미국, 라틴아메리카 출신 학자들이 70% 정도이고, 나머지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학자들은 주로 해방신학과 루터의 칭의론, 농민전쟁, 더 나아가 생태학과 루터의 창조신학에 관한 논제를 작성했다. 브라질 출신의 신학자인 월터 워트만은 WCC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지난 WCC 부산총회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인데, 주로 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아프리카에서 온 학자들은 루터와 카리스마 성령운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루터와 이슬람 문제는 파키스탄 출신인 찰스 암자드-알리 교수(미네소타 루터신학대학원)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는 비서구권 출신으로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헬무트 골비처 문하에서 칼 바르트와 종교문제를 공부한 학자이다. 동아시아 분과에서는 필자와 본회퍼 연구가인 여성신학자 레나테 빈트와 북미의 크래그 넷산, 그리고 아르헨티나 출신 학자들이 신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루터와 본회퍼, 칼 바르트가 일본의 십자가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홍콩의 종교 간의 대화 신학, 그리고 중국의 문화신학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이런 관점에서 논제 작성에 기여했다.

    2017년에는 주로 북미, 브라질, 아프리카, 아프리카 등지에서 신학생들을 초청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급진화에 대한 청년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또 독일에서는 청년들을 주축으로 카이로스 운동과 연결 지으면서, 이러한 청년 중심의 행사가 독일의 교회의 날(Kirchentag)로 이어져 독일교회의 갱신과 급진화 운동으로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미에서는 주로 지역교회와 사회운동을 통합하면서 포럼을 개최하고 94 논제를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의 위원장인 카렌 블름키스트 총장(버클리 루터교 신학대학원)은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에서 지역교회와 사회운동을 주도하면서 94개 논제의 실천에 큰 수고를 하고 있다.

    5년 동안의 워크숍과 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연구논문들은 독일어로 5권의 책으로 엮어져 스위스의 Lit 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 북미학자들의 연구논문은 Radicalizing Reformation: North American Perspective라는 제목으로 편집되어 신학교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5년간 신학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94개 논제 작성에 관여한 필자에게 남다른 감회가 있다면 유럽과 북미가 아니라,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신학자들의 새로운 목소리가 논의의 중심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탈중심권과 지역에서 활동하는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소리가 향후 WCCLWF의 방향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한 가지 반가운 것은 94개 논제 작성에 영국 성공회 신부이자 동시에 칼 바르트 신학의 급진적 유산을 발전시킨 티모티 고린지 교수가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비판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탈중심화 신학운동은 에큐메니컬의 성격을 매우 바람직하고 신선하게 하리라 기대한다.

    94 논제 작성에 관여한 위원들은 향후 이 논제가 독일교회의 갱신운동을 위해 사용되고 또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과 아시아 신학의 보다 깊은 대화를 모색해가기를 원한다. 특히 유대교와 이슬람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에서, 그리고 아프리카의 카리스마적 성령운동 등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논제의 의미가 한층 더 깊어지길 바라고 있다. 물론 이 논제가 이론과 실천을 매개하는 비판적인 담론형성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탈중심이란 해체도 아니고 더욱이 보편성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한 중요한 축을 구성하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유산이 우리 시대에 비판적인 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94개 논제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게 종교개혁의 급진화는 과거인 종교개혁의 뿌리에 내재적 비판을 시도하면서 미래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운동으로 한층 다가설 것이다.

    끝으로, 이번에 논제를 94개로 정리한 것은, 우선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겸손의 표시이다. 루터 전통에서 먼저 배우고, 우리 시대의 한계와 문제를 비판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 논제 작성에 참여한 학자들의 공동의견이었다. 루터의 95개 논제에 숫자를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정승훈 | 미국 미네소타 루터신학대학 교수로 5년간 급진적인 종교개혁프로젝트에 관여했다. 지금은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에 소속된 루터교 신학대학원과 시카고 루터신학대학에서 겸임교수로 조직신학과 종교학을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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