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성령강림 후 열아홉번째 주일. 2020년 10월 11일)

마중물 | 2020.10.15 11:09 | 조회 860
본문 : 마가복음 8장 17-25절
제목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17 예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너희가 빵이 없는 것에 대해서 수군거리느냐?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굳어졌느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다섯 개의 빵을 오천 명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너희가 남은 빵을 몇 광주리에 모았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열두 광주리입니다."
20 "일곱 개의 빵을 사천 명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너희가 몇 광주리에 거두었느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일곱 광주리입니다."
21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22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새다로 갔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지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23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리고 손을 그 사람에게 얹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24 그러자 그 사람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보입니다. 마치 나무가 걸어다니는 것 같습니다."
25 다시 예수님께서 손을 그 사람의 눈에 얹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쳐다보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시력은 회복되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제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관점에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은 자신의 명상록 ‘팡세’를 통해 인간의 본성은 “우주의 영광이자 쓰레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영광과 쓰레기는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개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인간의 내면에서는 매우 가깝게 접해있습니다. 백지장 하나 차이처럼, 때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쓰레기의 모습과 영광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간 안에 있는 쓰레기와 영광, 이 두 가지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것은 즉,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우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우상은 완전 반대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늘 이 두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한 손으로 하나님을 한 손으로는 우상을 붙잡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두 번째 계명은 모두 직접적으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출 20:3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마라.
출 20:4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마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로 물 속에 있는 것의 그 어떠한 모양도 만들지 마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상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놀랍게도 사복음서에서는 ‘우상’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사복음서 이후에 나오는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에서는 고린도전서에서 약 12번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사복음서를 제외한 신약 전체에 우상이라는 단어가 비교적 고르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들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 사랑, 용서, 죄의 회개, 구원 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사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 중에 ‘우상’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우상숭배에 대해 상당히 강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8장도 대표적으로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종종 다른 목사님의 설교나 신앙서적 등을 통해서 ‘영적 소경’, 즉 ‘영적으로 시각장애자’라는 표현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영적 소경’이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을 비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두 명의 소경의 이야기가 마가복음의 흐름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주제별로 크게 3개 또는 4개로로 나눕니다. 만약 3개로 나눈다면, 첫 부분은 처음부터 오늘 우리가 읽은 막 8장 26절까지이고, 두 번째 부분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0장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낫게해주신 이야기까지가 두 번째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읽은 뱃새다에서 만난 시각장애자는 마가복음의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을 연결시키고 있고, 시각장애자 바디매오는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을 연결해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때문이 이 두 가지 치유사역은 단순히 시각적인 치료를 해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다 더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 예수님은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라며 질책하십니다. 이 질책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하는 질책입니까?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질책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질책하십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늘의 본문 바로 전인 마가복음 8장 14-16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는데, 제자들은 현재 자신들이 빵 하나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현실에 대해 수군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전하셨는데, 여전히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빵의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 17-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째서 너희가 빵이 없는 것에 대해서 수군거리느냐? 너희가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굳어졌느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여러분은 우상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성경 속에서 우상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절하지 않았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신상이 떠오르시나요?
  아니면 출애굽기에 나온 이집트의 각종 신들과 파라오의 신상이 떠오르시나요?
  어쩌면 가나안 사람들이 광신적으로 빠져 있었던 바알과 아세라 신상이나 블레셋 사람들이 숭배했던 다곤 신상을 떠올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로마시대의 황제의 동상이나 조상신들의 조각상들도 있었습니다.
  
  이 우상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특정한 형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 2계명을 통해 ‘우상의 그 어떠한 모양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우리가 아는 우상들은 모두 사람같은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들은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입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상들은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입은 있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껍데기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8장 18절,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는 거짓 우상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질책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도 이와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로 마가복음 4장입니다. 마가복음 4장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비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는 마가복음 4장 1절부터 20절까지는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샌드위치 구조’는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문학적인 구조입니다. 샌드위치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햄 샌드위치, 햄에그 샌드위치, 샐러드 샌드위치 등 샌드위치 속에 들어가 있는 식재료들로 그 이름이 붙여집니다. 식빵은 그냥 샌드위치를 구성하는 형식일 뿐이고, 샌드위치의 핵심은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식재료가 결정합니다.  

  성경의 샌드위치 구조에서도 병행되는 2개의 이야기 사이에 있는 것이 핵심 메시지가 됩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1절부터 10절까지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4장 11절과 12절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고, 다시 13절부터 20절까지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비유가 있고, 비슷한 분량으로 해석이 있는데 그 사이에 두 절의 말씀이 마치 샌드위치 속재료처럼 끼워져 있습니다. 이 딱 한절의 말씀, 마가복음 4장 11절과 12절이 이 전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핵심 구절에 해당됩니다. 마가복음 4장 11-12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1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게 하였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주어진다.
  12 이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12절 말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게 하기'위함이다. 마가복음의 이 부분만 바라보면 해석상 오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사야서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를 부르시면서 이사야에게 주신 소명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사야 6장 8-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8 그 때에 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갈까?" 내가 말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9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서 2장에서는 당시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상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6 주께서 주의 백성, 곧 야곱 집안을 버리신 것은 그들이 동쪽 나라의 못된 풍습을 따르고, 블레셋 사람들처럼 점을 치고, 이방인의 풍습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7 그들의 땅에는 은과 금이 가득하고, 보물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의 땅에는 말이 가득하고, 전차도 셀 수 없이 많다.
 8 그들의 땅에는 우상이 가득하고, 백성은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에게 절하며 그것을 섬기고 있다.
 9 사람마다 모두 천하고 낮아졌으니, 주님, 그들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6절의 ‘동쪽 나라’는 이사야 시대에서는 앗시리아 제국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출애굽의 시점에서 보면 현재 이스라엘이 정착하고 있는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사야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들을 섬기고, 유대와 예루살렘에 자기 손으로 만든 우상들이 가득하고 그 우상들에게 전하고 있는 참담한 내용들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에서 이사야는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에대해 ‘용서하지 마십시오’라며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2장 17-18절은 이렇게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들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7 그러나 우상을 의지하고 우상을 향해 '당신들은 우리의 신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18 "듣지 못하는 사람들아, 들어라. 보지 못하는 사람들아, 잘 보아라.”

  이런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오늘의 본문은 살펴보면 이것은 단순히 시각장애인을 치료해 준 사건이 아니라, 우상숭배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경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런 껍데기 우상들을 만드는 것일까요?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신상은 정치적인 권력이 투영된 우상이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와 신들의 우상들은 종교 권력이 인간의 마음에 투영되었고, 바알과 아세라는 당시 농사와 풍요를 주관하는 신으로서 인간들의 경제적 욕심들이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경 속 모든 우상들은 인간의 욕심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과 우상숭배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항상 우상숭배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신앙인들의 문제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뭔가에 집중하고 노력하면 그 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식으로 통합니다. 우리가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기대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시지만, 그에 대해 우리에게 보상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혹자는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니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자칫 이러한 합당한 삶이 우리에게 요구를 하기 시작하면, 이것은 종교 우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신이 원하고 있으니, 너희들은 순종하고 따라와야 한다’라는 말은 종교권력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당위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오직 우리의 자발적인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셨으니 우리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합니다. 절대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해서는 안되며, 신앙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대로 자발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교회를 위해 수고했으니,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이 부족하면 자신이 믿은 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때 “헌금을 해라 그럼 하나님께서 갑절의 은혜를 주신다”고 설교하는 일부 부흥사들은 이렇게 기독교를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와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구분합니까?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우상숭배에 빠지기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믿는 대상인 하나님과 바라보지 말아야 할 우상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더 나은 삶과 성공을 위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믿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요구를 하는 신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쉽게 말해 선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절이 오면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만약 어떤 부모가 사랑스런 자녀를 위해 성탄절에 선물을 준비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자녀가 행복하게 선물 포장을 뜯고 선물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제가 얼마를 드려야 하나요?”

  제가 어렸을 적, 부모님께 용돈을 올려달라고 떼를 쓸 때에, 부모님이 저 한명을 양육하면서 사용되는 돈을 액수를 대략 말씀해주시면 적이 있습니다. 숙박비, 학교 수업료, 식비, 저를 위한 학용품이나 생필품 등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을 대략적으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부모님의 설명을 듣고 아 나는 이렇게 많은 빚을 지고 살고 있구나...   이것을 빨리 갚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청소년기를 살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님의 은혜는 은혜대로 받고 살아야지 그것을 자본주의식으로 계산해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저의 삶에 기쁨이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갑니다.   시편 135편의 기자는 우상숭배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135편 15-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5 모든 나라의 우상들은 은이요, 금이며,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은과 금입니다.
  16 우상들은 입을 갖고 있지만, 말을 할 수 없으며, 눈을 갖고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17 그들은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으며, 그들의 입에는 숨도 없습니다.
  18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우상과 같습니다. 우상들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을 닮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또 주변에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계속해서 요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요구는 더 큰 요구를 낳고, 요구가 계속되고 구조화되면 착취가 일어납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의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자신과 관계를 맺습니다. 

  자신이 현재,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상은 우리에게 쾌락을 주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십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있습니까? 기쁨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은 정체되어 있습니다. 만약 기쁨은커녕 신앙생활이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뭔가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오히려 우상숭배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계속 요구하는 신, 즉 우상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주십니다.
 
  마가복음은 두 명의 시각장애자가 눈을 뜬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 소경의 이야기 즉,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우상숭배로 눈이 가리워진 사람들이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참 기쁨이 생깁니다. 

  마가복음 10장은 또 다른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해 주길 원하느냐?" 보지 못하는 자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52 예수님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즉시, 그는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우리도 벳새다의 시각장애인처럼, 바디매오처럼 온전히 주를 바라보고 우상숭배로 눈이 가리워지는 일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참 신앙을 알게됩니다. 참 신앙은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9/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492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865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220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811 2005.09.02 16:30
815 벅찬 희망으로 기다리자!(성탄절후첫번째주일, 12월27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11 2020.12.27 14:10
814 지혜의 강줄기가 다다른 곳(대강절네번째주일, 12월20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92 2020.12.19 18:19
813 이보다 더 힘찬 발걸음이 있나!(대강절세번째주일,12월13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889 2020.12.12 19:02
812 잠에서깨어나야할때! 2(두번째대강절주일,12월6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94 2020.12.05 17:16
811 잠에서깨어나야할때(첫번째대강절주일, 2020.11월2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75 2020.12.01 07:21
810 복음의 총체성 (성령강림후 스물네번째주일, 2020년 11월 15일) 사진 첨부파일 마중물 760 2020.11.17 13:59
809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성령강림후 스물두째주일, 2020년 11월 1일 사진 첨부파일 김현식 731 2020.11.05 17:04
808 한결같은...감사(성령강림절후스물한번째주일,2020년10월25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768 2020.10.25 13:33
807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강림후스무번째주일, 2020년10월18일) 사진 첨부파일 sikiryou 995 2020.10.22 00:37
>>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성령강림 후 열아홉번째 주일. 2020년 10 마중물 861 2020.10.15 11:09
805 불가능으로의 열정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 2020년 10월 4 사진 첨부파일 만지다 788 2020.10.06 08:52
804 요나가 스페인으로 간 이유는 (성령강림절 후 열일곱째 주일, 2020년 사진 첨부파일 김현식 1258 2020.10.03 23:32
803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을 보라!(성령강림절후열여섯번째주일,2020년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173 2020.09.20 15:19
802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통치 (성령강림 후 열다섯번째 주일. 2020년 9 사진 첨부파일 마중물 969 2020.09.13 23:49
801 영적으로 깨어 분별하십시오 (성령강림후 열네번째주일, 2020년9월6일) 사진 첨부파일 sikiryou 957 2020.09.11 21:53
800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 합니까(성령강림후 열세번째 주일, 2020년 8월 사진 첨부파일 만지다 858 2020.09.04 15:52
799 그발 강가에서(성령강림후 열두번째 주일, 2020년 8월 23일) 사진 첨부파일 김현식 1234 2020.08.25 23:14
798 더 중요한 것(성령강림후열번째 주일.2020년8월9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바람 899 2020.08.15 21:15
797 예수님의 필요충분조건(성령강림후아홉번째주일 2020년 8월 2일 사진 첨부파일 윤채아빠 830 2020.08.15 19:05
796 "보았다. 이제, 듣고 지키면...될 것이다"(성령강림 사진 첨부파일 sikiryou 1097 2020.07.26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