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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의 데이트-2(종교 없는 종교)

하늘기차 | 2016.08.27 11:18 | 조회 964
http://hwacademy.kr/?p=5055

< 데리다와의 데이트-II: 종교 (종교없는 종교 Religion without Religion)>

2016년 8월 1일과 2일, 당산동에 있는 "새물결플러스 아카데미"에서 "데리다와의 데이트"라는 주제의 공개강연을 했다. 총 6시간 55분의 동영상을 찍어서 편집하여서 공개하여 주신 아카데미에 감사를 드린다. 원래는 제 1강인 "데리다와의 데이트: 환대"만을 공개하고, 제2강은 아카데미 회원들에게만 공개하도록 기획했었다. 그런데 강연자인 내게 페북 메시지로 공개여부를 문의하시는 분들이 여러분이 계셔서 조심스럽게 새물결에 2강도 공개하는 것에 대한 제안을 했다. 사실 아카데미의 '이득'을 위해서는 아마 회원들에게만 공개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모른다. 그런데 아카데미에서 2강도 공개하겠다는 결정을 해 주셨다. 나로서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아카데미가 '공공선(common good)'을 위해서 이렇게 개방하시기로 결정하셨을 것이라는 것은 나의 추측이지만, 눈에 보이는 직접적 '이득'도 없는 이러한 공개강연 동영상을 만들고, 편집하고, 공개하는 이 엄청난 에너지, 시간, 노력, 열정에 아카데미의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보다 많은 분들이 새물결아카데미의 후원자가 되기를 바란다.

3시간 30분이 되는 데리다와의 두번째 데이트에서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제한된 지면에 '문자화'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다. 아래의 글은 이 강연 주제를 이해하는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에서 단지 '스케치'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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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범주화 열병 (categorization fever)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는 다양한 ‘범주화(categorization)’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면서 구성되고 있다. 정치나 종교영역은 사실상 이러한 ‘범주화-열병’을 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는 언제나 ‘친구-적’이라는 범주로 개인이든 국가들간의 관계를 범주화한다. 그런가 하면, 종교는 유신론-무신론, 신앙-불신앙, 정통-이단등의 '이분법적 범주화'의 틀을 가지고 사람들을 분류한다. 그런데 이러한 ‘범주화 열병’이 정치와 종교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된다. 정치적 범주화는 국가, 정당, 개별인등 다양한 층이 지닌 자신의 ‘이득’과의 관계속에서 때로 상대화되기도 하며 가변적이 된다. 반면, 종교가 지닌 ‘범주화 열병’은 ‘신의 이름’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더욱 고질적인 왜곡으로 고착되고 절대화될 위험성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범주화 열병' 보다 종종 더욱 위험하다.

2. 종교는 무신론 또는 유신론에 대한 것인가

‘데리다’라는 이름에는 언제나 ‘해체(deconstruction)’라는 이름이 따라온다. 데리다에 대한 가장 극도의 곡해는 바로 이 ‘해체’라는 개념에 대한 곡해로부터 연유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해체’ 라는 이름 때문에 많은 이들은 데리다를 아무 의심없이 ‘무신론자’라는 범주에 집어넣는다. ‘당신은 무신론자입니까?’라는 질문에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I quite rightly pass for an atheist.”

왜 데리다는 ‘네, 나는 무신론자이다’라거나 ‘아니오,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고, ‘무신론자로 통한다’라는 방식으로 답변을 했을까. 또한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답변을 통해서 데리다는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가.

‘당신은 무신론자입니까?’라는 질문은 매우 ‘부적절한’ 질문이다. 오직 ‘네’든가 ‘아니오’라는 이분법적 방식의 답변을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데리다의 답변은 이러한 ‘범주화 열병’에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면서 그 범주화 자체에 제동을 걸고 있다. 즉 그 범주화를 담은 질문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한다. 종교란 ‘무신론’ 또는 ‘유신론’이라는 범주화에 의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의 ‘존재-부재’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첫째, ‘어떠한 신’을 의미하며 둘째, ‘존재-부재’란 어떠한 의미인가에 대한 치열한 물음이다. 신은 대상화된 물체처럼 ‘있다-없다’라는 범주화된 공식으로 그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데리다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종교의 귀환(return of religion)’ 현상이 극대화되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존재의미, 그리고 종교의 이 세계에서의 역할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참으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3. ‘종교 논의’의 더불 바인드(double-bind): 필요성과 불가능성

‘종교’에 대하여 ‘논의한다’는 것은 분명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한 종교에 대하여 논의 할 때, 거쳐야 하는 과정은 ‘총체화(totalization),’ ‘본질화(essentialization),’ ‘고정화(fixation),’ 그리고 ‘획일화(homogenization)’이다. 결과적으로 각기 다른 개별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속에서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경험되고 존재하는 종교의 무한한 ‘다양성(heterogeniety)’들은 억눌러지고 정형화되면서 종교는 하나의 ‘단일한 집합체’가 되어 버리곤 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분명히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종교에 대한 여타의 현상적 분석과 진단을 해야 하는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의 ‘분석-너머’에 있는 종교의 의미-공간을 남겨놓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분석으로 종교가 모두 ‘해부’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론적 겸허성’을 받아들이면서 논의가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논의의 이러한 ‘더불 바인드’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면서, 종교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다층적 폭력과 살상이 일어나고 있는 이 세계에서 매우 긴급한 과제이다.

4. 데리다: 종교 또는 종교없는 종교

많은 이들은 자크 데리다를 ‘무신론자’라고 간주하곤 하지만, 데리다는 사실상 현대 종교연구에서 중요한 철학자중의 한 명이다. 데리다는 자신의 책 <Specters of Marx>, <Politics of Friendship>, <Archive Fever>, <Gifts of Death> 그리고 “Faith and Knowledge” 등의 글들에서 ‘데리다적 종교’를 담아낸다. 칸트, 니체, 레비나스 등과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에 개입하면서 그들과 ‘함께’ 생각하고, 동시에 그들을 ‘넘어서는’ 해체적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이 현대사회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종교의 모습을 제시한다.

데리다는 그 어떤 개념을 다루든지 그 개념의 ‘전통’에 철저하고 끈기있는 개입으로부터 시작한다. 매우 치밀하고 열정적인 개입을 통해서 그 전통의 ‘자명성’과 ‘상투성’에 근원적인 물음표를 던짐으로서, 돌연히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 일상적 개념을 뒤집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탄생시킨다. 종교, 우정, 선물, 환대, 용서, 연민, 애도, 법과 정의 등 우리주변에 너무나 일상화되어 우리가 이미 ‘안다’고 생각하던 개념들이 데리다를 거치고 나면, 돌연히 그 끝에 닿을 수 없는 심오성과 복합성을 지닌 수수께끼 (enigma, aporia)같은 세계로 던져진다. 각기 다른 개념들로 보이던 것들이 서로 얽히고 섥힌 우리 삶의 이야기들로 깊숙히 개입하게 되면서, 그 개념들을 ‘구원 (redeem)’ 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의 세계와 연결되는 개념으로 태어난다.

1) 종교란 책임성이다

데리다의 매우 복합적인 종교이해를 이 제한된 지면에 모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데리다의 종교를 이해하는데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데리다의 종교-규정이다. 데리다는 ‘종교란 책임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religion is responsibility or it is nothing)’라고 종교를 규정한다.

이러한 데리다에게서 ‘악마적인 것(the demonic)’이란 ‘비책임성 (nonresponsibility)’이다. 종교(Re-ligion)는 타자들의 부름에 반응/응답 (Re-sponse)하는 것이며, 응답하는 것이란 바로 책임성(Re-sponsibility) 이다.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은 사실상 예수의 종교이해에도 바로 그 핵심을 이룬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의 비유(마태복음 25장—)는 철저히 나와 타자의 관계가 책임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대사회에서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감옥에 갖힌 사람,’ ‘낯선 사람,’ 그리고 ‘아픈 사람’에 대한 연민과 책임성의 실천이야말로 종교의 핵심 을 이룬다는 것이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도대체 우리가 책임성을 실천해야 할 이러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책임성으로서의 종교'는 그 책임성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실천하기 위하여 정의에의 예민성,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과 연대, 그리고 가까운 타자/먼 타자에 대한 복합적 의미의 환대 등의 개념과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2)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다

데리다의 종교에 관한 논의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독특한 개념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messianicity without messianism)’이다. 종교는 그 다양한 양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 ‘새로운 세계’란 ‘불가능성의 세계’이며 언제나 ‘다가오는 세계 ( world-to-come)’이다. 이 ‘다가오는’ 또는 ‘도래하는 (to-come)’이란 선적인 달력속의 도래가 아니다. 결코 도래하지 않는 불가능성의 세계이지만, 그 불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열정을 부여잡는 것—이것이 바로 데리다의 종교이다. 그래서 데리다에게서 종교란 ‘불가능성에의 열정(passion for the impossible)’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을 부여잡고 있어야 하는가. 예를 들어서, 무조건적 사랑, 무조건적 용서, 무조건적 환대, 무조건적 우정, 절대적 정의 등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이 구체적인 현실세계에서 실현불가능하다. 그러나 바로 ‘실현 가능성’의 세계에만 안주하는 것일 때, 종교는 그 존재의미를 상실한다.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가능한 것’을 지향하는 것이란 사실상 아무 것도 ‘지향’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의 세계 너머’에 대한 희망과 갈망을 가지고, 그 불가능성의 축을 지속적인 ‘참고서’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종교는 그 존재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약속’의 미래를 ‘기억함’을 통해서 우리는 이 현실세계에서 사랑과 환대의 원, 용서와 우정의 원, 정의와 연민의 원을 조금씩 확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 환대할 수 없는 이를 환영하는 것—이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종교’라는 개념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에게서 ‘오직 가능한 개념이란 불가능한 개념(the only possible concept worthy of the name is impossible concept)’이다. 혼돈스러운 표현 같지만, 이것이 바로 종교적 가치(사랑, 환대, 평화, 정의 등)의 심오한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는 지점이다.

3) 종교없는 종교 (Religion without Religion)

종교가 제도화될 때, 그 종교는 진리/신에 ‘확실성’과 ‘정형성’을 그 토대로 삼게 된다. 다양한 예전과 교리, 그리고 제도적 조식화를 통해서 ‘고착될 수 없는 것’을 고착하게 되고, ‘확실할 수 없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정형화함으로서 제도적 종교는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인간의 유한한 인식능력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은 ‘파악 가능한 것’으로 만듦으로서 종교는 그 종교의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왜곡하게 되는 것이다. 유한자인 인간이 무한자인 신에 대하여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어떤 위대한 인간도 ‘인간-너머의 존재’ 또는 소위 ‘진리’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절대화’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절대화의 덫’에 빠지자마자, 종교의 근원적 왜곡이 시작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의 유명한 기도 “나는 신에게 내 속의 신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다(I pray God to rid me of God)”는 심오한 종교적 함의를 담고 있다. 신/진리에 대한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uncertainty)’을, 결정성이 아닌 ‘비결정성(undecidability)’을 그리고 명명성이 아닌 ‘비명명성(unnameability)’의 차원을 받아들일 때에 오히려 신/진리는 무한한 공간속에서 인간의 구체적 현실세계와 맞닿을 수 있는 결들(layers)을 확장하게 된다. 엑카르트의 기도는 해체적 신을 드러낸다. 나의 유한한 인식/경험체계속에서 무한한 존재인 ‘신’을 절대화하고 고정시키려는 그 인식론적 ‘욕구’를 넘어서서 내 속에서 그 ‘신’을 제거함으로서 ‘신’을 그 무한의 가능성속에 다시 위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고 나의 유한성속에 갇힌 ‘신 (God)’을 해체하여 ‘취소선 아래 신 (God under erasure)'으로 대체하는 것—이러한 해체적 행위는 ‘파괴’가 아니라, 신/진리/절대자에 대한 ‘무한한 인정/긍정(endless affirmation)’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체란 사랑의 작업(work of love)'라고 데리다는 강조한다.

다층적 유한성을 지닌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근사치적 진리(approximate truth)’ 또는 ‘관계적 진리(relational truth)’ 만이 신/진리를 왜곡하지 않고서도 그것에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일 뿐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약속,’ 즉 '메시아적인 것 (messianicity, the messianic)은 무의미성의 삶, 무관심의 삶, 절망성의 삶으로부터 인간을 끄집어 내어서, 타자와의 ‘함께-살아감’이라는 의미를 심화시키는 종교가 가능하게 한다.

 

2016년 8월 2일 공개 강연, 총 3시간 31분
<데리다와의 데이트-II: 종교 (종교없는 종교 Religion without Religion)>
2강 http://hwacademy.kr/?p=5055
2강-1: 1시간 28분
2강-2: 2시간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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