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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다하는 죽음(2006년 2월26일,변화 주일)

하늘기차 | 2006.02.26 13:58 | 조회 2240
뜻을 다하는 죽음

2006년 2월26일(변화 주일) 눅9:28-36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여드레 째 되어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다고 하면서 변화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이 말씀하시고 여드레 쯤 되었다고 하는데,그럼 무슨 말씀을 한 뒤 여드레 째가 된 것일까요?

8일 전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봅니다.“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그러자 베드로가“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합니다.그리고 그 때부터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대해 말씀하십니다.그동안 감추었던 메시야 비밀을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드러낸 것입니다.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 사역에 있어서 한 분기점이었습니다.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에 예수님은 오늘 말씀처럼 변화산에 올라 가셨는데 이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제 손윗터 의열씨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그런데 병원에서 고칠 수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답답하기도 하고,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했습니다.아직도 젊은데 어떻게 이렇게 건강이 악화되었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들었고,한 편 이 나라는 사람들 살기에 참 힘이드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도 죽음에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그런데 야이로의 딸,나사로,나인성과부의 외아들 같은 사람들은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 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우리 의열씨도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아직 젊은 두 애기의 아빠인데,참 안타깝습니다.죽음은 모든 피조물에게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반드시 맞아들여야할 사건입니다.그래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하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재 작년 김동선,동건 목사님의 아버님 김치영 목사님도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당신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마지막까지 감사로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죄가 잉태한 즉 욕심을 낳고 욕심이 잉태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는데,이 사망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연수를 다 할 때에 육은 흙으로 돌아감으로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그러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주님 다시 오실날에대한 소망을 품고 죽음을 받아들이며,부활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죽음은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육은 흙으로 영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한 과정일 따름입니다.그러니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감사와 은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렇게 죽음이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하게 오는 경우도 있는데,성경에 보면 모세의 경우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그렇게 염원하던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을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내려다 보면서 들어가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그리고는 그 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그런데 모세가 죽을 때의 나이가 120세 였는데,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기력은 정정하였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그러니까 모세가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기력이 다 되어 눈도 보이지 않고,다리도 힘이 다하고,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몸이 아니라 아직도 청년의 기백을 그대로 간직하였다는 것입니다.아직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어떻게 보면 가장 귀중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지금 예수의 모습은 실제 인기가 최고로 오를 때로 오른 때인데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죽음을 이야기 하고 또 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변화산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왜 한창일 때에 그가 뿌린 것을 거두어 드리려 할 때,죽어야 하는가?아니 기력이 다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모세도 예수도 본인 스스로는 아직 아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입니다.그런데 이 죽음은 뜻을 다 한 죽음입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하신 말씀 중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그렇습니다.예수의 죽음은 다 이루신 죽음입니다.그런데“다 이루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양적인 의미의“다 이루었다”는 아닙니다.이것은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십자가의 죽음을 주께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쉽게 이야기 해서,오늘 날로 치면 기업도 세우고,강의도 나가고,정치도 하고,언론에도 종사하고,말씀도 전하고,교회도 세우고 하는 것이 아니라,한 가지 딱 한 가지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그 죽음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뜻을 다한 죽음인 것입니다.

모세의 죽음도 그렇습니다.아직도 시력을 잃지 않았으며,기력이 청청한 모세이지만 모세는 뜻을 다하였고 그래서 죽어야 했습니다.왜냐하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이스라엘의 광야 길에 있어서 특히 어려웠던 것 중의 하나가 물이었는데,므리바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역시 그 곳에서도 물이 떨어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스러워 하며,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과 시비를합니다.아마도 이 므리바에서 원망과 시비가 가장 거셌던 것 같습니다.가장 온유하다고 하는 모세가 이 번 만은 견딜 수가 없었던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한 말을 그대로 이행하지 않았습니다.민20:10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면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 쳤다고 합니다.그러자 물이 나와 사람과 가축이 그 물을 마셨다고 합니다.그러나 민20장 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합니다.그러나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그 것도 2번을 침으로써 불순종합니다.1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아니하여서 가나안 땅에 이들과 함께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명령인 것입니다.신명기서의 앞 쪽 3장25절에서도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에대해한 안타까움이 기록되어 있음을 봅니다.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십시오.그래서 요단 저 쪽 아름다운 땅과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이 것으로 네게 족하니,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고 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가나안 땅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느보산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의 모세의 건강은 청장년의 건강상태였습니다.그러나 모세는 그 건강함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하나님은 모세에게“이것으로 족하니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 합니다.”이 기도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가능하면 십자가를 피하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예수님의 처절한 기도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모세도 모두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자신의 요구,간절함이 있었지만 그 뜻 앞에 자신을 버리고 있습니다.사도 바울도 자신의 질병을 고치고자 하나님께 3번 씩이나 간절히 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대하여 가르칠 때에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찿으라 찿을 것이요,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도,모세도,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들이 구하는 것을 받았을까요?못 받았을까요?그렇습니다.이 세 분은 모두 하나님께 기도의 응답을 온전히 받았습니다.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간구가 긍대로 이루어지는 것 뿐만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그리고 그 뜻을 내가 다시 받을 때 그것이 바로 응답이고,그 응답이야 말로 우리에게 생명이요 구원의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그러한 면에서 예수나 모세의 죽음은 단지 인간의 수를 다 한 것이 아니라‘뜻을 다한 죽음’입니다.

이렇게 뜻을 다하는 죽음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오늘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시어 변화하셨다고 합니다.그런데 예수님은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기 8일 전 벳세다 들판에서 보리떡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직 후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고난과 죽음,그리고 부활에대해 말씀하십니다.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바로 고난에대한 예고 후에 바로 있었습니다.이 사건은 주께서 이제 이 땅에 오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고자 먼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중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요?31절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함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맞이할 죽음에대해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바로 십자가의 죽음,이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데,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으려 하니,이것이 변하지 않고는 받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 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했습니다.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살다가 성령 안에서의 의,평화,기쁨을 위해 살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주님은 요3:6절에서 니고데모에게 영은 영이고,육은 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먹고 마시는 삶에서 의,평화,기쁨의 삶을 살아가려면 바뀌어야 합니다.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동안 병고치고,먹고 마시고,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키 위해 눈에 보이는 일들을 통해 함께하셨습니다.그러나 주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그렇게 먹고 마시고,고치시고 하는 것 만이 아니었습니다.바로 십자가의 죽음이고,이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인간의 눈으로 볼 때 지금 예수님은 막 말로 가장 잘 나가는 때 였습니다.그런데 그 가장 좋은 때에 모든 것을 놓아야 했습니다.예수님은 변화했습니다.변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주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하던 중에 변화 되었고,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죽음에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32절에 보면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깨어 예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합니다.베드로가 본 영광은 어떤 영광이었을까요?엘리야와 모세가 떠날 때에 베드로가“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합니다.과연 좋긴 좋았던 모양입니다.그러나 베드로는 그 영광 이면에 있는 십자가는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시고 나서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던 그런 영광을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그것은 거짓 영광입니다.그것은 한 순간에 풀과 같이,아침 이슬 같이 사라질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참된 영광을 보아야 하는데,우리의 눈이 잘 못 열려 자꾸 거짓 영광을 봅니다.

스테판 집사가 순교를 당할 때에 행7장55절에 보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
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보았다고 합니다.스테판은 그 영광 가운데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영광이나 스테판이 본 예수의 영광은 아마도 같은 영광이었을 것입니다.그리고 그 영광은 죽음과 함께 하고 있는데,이 죽음이 스테판이나,예수님,그리고 모세에게서도 자연적인,인간의 수명이 다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러면 어떤 죽음인가요?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이 죽음은 뜻을 다하는 죽음입니다.그래서 어떻게 십자가가 영광인가?할 수 있겠지만,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는 아버지의 뜻이고,그래서 영광인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정녕코 가나안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며 바램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죽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또는 아쉬운 죽음,안타까운 죽음도 있습니다.몇 년 전에 영국의 황태자비인 다이애나 비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온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애도하였습니다.그러나 사실 그 죽음은 치정에 얽힌 그러한 죽음인데도 사람들은 매스컴을 통해 주어진 정보를 통해 안타깝고,애절한 죽음으로 바라보았지만 ,사실은 냉정히 치정에 얽힌 죽음이 아니었던가요,그러나 그 무렵 같은 때에 인도에서는 테레사 수녀가 자기 수를 다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까요?말씀드렸지만 하나님 뜻에 합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하나님 뜻에 합한 죽음은 그것이 죽음이 아닙니다.생명이신 하나님 뜻에 합하니 그것은 생명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그러나 죽지않으려고 욕심을 부리며 살려할 때 그것은 오히려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연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우여러분 아무쪼록 하나님의 뜻에 합한 죽음 그러니까 생명이 살아있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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