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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발씻어주기(부활절다섯째주일, 2019년 5월19)

하늘기차 | 2019.05.19 13:29 | 조회 1085


 

                  예수님의 발씻어주기

2019519(부활절다섯째주일)                                                                              13:1-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동안 제자들 사이에는 권력에대한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13장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1절은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말합니다. 끝 까지 사랑한다고 합니다. 또한 13장의 뒷 부분 34절 에서도 사도 요한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세상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단지 봉사의 모범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 발씻는 일은 노예들의 일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는 것이 일반입니다. 그러나 이 날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일종의 포퍼먼스입니다. 이사야가 3년 반 동안 벌거벗고 다니고, 예레미야가 멍에를 멘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뜻을 상징을 통해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것도 평화의왕으로 오신 것을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씻음은 단순 봉사가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본질이 무엇일까요3절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

                        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아신다고 하면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2가지를 안다고 합니다. 무엇을 아는가 하면 첫 째 아버지가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것, 둘 째 하나님께로 돌아 간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우선 모든 것을 맡겼다는 말은 모든 이라고 해서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그러니 궁극에 십자가입니다. 이것과 연관되어 목자와 양과 양의문과 문지기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께서 맡기신 양들을, 우리 바깥의 양들을 포함해서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보이시는데, 언제 까지 인가하면, 끝까지인데, 그 끝이 어디인가 하면, 발을 씻기는 이야기가 다른 곳에는 눅12:37에서 딱 한 번 언급됩니다.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

                               탁에 앉히고, 곁에 와서 시중들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인가요? 주인이 밤중에나 새벽에 온다고 합니다. 섬기는 일이 단지 봉사의 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제자가 아니라, 계급의 하급자가 아니라, 주인이 시중을 듭니다. 모든 가치의 전복입니다. 그래서 굳이 곁들여 이야기를 한다면 눅22:27나는 섬기는 자”(디아코니아)로 왔다는 이 말씀 역시 단지 봉사의 개념을 뛰어넘는 사랑, 종말론적인 가치에서 우러나오는, 교회, 신앙, 사랑의 행위의 본질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발씻음은 종말론적 사랑입니다. 사랑에 종말론적인 가치가 없다면, 그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종말, 즉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가치가 0이며, 그 모든 것을 선으로 회복시키리라는 것이며, 그 종말의 믿음을 따르는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깊고, 넓고, 높습니다. 3:10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 1:23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라 하였습니다. 바로 우리에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체나, 집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어제 어느날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라는 책의 저자인 우리 마을 주민이었던 김효경 작가와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마을의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 속에 교회와 도서관, 그냥.. 가게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작가는 고기리에 들어오기 전에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골, 그래도 도심과 멀지 않은 이 곳에 와서 전원 생활을 통해 회복을 바랬는데,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은 것입니다.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내용의 책인데, 직장과 사회 속에서 숨막히게 살아왔던 삶과는 다른 마을의 모습,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 여유로움에 자신의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인 삶의 패턴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소위 나누는 삶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근데 그 나눔을 조심스럽게 추적해 보니, 그 곳에 밤토실어린이 도서관, 그냥.. 가게, ᄋᆞ래 목공방, 생태교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책에도 있지만, 어제도 다시 반복하여 들려주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책에서, 그 분의 이야기 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향이 솔솔 풍겨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언론과 미디어들을 통해, 자본과 권력을 통해 온 세상이 거대 담론 만이 존재하는 세상과 그 틀로 이루어진 줄 알았는데, 그 시스템을 비집고, 마치 아스팔트의 틈 사이로 솟아 오른 노란 민들레처럼 그렇게 서로 나누는, 마음을 주고 받는 이야기들이 이 마을 이 곳 저곳에서 벌어지는데, 그 근원을 찿아가 보니 교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초대교회 로마 제국 시대에, 예수의 자도 꺼내지 못하던 시대의 초대교회가 그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복음이 그렇게 급속하게 퍼져나갔을까 하는 의구심에 점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아 초대교회 신앙인들의 말과 행동, 삶의 모습이 전혀 로마제국의 시스템과 달랐다는 것이지요. 이효경 작가의 눈에도 마을과 교회가 그렇게 보이지 않았나 십었습니다.

 발씻기는 종말의 사랑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서의 종말을 고해야할 때가 되어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데 베드로는 이 발씻음을 이해 못하여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은 무엇인가를 행하기 전에 먼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는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전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사랑을 거부합니다. ‘주님을 위해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생명과 종말의 가치가 있는 사랑에 우리가 끼어들 여지는 좀처럼 없습니다. 그럼에도 발씻음의 은혜를 체험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요일4:10에서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

                                  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합니다. 예수님을 핀잔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 느낌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처음으로 말씀을 꺼내셨을 때에 베드로가 했던 말과 느낌이 비슷합니다. 16:22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

                        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하고 대들었는데, 그 때도 발 씻을 때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꾸중하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씻기지 아니하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상관이 없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깊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함께 나눌 수 없다입니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 ‘have no part with me’로 번역이 되었는데,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meros라고 상속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내가 너의 발을 씻지 않으면 너와 나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관이 있다’, 또는 없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여 각 지파 별로 가나안 땅을 상속받는 장면이 민수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레위지파는 상속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민18:20에서 레위지파인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런 유산도 없다. 그들과 더불어 함께 나 눌 몫이 너에게는                                   없다.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네가 받은 몫, 네 가 차지할 유산은 바로 나다.입니다. 바로 이 레위 지파가 받을 상속이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받아도 좋고, 안 받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상속받아야 합니다. 11지파와 달리 레위 지파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받았습니다. 부동산이 아니라, 물질이 아니라 영원하신 생명을 상속 받는 것입니다. 종말의 가치를 품은, 사랑의 발씻음이 바로 이 사랑, 이 상속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받을 것 다 받았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빼고 내 이름 넣어 안홍택 를 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받은 를 잘 지켜 보존하고 계승하며 즐거워하며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네가 차지할 유산은 바로 나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의 본체입니다. 예수님의 는 아버지 하나님에게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끊임없이 아버지의 뜻, 나를 보내신 분,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합니다. ‘가 세상의 담론 속에 속절없이 그 정체가 무너지는 때입니다. 질병과 사업의 실패, 가정의 불화, 이념, 폭력 등 그 속도와 파괴력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 좀처럼 를 살지 못하고 를 사는 것은 아닌지요? ‘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요? 어디 롤 모델이 있어야하지 않나요? 있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로 사셨습니다. 오늘 말씀 19절에서도 예수님은 그 일이, 즉 십자가에 달릴 때에 나는 나인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은 철학이나, 사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상속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아버지 하나님 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포도나무 이야기를 통해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아들 예수님이 아버지 의 말씀을 지켜 아들 로 선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 예수의 가 되고, 우리 역시 말씀을 지켜 나는 나인데, 나의 본질, 나의 정체는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와 아들 예수의 와 그리고 여기 우리 각자의 와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는 사랑으로 같으며, 다른 그러나 조화로운 인데 이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남의 발 씻지말고, 먼저 내 발을 씻으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아무리 세상이 좋고, 세상 가치가 좋더라도, 베드로처럼 사양하지 말고 기꺼이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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