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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창조절네번째 주일, 2023년 9월 24일)

만지다 | 2023.09.28 12:42 | 조회 173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사도행전 1626-34

26 그 때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모두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풀렸다.

27 간수가 잠에서 깨어서,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는, 죄수들이 달아난 줄로 알고, 검을 빼어서 자결하려고 하였다.

28 그 때에 바울이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하고 외쳤다.

29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2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33 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34 간수는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하였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야기는, 빌립보 지역에서 선교를 하던 바울과 실라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감옥에 갇히게 된 때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중,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에게는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갑자기 감옥에 큰 지진이 일어났던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보통, 아주 큰 지진이라 했을 때는,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면서, 건물이 무너지고, 그러므로 그 안에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거나 했을텐데, 말씀에서 일어난 지진의 결과는, 그저 감옥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의 수갑과 사슬이 풀려진 것 뿐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갇혀있던 바울과 실라를 구해내시기 위해, 나타내신 놀라운 기적이라 할 수가 있으며,

우리는 이것을 구원의 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기적 가운데 우리가 주목해봐야할 점은 감옥과 수갑이, 바울과 실라의 것만 열리고 풀린 것이 아니라, 그 감옥에 있던 모든 사람의 것이 열리고 풀렸다는 것인데요.

사실, 감옥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한 것은 바울과 실라였지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찬송하고 기도하던 바울과 실라를 시끄럽다하며 욕했을지도 모를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옥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똑같이 자유케 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영광을 돌리는 바울과 실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구해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믿는 성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매어있고, 갇혀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라면,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이자, 은혜입니다. 그렇게, 빌립보 감옥에서의 모든 죄수들의 옥문과 수갑이 벗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이들의 매인 것을 벗기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상징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의 커다란 사실은 하나님께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란, 바로 다름 아닌 자유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이라 했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시며 자유케 하신 사건을 기억해낼 수가 있습니다.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큰 나라들의 포로로 잡혀가는 생활을 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은, 다름 아닌 자유와 해방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구원...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릴 수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가장 처음 선포하셨던 이사야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누가복음 418절의 말씀인데요.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에는, ‘자유케 하는 것으로에,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 속에서 한 가지, 조금 이상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옥의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들의 수갑과 사슬이 풀리며 모두가 자유롭게 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현장 속에서 어째서인지, 바울은 감옥을 탈출하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라고 외치며, 자유롭게 되는 것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우리의 보통의 상식에 맞지 않을뿐더러 앞서 살펴본, ‘자유라는 구원의 관점에서 볼 때도, 전혀 맞지 않은 것입니다.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일처럼 보입니다. 기껏,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시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자유의 구원이 바로 눈 앞에 나타났는데, 그것을 거부해버렸으니 말이죠. 물론, 이때에 바울도 그 놀라운 기적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이자, 구원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바울에게는 땅끝까지 복음을 선포하고자 하는 선교의 중대한 임무가 주어져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어서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경험한 이 놀라운 기적은, 앞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좋은 간증의 스토리로, 분명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 갇혀있었던 나를 놀라운 기적을 통해 구원해주셨다.”라고 말이죠. 그리고 어쩌면, 오늘의 말씀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이 이야기가 바울이 감옥을 탈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한들 그러한 결말을 받아드리는 것에 전혀 무리가 있거나 어떠한 이상한 점 따윈, 발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어째서 바울은, 그러한 자유를 포기하고, 구원을 거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분명, 바울이 감옥을 지키던 간수, 그 한 사람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유의 기쁨을 누리던 그때에, 홀로,,, 단 한 사람,,,! 비통함과 자괴감에 빠져서, 칼을 빼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그 간수, 그 한 사람이, 바울의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울은, 주저함없이, 그 눈 앞에 있는 아픔의 상황에 반응하며 자신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당장에 자기 앞에 있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 간수가 생명을 잃지 않도록 우리가 모두 여기 있소소리치며, 머물러, 그 곁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은 이때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의 바로 전에도 그는 굳이 어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에 집중함으로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앞서의, 16절부터의 내용을 살펴보면 바울은 빌립보에서,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는 귀신들린 한 여종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여종은, 바울과 그 일행을 보고서, “하나님의 종들이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라고 사람들을 향해 외치며, 여러 날을 쫓아다니던 중에 있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주인들에게 큰 돈을 벌어다줄 만큼 용한 점을 쳐주는 그 여종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신뢰가 있었을텐데, 그러한 여종이 알아서, 바울의 일행을 가르켜 하나님의 종이다.’, ‘구원의 길을 알려준다라고 대신해서 외쳐주다니, 일종의 보증이자, 효과가 좋은 홍보, 광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바울은 그것을 잘 이용하고 도움을 받아서,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고 편하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손을 대지 않고도 코를 풀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당장에 그 기회와 이익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불리한 일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새번역 버전의 성경의 18절 말씀에는, 바울이 그 여인의 행동에 대해 귀찮게 여기고라고 되어있지만, 이 부분은, 원래 헬라어 동사 "디아포네오_διαπονέω" (diaponeo)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고통받다", "괴로워하다", "근심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는데, 그러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 말씀 구절을 다시 보게 된다면, 바울 그가 정말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며, 근심했었던 이유를 여종이 귀신에 들려 있는 아픔의 상황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인들에게 착취당하며 돈벌이의 도구로 살아가고 있던 그 상황 역시도 바울을 고통스럽게하고 근심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이에, 바울은, 그 여종을 이용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 외면하지 않으며, 그에게서 귀신이 떠나가도록 해주었고 더이상 그 여종이 아픔 가운데 있지 않게, 주인들로부터 착취당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바울은, 돈벌이의 희망이 끊어진 주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고발을 당해, 억울한 누명을 써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 여종을 고쳐주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올 그 분노에 대해서나, 그러므로 맞이하게 될 고난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렇게 될 것이라 예상은 했을 것입니다. 또한, 한시라도 빨리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임무가 있었기에 그 상황을 피해갈 수도 있는 선택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았던 바울은, 결코 그 여종을 외면할 수가 없었고, 그의 아픔에 반응하여 자신의 기회와 이익을 버리고, 자신을 향한 그 분노와 고난을 받아드렸습니다. 덕분에 그 여종은 더 이상 귀신들림으로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 도구와 수단이 되어 착취를 당하지도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당장 자기 앞에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한 영혼, 그 한 생명을 구하고 살리는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 어떠한 것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옥문이 열리고 수갑이 풀렸을 때의 바울, 그가 도망가기를 선택하지 않고, 감옥에 머물러 간수의 생명을 구했던 것은 바로 그 앞선 사건에 비추어볼 때에,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어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의 본질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저런 상황 싹 다 무시하고 냅다 감옥에서 탈출했다면 어쩌면 더 좋은 스토리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계속해서 선교 사역을 이어 갈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구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참된 구원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지금 자신과 함께 있는, 자기 앞에 있는 한 영혼에게 집중하기를 선택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눈 앞의 아픔 상황에 반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유와 구원을,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그러한 누군가의 생명을 잃으면서 얻는 자유로는, 생명을 잃어버린 누군가는 물론, 자유를 얻게 된 자신조차 진정한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한 구원의 본질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핵심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는 간수의 질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 간수가 이미 구원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방금 전까지 함께 확인을 했습니다. 앞선 사건을 돌이켜본다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그 간수에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스스로 자결하려는 자신을 보고서, 감옥을 떠나지 않고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라고 외쳤던 바울을 통해서 말이죠.

이처럼, 구원이란 자신의 눈 앞에,,,! 자기 가까이에,, 함께 있는,! 아픔과 슬픔에 반응함으로 비록 자신의 기회와 이익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아픔과 슬픔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며 대답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명한 진리를 그냥 뚝 떼어놓고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의 이야기에서 바울이 보여준 모습과 함께 봐야합니다. 바울은 주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자결하려는 간수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외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앞에 있는 아픔에 저절로 나온 반응이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은 그냥 어떤 선언으로 그치는 믿음이 아닌 진정으로 예수의 마음을 품고 예수를 따르는 의지와 다짐, 실천으로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바울은 기꺼이 함께 아파하고 같이 슬퍼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영혼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면서 자신이 해를 입는 것에도 주저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치,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구원은, 믿음 뒤에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차원에서,, 주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의 말씀은, 아무래도 저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6월에 보았던 목사고시의 면접 과목에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라는 대답을 하지 못해서 면접관으로부터 동성애를 반대하는 총회의 결의를 따르지 않는 김지만 전도사님은 이곳에서 목사가 될 수 없을 겁니다.”라는 말을 듣고 불합격이란 결과를 받아 들게 되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많이 힘들고 괴로웠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 이후로 왜 나는 동성애에 반대한다 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한 가지 질문이, 저를 집요하게 뒤따르며,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때만 눈 딱 감고 모른 척 했더라면, 합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선 목사부터 되고서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내도, 괜찮았을텐데,,,하는, 그런 아쉬움의 생각들도 문득문득 들 때가 있었고, 뭔가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미련하고 어리석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들도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의 바울이 보여주었던, 구원을 나타내는 모습은 그날의 면접장에서의 제가 절대로 틀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당장에는 매를 맞고, 불합격의 감옥에 갇혀 있게 되더라도 몰랐으면 몰랐지, 귀신들린 여종, 자결하려는 간수와 같은 상황에 놓인, 그 성소수자들의 아픔을 알고 있는 이상, 절대로 동성애를 반대합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당장 내 앞에 있는, 내가 보고 있는 아픔에 반응하며, 곁에 남아있는 것이, 그 생명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진정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자, 구원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감옥을 당장에 탈출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했다 한들 분명, 그 일에는 더이상 구원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에, 그날 제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라는 답을 하고서 어찌저찌 목사가 됐다 한들, 분명 저는 더이상 구원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저에게 그러한 확신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구원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씀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오늘의 본문 말씀 끝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던 간수가 구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나타내는 사람이 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구원을 얻은 간수는 상처 입은 바울과 실라를 치료하며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풀어줍니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유대인을 도왔다는 것과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누명을 써서,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간수는 그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주저함없이, 그저 자기 앞에 있는 아픔과 어려움에 반응했습니다. 당장에 함께 있는 한 영혼에 집중하며, 한 생명을 최선을 다해 사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4절의 말씀에서처럼, 간수는 그 모든 것을 기뻐했습니다.

정말, 참 구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사랑하는 우리 고기교회 교우님들께 참된 구원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구원을 얻으시기를 바라며 그 구원에 계속해서 머무르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라고 한 바울처럼 자유가 필요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사랑이 부족한 자에게 가서,

내가 여기 있어! 당신과 함께 하겠어!’라고 외치는 그렇게 한 생명, 한 영혼의 아픔과 슬픔, 어려움에 반응하며, 함께 아파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우리 서로가 모두 함께로, 공동체가 되기를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합니다.

함께 침묵으로 이 시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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