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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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총체성 (성령강림후 스물네번째주일, 2020년 11월 15일)

마중물 | 2020.11.17 13:59 | 조회 760



본문 : 골로새서 1:15-20
제목 : 복음의 총체성

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19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기독교세계관은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칼뱅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개혁주의자들이 이 세상을 설명하고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지침을 설명한 것입니다. 기독교세계관을 설명하는 방식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핵심적인 것이 성경의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주요 내용으로 형성한 창조-타락-구속-완성의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 설교에서는 기독교세계관의 네 가지 프레임 중 타락, 그 중에서도 인간의 타락, 바로 우상숭배에 대한 부분들을 예수님의 복음서에서 인용된 이사야 선지자들의 글을 통해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간단히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제가 ‘장애’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에 ‘차별’이 아니라 ‘다름’의 관점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언어의 한계로 ‘장애’라는 단어 안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포함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시각 장애인’의 내용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신체적인 장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로 인한 영적 장애를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우상숭배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을 지닌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뭔가를 계속 요구하며 우리에게 헛된 보상을 약속해 주는 거짓 신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끊임없이 속삭이는 세속적인 성공이라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저는 기독교세계관의 네 가지 프레임으로 시작한 연속 설교의 첫 번째 시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자신의 것임을 선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오직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본문인 골로새서 1장에서도 이 세상의 주인은 곧 하나님과 그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골로새서 1장 15-16절입니다. 

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유럽 사회는 교회 권력이 하늘을 뚫었던 중세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구사회는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을 두었고,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세계관을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걸쳐 확산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종교의 자리는 인간의 이성에 밀려 구석으로 몰리게 되었고, 종교는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종교와 과학이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의 신앙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에 이원론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의 개혁주의자들로 인해 기독교세계관이라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철학적 체계가 시작된 것도 바로 기독교의 신앙 안에 뼛속까지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신앙의 이원론은 어떻게 우리 주변에 존재하며, 그 이원론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우리가 신앙공동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을 통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상황들은 제가 모태신앙부터 기독교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저의 개인적인 삶을 통해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제가 학생 때 목회자들이나 교회 분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직업을 목회자와 평신도를 구분하여 목회자는 성직이고, 그 외의 직업들은 성직 보다 못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칼뱅은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에 의한 '거룩한 직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이의 직업은 소중하며, 귀천없이 누구에게나 그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직업소명설을 통해 당시 거룩한 직업이라 여겨졌던 성직만 거룩하고 신성한 직업으로서 한정되었던 개념을 모든 직업으로 확대했습니다.

  두 번째 사례는 한때 한국교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기도원 신앙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던 1990년대 초만하더라도 수 많은 기도원들이 있었고, 기도원에서는 며칠간 묵으며 기도에 전념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일상의 생활을 뒷전으로 생각했던 것도 신앙의 이원론이 만들어낸 균형 잡히지 못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 기도원 신앙의 극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1992년 10월 28일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 사건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었는데,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에게는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날 같이 신앙생활을 했던 제 친구는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실 칠판에는 누군가가 영어로 ‘Welcome to Heaven’이라고 크게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기도와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만큼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삶의 열매는 기도의 겸손함을 통해 맺어집니다.

  세 번째 신앙의 이원론이 만든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교회만이 하나님의 영역이고 이 세상은 죄로 물들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시각입니다. 이 세상이 여전히 죄로 물들어 있는 것은 맞지만, 죄로 물들기 전의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기 원하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골로새서 1장 20절입니다.

  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특별히 골로새서 1장 20절은 만물을 설명하면서, 명확하게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 개인의 구원 뿐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들, 그리고 땅에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자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의 회복을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이원론은 우리의 모든 관심을 오직 하늘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의 일들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재림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요한계시록에서 몇 가지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재림 이후에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흐릿하게 그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천년왕국이 있는 것인지, 재림 이후에 천년왕국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천년왕국은 그냥 상징에 불과한 것인지 저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이 세상과 다른 차원의 장소에 새하늘과 새땅이 있다는 내용도 있고, 새하늘과 새땅이 현재의 이 땅에 내려온다는 내용도 적혀져 있습니다. 그런데 근대의 기독교 특히 서구의 기독교 안에서는 어차피 이 세상은 불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돌볼 필요도 없고, 자연보호나 이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것에 대해 무책임한 경향들이 생겼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와 세상은 더 분리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과 구별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런데 교회만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곳을 통치하십니다. 교회만 하나님의 주인이 아니라, 이 모든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현현이시며, 하나님의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과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강조를 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복음서의 내용으로 예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 뿐 아니라, 땅에 있는 것에도 얼마나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신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익숙한 성경구절 마태복음 5장 13-14절입니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이 말씀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팔복과 함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들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세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글 성경으로는 이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들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같은 문학적인 표현처럼 들리거나 요즘 말로 라임을 맞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어성경 뿐 아니라 신약성경이 처음 문자로 기록된 헬라어성경에서는 ‘세상의 소금’에서의 세상과 ‘세상의 빛’에서의 세상이 서로 다른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어 성경인 NIV와 KJV에서는 ‘세상의 소금’은 ‘salt of the earth’로 ‘세상의 빛’은 ‘light of the world’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earth와 world는 완전 다른 단어입니다. 영어 성경대로 번역하면, 예수님은 하늘나라 백성인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지구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세상의 빛’에 사용된 ‘세상’이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두 단어의 뜻은 보다 더 명확하게 구분이 됩니다.   먼저 헬라어 성경에서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부분에서의 세상은 땅을 의미하는 ‘게’라는 헬라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헬라어 단어 ‘게’는 과거 중생대시대 지구에 존재했다는 초대륙 ‘판게아’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즉 헬라어 ‘게’는 어떤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부분에서 ‘세상’이라는 단어로 사용된 헬라어는 ‘코스모스’입니다. 헬라어 단어 코스모스는 원래 그리스어(κόσμος)로 '질서'를 의미하며 '혼돈'을 의미하는 카오스(χάος)의 반대어입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위 만물이 조화롭게, 질서 있게 어울리는 상태를 관념적인 우주로 생각했기에, 곧 우주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헬라어 성경대로 다시 마태복음 5장 13절과 14절을 번역하면, 예수님은 하늘나라 백성인 우리들을 향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너희는 ‘우주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땅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에서는 마태복음 5장과 동일하게 헬라어 ‘게’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하늘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에서는 ‘우라노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내용과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의 내용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하늘 뿐 아니라 이 땅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땅의 것들은 그냥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잘 보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개념이 개인 영혼의 구원으로만 한정되어 사용되고 있어서 새로운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설교제목인 ‘복음의 총체성’입니다. 

  복음의 총체성, 총체적인 복음에 대해 총신대학교 김광열 교수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총체성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영혼구원과 교회부흥과 함께, 사회적 회복을 위한 사명도 있다. 우리는 천국입성을 위해 개인적인 영적 훈련에 집중하는 일과 함께, 우리의 지역사회 그리고 조국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확인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일도 사명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엊그제인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의 사망 50주기였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관에 혼자 남아 많이 울다가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전태일의 일기 중 한 부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이 어린 자녀들은 하루에 16시간의 정신, 육체노동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마는 그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당시 청계천 공장들을 소유하고 있었던 부한 자들 중에서는 분명 기독교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현실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고통은 외면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 이후에도 한국기독교는 전태일을 자살한 죄인이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낙인 찍었습니다.
  
  CBS에서 이번에 전태일 50주기 기념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영상 초반에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 당시 강원용 목사님의 ‘밀알 하나’라는 설교의 육성 녹음이 소개됩니다.

  “스물세 살의 젊은 몸을 자기 주위에서 시달림을 당하고 천대 받는 이웃을 위하여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다가 최후에 아무것도 할 길이 없는 때 자기의 몸을 불살라가면서 호소를 하고 죽어간 그가 죄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딱지를 붙여놓고, 교회 문을 잠그고 들어가 버린 그들이 죄인입니까. 어느 쪽이 죄인입니까? 
  이 비참한 상황은 어떤 사람이 픽션으로 쓴 소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1970년 11월 바로 이 현실 속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슴 속에 메아리치고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어떤 분노를 느끼고,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어떤 죄책감을 느끼고,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밀알 하나가 아니라 이미 돌멩이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땅의 소금’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서 그 맛을 잃지 알아야 합니다. 맛을 잃으면 밀알이 아니라 돌멩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기독청년 전태일의 죽음으로 어머니 이소선씨는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소선 어머님은 자신의 뜻을 이어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평생 간직하며 늘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청계피복노동조합이 형성되고 이 노조를 중심으로 한국의 노동운은 새로운 국면기에 접어듭니다. 70년대의 노동운동이 여러 시행착오들을 거치면서 결국 80년대 민주화운동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연 복음이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아직 복음의 본질을 다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제 몸이 다시 부활되었을 때 그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합니다. 만약 복음이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복음으로 불려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후 9일 뒤인 1970년 11월 22일, ‘참회와 호소의 금식기도회’가 새문안교회에서 열렸습니다. 그 기도회 때 사용된 ‘우리는 왜 금식기도회를 하는가’라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금식기도회를 하는가.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무서우신 분이라는 우리의 신앙을 만천하에 입증하기 위하여 한다. 우리는 고 전태일 선생의 분신자살은 스스로가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사회가 그를 죽인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기독교인들도 공모자이기에 우리의 잘못을 참회하기 위하여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글을 제가 기도문으로 바꿔 보았습니다. 이 기도로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무서우신 분이라는 우리의 신앙을 만천하에 입증하기 위하여 금식기도회를 합니다. 우리는 고 전태일 선생의 분신자살은 스스로가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사회가 그를 죽인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기독교인들도 공모자이기에 우리의 잘못을 참회하기 원합니다. 
  더불어 현재의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으며, 직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들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그들의 노동여건이 개선되게 하여 주시고 한국교회가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연대하며 노동문제를 해결하게 해 주세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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