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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이야기 1(두 아들의 이야기,2005년9월25일,성령강림절후열아홉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5.09.25 17:23 | 조회 2624
두 아들의 이야기

2005년9월25일(성령강림절후열아홉번째주일) 마21:28-32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한 아버지가 “예들아,너희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해라!”그러자 큰 아들은“예 가겠습니다.아버지!”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그런데 둘째 아들은“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그러나 그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습니다.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는가?”하고 묻자 사람들이“작은 아들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첫 번째 절인 28절을 보면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어떤 상황이 벌어졌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바로“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예수님이 묻고있는데,여기서 너희는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 계십니다.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신지 이틀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처음 성전으로 가셔서 성전의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그리고 성경에 보면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 째 날에도 역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셔서 가르치실 때에 바로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장로들이 와서 물으신 것입니다.“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함부로 이런 일을 하는가?”쉽게 말해서 시비가 붙은 것입니다.시비하는 중에 오늘 본문 말씀의 첫 마디가“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 것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는 누구입니까?하나님입니다.그럼“네 가겠습니다.”하고 가지 않은 큰 아들은 누구입니까?바로 유대인들,오늘 예수님께 시비를 건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장로들,그리고 바리새인,서기관들입니다.그러면“싫습니다!”하고서는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일하러 들어간 작은 아들은 누구일까요?바로 31절 말씀의 세리와 창녀,그 당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이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아들의 이야기를 마치면서“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 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세례 요한이 너희들에게 와서 옳은 길을 보여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마21:28-31의 말씀의 시작은 바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라고 시비를 걸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물어봅니다.하늘에서부터 일까요?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하늘에서 라고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라고 하자니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는데,그 요한을 체포하여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권한을 물으면서 시비를 걸자,오히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역공을 한 것입니다.“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아는가?”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푼 권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요단강에서 낙타 옷을 입고,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온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때,요한복음 1:19이하에서 보면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네가 누구냐?”한 4,5번 정도를 집요하게 요한에게 누구인지를 물어봅니다.그리고는 네가 엘리야도 아니고,선지자도 아니고,그리스도도 아니면서 어째서 세례를 주느냐고 묻습니다.다시말해서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아마도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세례 요한의 세례 베푸는 것이 어디서 오는 줄도 모르면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것입니다.이러한 시비는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에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모세가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싸움을 말렸을 때에도 ‘네가 뭔데 우리 일에 끼어들어’합니다.또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에도 유대인들은“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묻습니다.이 것은 모두 기득권에대한 물음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양대 율법학파가 있었는데,보수적인 샴마이학파와,진보적인 힐렐학파가 있었습니다.행22:3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기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힐렐이 바로 가말리엘의 조부입니다.당시 가말리엘은 유대인들에게 크게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그러니까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그리고 예수님에게 권한에대해 묻는다는 것은 쉽게 말해 어느 줄에 서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그러나 예수님도,요한도 어느 집단에 속해 있지 않은 자유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도 이들에게 나도 내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이렇게 지혜롭게 유대인들의 시비를 벗어나시면서 예수님은 다시 유대인들에게“그러나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면서 오늘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제 추수할 때가 다가옵니다.농사 중 가장 바쁠 때가 추수할 때입니다.추수 때에는 정말 한 사람 일 손이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이럴땐 온 가족이총 동원됩니다.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에는 포도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어느 곳을 가나 포도원이었을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포도원을 비유로 사용 하셨습니다.이 두 아들의 비유를 끝 마치시고 바로 포도원과 소작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그 앞의 20장에서도 포도원일꾼을 구하러 나간 주인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려주셨습니다.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도 있고,청년들도 있지만,“예들아!오늘 밭에 가서 잡초를 좀 뽑자!”,“오후에 고추 좀 따자!”,“농약 좀 치자”,“냇가에 가서 모래 좀 한 경운기 퍼 올리자”하면 어떨까요?“예”하고는 안하든지,“싫어요!”하고는 하든지 두 아들 중에 어느 쪽에 속할 까요?

오늘 본문 말씀 중에 예수님은 두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시고서는“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였을까요?큰 아들일까요?둘째 아들일까요?여러분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했을까요?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보면 어떤 때는 첫째 아들처럼,어떤 때는 둘째 아들처럼 합니다.그렇죠!그러면 여기서 누가 더 동정표를 많이 얻을 수 있을까요?예수님께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고 묻자 그들이 “둘째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이“둘째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님은 “네 말이 맞다.”라든지,“옳다”라고 긍정을 하든지,아니면“틀렸다”고 부정을 하는 말이 없습니다.저도 역시 둘째 아들에게 점수를 주고 싶은데,예수님의 관심은 했다,안했다에 있지 않는 것같습니다.

집에 있으면 아이들과 종종 입 씨름을 하게 되는데,부모의 입에 늘 달구다니는 말이 있습니다.“해라!”,또“하지 마라”입니다.또 아이들도 “안해”,“싫어”가 입에 달려있습니다.어릴 때야 그런데로 부모의 말을 따르지만 머리가 커져 스스로 판단할 때가 되면 조금씩 삐딱선을 탑니다.엄마 입장에서 삐딱선이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이제 청소년기로 접어들고 청년이 되면 자의식이 싹트고,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어 가는데 부모의 해라!하지마라!가 먹혀들어가지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어저께도 준영이가 새로 산 공을 학교에 가지고 가길레“이제 또 잊어버린다”고 한 마디 하다가 집사람에게 핀잔을 들었습니다.자꾸 습관적으로 우리는 주로 부정적인 판단을 잘 합니다.그런데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을 할 때,“하라!”,“하지 마라!”하지 않고,가르칠 것을 이야기로 풀어서 말한다고 합니다.예를 들어 잠5:18을 보면 아내 사랑에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네 샘이 복된줄 알고,네가 젊어서 맞은 아내와
더불어 즐거워 하여라.”

고 하면서 앞으로 결혼하여 함께할 여인을 샘으로 비유합니다.샘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깨끗한 바가지를 사용하고,샘을 오염시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그러면 평생 맑고 깨끗한 물을 떠서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가정에서의 아내의 역할의 중요성을 잘 말해 줍니다.

그런데 웃자는 이야기이지만,그 속에 진담,농담이 반반씩 섞여 있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요즘 신혼이혼 문제가 적지 않게 화두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부모가 자식에게 어떻게 가르치냐 하면 신혼여행가서 군기 잡지 못하면 평생 고 생한다고 가르칩니다.꽉 잡으라고 가르칩니다.잠언5:3,4에 보면

“음행하는 여자의 입술에서는 꿀이 떨어지고,
그 말은 기름보다 매끄럽지만,그것이 나중에는
쑥처럼 쓰고 두 날을 가진 칼처럼 날카롭다.”

고 합니다.큰 아이들에게 홍등가,여자 있는 술집에 “가라!가지 마라!”가 아니라,“야!큰 아이야!”너 그 이쁜 여자의 입술이 꿀을 떨어뜨리는 것 같지만,나중에는 그 입술의 꿀이 날카로운 칼이되어 너의 뱃 속을 다 찢어놓을 꺼야,그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래?라고 말 해 준다면 어떨까요?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훈계할 때 직선적입니다.그래서 아이들의 자존심을 팍팍 깍아내립니다.자식이 부모와 친구가 아니라 원수입니다.예를들어“술 마시지 말어!”하지 말고 술은 “네 속에 들어가서 독사가 되어,독을 뿜어낼 것이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주님은 “하라!”,“하지 마라!”하지 않으십니다.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두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무엇을 말씀해 주시려 하는 걸까요?둘 중에 누가 잘 했나,못 했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주님의 관심의 초점은31절의 말씀 처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기 원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마치 부모가 “하라!”.“하지 마라!”하지 않고,이런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를 할 때에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마음으로 헤아리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천국이요,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일까요?가만희 본문을 보니까 아버지의 뜻은 29절 뒷 부분에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뉘우치고 일하러 갔다.’고 합니다.그냥 일하러 간 것이 아니라 ‘뉘우쳤다’는 것이 중요 합니다.

이렇게 복음은 앞의 접두어나 부사가 참 중요합니다.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할 때도 그냥이 아니라 ‘먼저’입니다.나중이나 중간이 아닙니다.기뻐하라고 하는데 그냥 기뻐하라가 아니라 ‘항상’기뻐하라는 것입니다.기도하는데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쉬지말고’기도하라고 합니다.‘항상’이라는 말을 24시간으로,양적으로 받아들이면 이 것 또 곤란하지요,잘 되고 좋을 때만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시험이 오고,곤고할 때에도 기뻐하라는 것이지,24시간 어떻게 기뻐합니까?어떻게 싱글벙글할 수 있나요?실없는 사람,정신병원에 가야지요,또 쉬지말라고 하는데,이 것 역시 양적으로 24시간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일이 잘 될 때,어느 특정한 사건이나 시간이 아니라,일이 잘 되든 못 되든 상황에 구애받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뒤의 말 보다는 앞의 말이 더 귀합니다.오늘 말씀도 일하러 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뉘우쳤다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러니까 두 아들의 이야기는 누가 잘 했느냐,못 햇느냐에대해 촛 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늘 누가 잘 했느냐,못 했느냐,그래서 열심히 잘 했는데 인정 받지 못해서 섭섭하다,아니면 그래 내가 못 했는데 어쩔래 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 앞에 누가 뉘우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옳은 길을 보여 주었으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 하였다”고 합니다.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이 믿었다고 합니다.32절 마지막 말씀에“그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가 큰가 하는 제자들의 질문에 진정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냥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 하지 않으시고,‘돌이켜’라 합니다.믿고자 하면 뉘우쳐야 합니다.믿음의 축복,믿음의 은혜를 입으려면 그 자리에서 돌아서야 합니다.뉘우침 없는 기도,봉사,찬양,말씀,아니 우리의 삶의 전체에 뉘우침이 없으면 그 어느 것도 신앙이 아니고,하늘 나라의 축복일 수 없습니다.신앙인 척 할 수는 있어도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뉘우침입니다.바로 이것이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뉘우침이 있기를 바랍니다.그래서 그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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