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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사는것이아니라,아는것 (종려주일, 2022년4월10일)

하늘기차 | 2022.04.10 15:27 | 조회 412

        영생 : 사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종려주일                                                                                                                        요3:5-8;17:1-7

   장 그르니에라는 유명한 작가의 이라는 책을 지난 글쎄다에서 읽었습니다. ‘에서 그루니에는 인도의 종교와 정신 세계에대해 동경합니다. 섬의 첫 장 제목도 공의 매혹입니다. 이 공이 빌 공()입니다. ()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그리고 인식론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무의식의 저 넘어를 지향하는 데, 인도에대한 이야기에서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카스트 계급제도를 당연시하는 것은 인도인들의 생각, 무의식, 삶의 구조가 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 세속과 실제를 뛰어 넘는 삶의 역사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인도를 동경하여 그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평생 종으로 사는 구조 속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영혼의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무와 실제의 사이에서의 우울함이 책 전체에 감상적으로 깔려있는데,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처럼 창작의 원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우울함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과 떨림이 생각났습니다. 우울함이 어느 경계의 자리에 갖힌 감정이라고 한다면, 두려움과 떨림은 자유함, 자발적인 머리숙임, 피조자 스스로 창조자의 은혜, 섭리에대한 신뢰로부터 오는 자유하는 평화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나는 피조자로서 헤세드, 즉 하나님과 나 사이의 신뢰가 나의 신앙이라는 생각에 머물며, 오늘 3절 말씀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아마 그루니에는 서구적 인식구조와 인도의 종교적 의 매혹 사이에서 무한한 것, 그러니까 영생은 무엇인가라는 사색에 젖어, 나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 것이라고 풀어내지 않았나 라는 한계를 보며 속으로 나는 나, ‘가 아니라는 분명한 자기 고백을 해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니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인 나는 나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발현입니다.

   일본 어느 초등학교의 오세이 교장 선생님에대한 다큐를 본 기억이 납니다. 오세이교장은 말기위암으로 위를 절제하였고, 늘 링겔주사를 맞아야하고 주말에는 꼼짝말고 쉬어야하는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아 길면 6개월정도 살 수 밖에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분이 암 말기에 교실에 들어가 링겔을 맞아가면서, 그 링겔 병을 손수 들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인생에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는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라는 것을 그림동화 '오소리의 이별 선물'을 통해 자연 스럽게 가르칩니다. 오소리는 죽었지만 여우에게는 넥타이를 직접 매주면서 넥타이 매는 법을, 두더쥐에게는 가위질 하는 법을, 그리고 개구리에겐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켜 주었습니다. 이들은 오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빵굽는 향기에서, 멋진 넥타이에서 오소리를 느낍니다. 오세이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묻습니다. 오소리는 죽었지만 함께했던 다른 동물들과 연결되어 친구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냐구 물어봅니다. 오세이 선생은 매일 약해져가는 자신의 몸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몰려오는 공포감까지 그대로 자연스럽게 보여준 것입니다. 다큐는 두려움 이면에 있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한 진실한 개인의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학이 시작되었는데, 아이들에게 방학이 끝나고 내년 1월 달 개학 때 다시 보자고 하였는데, 끝내 오세이 선생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는 이 틀 후에 세상을 달리합니다. 그는 그의 삶 속에서 영원한 삶을 살았습니다. 영생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지금 내가 살아있는 동안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 살며 그러한 삶의 영향이 함께했던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일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육신의 일을 다하고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생명 가치에 소중함을 알고 그 생명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산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죽음으로 인정하며 산 것이니까요.

 

     그런데 성서는 영생에대해 다르게 말씀합니다. 제가 신대원 제학시절에 읽으며 소름이 돋았던 말씀입니다. 17:3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통상 시간적으로 무한하고, 그래서 무위자연의 장자는 그 무한 개념을 붕이라는 새의 날개짓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발상의 전환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라 합니다. 3:3에서 이스라엘의 랍비요, 공회원인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말 꼬리가 잡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안다고 하며 기적이 그 증거라고 합니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3:12에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면서 안다에서 믿는다로 전환을 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에대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안다고 하였지만 하늘, 기적에대하여 서두를 꺼내는 종교적인 언어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식으로 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직도 확장되는 저 우주 넘어 하나님은 우리 인식체계 밖이어서 우리의 어떤 의식 구조나 종교행위로도 접근이 불가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넘어에서 온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바랄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통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아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고 누차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합니다. 니고데모가 처음 예수님에게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안다고 할 때, 예수님은 이 말을 받지 않고, 전혀 다른 이야기의 프레임을 짭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SF영화 매니아입니다. 지난 주에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2049를 다시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상징이 가득한데, 제가 느낀 중요한 포인트는 인조인간인 리플리컨트(Replicant, 복제)가 인간과 모든 감정, 생각 등이 똑 같은데, 다른 것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리플리컨트는 영화에서 계속 그 한계점에 우울해 하고, 인간이기를 갈망하는데, 인조인간이 아이를 낳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인조인간이 인간에대하여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영화는 지구의 생명체가 거의 사라져 다른 행성으로 이주한 때에 리플리컨트가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을 폭로합니다. 리플리컨트를 통해 인간이 못나누는 인류애, 평화를 보여줍니다. 하여간 이 영화는 인간과 인조인간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태어났느냐? 만들어졌느냐?인데 예수님이 니고데모와 대화하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이 더 와 닿았습니다.

   오늘 말씀 17장은 통상 승리의 기도, 제사장의 기도, 영광의 기도라고 합니다. 1-5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6-19는 이 땅에 남아있을 제자들, 그리고 20-16은 제자들을 통해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7절과 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고, 믿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부활 이전 까지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근데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안다고 합니다. 어떻게 안다고 할까요? 예수님은 지금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믿음을 고백할지를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아뢴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믿음의 교회 공동체가 세워질 것을 예수님은 본 것입니다. 즉 아들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에게로부터 온 구세주인 것을 제자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6절에 보면 아버지 말씀을 지켰다고 합니다. 8절에서는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준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했는데, 그 말씀을 받았고 그래서 알았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고 받고 지킬 수 있어서 믿는 자리에 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3장에서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럼 어머니 뱃 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것은 바람과 같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 하면서 땅에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듣지 않거든 어찌 하늘의 일을 말하면 믿겠느냐 하며 일갈을 하셨습니다. 말씀은 눈으로 읽기도 하고, 기도는 마음으로, 또는 입술로 읍조리기라도 하지만, 성령의 감동은 보이지 않아서 섬세하게 느끼지 않으면, 아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감동으로 나에게 다가오는데, 그냥 세상의 소음에 묻혀버리기 십상입니다. 말이 많아지고, 소리가 커지고, 세상의 방법으로 살고자 하면 자기 생각과 의지로 신앙합니다. 제일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기도함을 통해 세상에 묻힌 내 영을 발현시켜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말씀 없이, 기도하지 않고 예배에 온전하지 않으면 종교이거나 신념일 수는 있어도 신앙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 초보 신앙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요? 세상의 것을 떨치고 예배, 말씀,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렇게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영적 감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사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어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영생은 힌두이즘이나 부디즘의 몇 겁, 윤회 같은 무한한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고, 지금 여기 이 땅에서의 호흡을 이야기합니다. 죽은 후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 넘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주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성령의 감동으로 신앙하지 않으면, 니고데모처럼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성령의 바람이 불지 않으면 성도는 성도일 수 없고,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종교집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꾸 살려구 하니까요? 사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 믿는 것,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부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임하신, 세상을 창조할 때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아들 예수와 함께하신 진리의 성령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할 때 자기 고집 부리지 말고, 모른체 하지 말고, 성령의 감동이 나에게 올 때 아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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