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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이다(2005년 11월20일,성령강림절후스물일곱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5.11.20 13:21 | 조회 1894
나는 문이다

2005년 11월20일(성령강림절후스물일곱번째주일) 요10:1-10

요한복음 9장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이야기입니다.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사건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왜냐하면 어떻게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오히려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고 합니다.그런데 이 눈을 뜬 사람은 예수가 죄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지금 보게되었는 사실이라고 증언을 합니다.결국 바리새인들과 이 눈 뜬 사람이 심한 언쟁이 붙게 되었고,급기야 이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게 됩니다.인상적인 것은 출교를 당한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다시 찿아오셨다는 것입니다.병을 고쳐주었을 뿐만아니라 출교당한 그의 놀랜 마음을 감싸주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10:1-10 말씀은 바로 9장의 눈을 뜬 사람의 사건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비유입니다.이 목자와 양의 비유가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목축을 주업으로하는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삶의 한 부분이었습니다.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참된 목자가 누구이고,거짓 목자가 누구인지를 봅니다.아마도 예수님 당시에도 사회 여러 방면에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읍니다.그러나 이들은 참된 지도자가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지도자들에 대해 거침없이 절도요,강도라고 하였습니다.글자그대로 절도와 강도는 10절 말씀처럼 도적질하고 멸망시킬 뿐입니다.

요한복음 9장 말씀은 누가 절도이고 강도인지를 잘 말해줍니다.사실 이 날 때부터 눈먼자는 바리새인은 물론이거니와,모든 사람들에게,아니 자기 부모로부터도 이미 죄인으로 낙인이 찍히어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입니다.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눈먼 자를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에게 묻기를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하고 질문을 합니다.예수님은 단호히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말씀하시면서 실제로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대로 절도요,강도입니다.눈을 뜨고 하늘의 위로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 고침받은 사람을 유대교에서 출교시킵니다.그당시 출교는 죽음을 뜻합니다.어떤 법률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바리새인들은 이 눈을 뜨게한 사건 속에서 그들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에게 생명과 풍요를 주는 목자는 누구일까요?오늘 읽은 요한복음10:1-10 말씀은 참된 목자에대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10:2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합니다.절도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데로 넘어간다고 합니다.문은 어느 일정한 곳으로 가는 길에 있는 통과점입니다.이 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집에도 문이 있습니다.영화관,운동장,놀이시설,모든 곳에 문이 있습니다.남자는 성인이 되려면 국방의무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운동선수는 운동 선수데로,,직장인은 직장인데로,목사도 신학,목사고시를 통과해야 합니다.법관,의사 등 전문직일 수록 그 문은 좁고,어려워 아무나 통과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문으로 들어가야 양의 목자라고 합니다.그렇다면 이 문은 어떤 문일까요?10:7에서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그런데 예수님은 친히 양의 문이시면서 또한 바로 그 문으로 출입을 하십니다.그러면 이 문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마7:14은“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찿는 이가 적”

다고합니다.아마 그래서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이 문은 바로 십자가의 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눅13:23,4에서는 더 강도 높게 말씀하십니다.마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지만,누가는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왜냐하면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그러니 싫어도 오늘 읽은 말씀을 보니 9절 말씀에 이 문으로 들어가 양에게 나아가는 자 만이 양의 생명을 지키고,인도하는 선한 목자일 뿐만 아니라,또한 이 문으로 출입하는 양 만이 들어가서 구원을 얻고,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합니다.푸른 초장과 맑은 물가로 나아 갔다가,또 평안한 잠자리로 다시 그 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것입니다.결국 목자와 양이 모두 그 문,즉 주님이 친히 되어주신 문으로 주님께서 친히 양들을 이끄시고 나가며,들어오며 하는 모습입니다.

교우 여러분!이 문은 어떤 문일까요?바로 십자가의 문입니다.주님께서 기필코 십자가라고 하는 문을 세우셨습니다.왜 하필 십자가일까요?십자가가 아니면 안될까요?주님이 공생애 3년 동안 귀신을 쫓아내고,병을 고치고,5병2어의 기적도 베푸시고,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기 까지한 기적과 표적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지만,그 많은 놀라운 일들을 뒤로하고 왜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야 했을까요?

여기에 생명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기적으로 치면 모세에 비길 수가 있겠습니까?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으로는 엘리야가 이만 못 하겠습니까?그러나 바로와 대적하는 모세가 끝내 감당할 수 없는 일.자식을 바치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아브라함이 할 수 없는 일,바로 어린 양의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의 문은 우리가 만드는 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놓은 문입니다.이 어린양의 피흘린 죽음이 없었다면,모세는 바로와 대적하다가 결국 지쳐서 백기를 들고 바로의 왕국을 스스로 걸어 나왔을 것입니다.하나님의 붙잡으심이 없었다면 결국 아브라함은 인륜을 거역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질르고야 말았을 것입니다.모세와 바로와의 처절한 싸움을 멈추게 한 것도 어린양의 피였고,아버지가 자식을 물로 드려야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돌이키게 한 것도 어린양의 피 였습니다.어린양 피흘린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그 애쓰고 수고함이 헛될 수 밖에 없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시려고,온 인류 모두에게 유일한 생명의 문인 십자가를 기필코 세우신 것입니다.좁아보이고,힘들어 보이고,찿는 사람이 적지만 결국 문은 하나 어린양 피흘림의 십자가입니다.

혹 죽음에 대해,고난에 대해,희생에 대해 이야기 할 때,어!이거 부담스럽네,못하겠네 할 수 있습니다.마음이 움츠러듭니다.그런데 십자가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십자가는 애쓰고,수고하고,노력하고,고통스럽고,괴로워 남들이 하기 싫은 일 내가 하고,내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무엇을 이룩하는 그런 수고와 애씀이 아닙니다.

모세가 바로에 대항하여 애쓰고 수고하는 것,아브라함이 우리로서는 흉내낼 수 조차없는 인륜을 거스르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모세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바로와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울 때,그 싸움을 결정적으로 모세에게 붙이신 것은 어린양 피흘림의 죽음입니다.아브라함이 인륜을 접어두고 자기 아들 이삭을 야웨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들 이삭을 바치려 덤벼들때.아브라함의 칼을 든 오른 팔을 붙잡은 것은 덤불 숲 속에 준비해 둔 피흘릴 어린 양입니다.

교우 여러분!우리가 기필코 통과해야 할 문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모든 것을 감내하고 내가 죽어야지 하며 가슴을 치며,다른 사람이 차마 엄두도 못 내는 일을 오직 믿음을 갖고,오짓 신실함으로 감당해 내는 것이 아니라,골고다 언덕에 좌우의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어 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 보시면서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알지 못함이니이다.”

고 말씀하시는 그 사랑,생명을 다 내어 놓으시며,사랑의 눈길로 우리의 죄와 아픔,슬픔,고통을 바라보시는 그 사랑의 어린양 피의 문을 통과할 때 모든 세상 짐을 은혜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은 좁고,찿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이 십자가의 죽으심의 사랑의 문을 통과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서 진정 생명의 구원과 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이 문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푸른 초장의 맛있는 무공해의 오염되지 않은 꼴과 시냇가의 맑은 물을 마시며,또한 이 어린양의 피흘리심의 문을 통과해야 평안한 잠자리가 준비되어 있는 우리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한을 맺고,서러움에 북 받치며,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며,슬픔과 고통으로 잠 못 이루는 일들이 주님 달리시어 죽으시며 내려다 보시는 십자가의 그 사랑으로 모두 생명의 일이 됩니다.그러니 꼭 십자가의 문으로 출입하시기 바랍니다.개구멍이나,담치기 할 때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사이비 장사치들,뚜쟁이들과 부로커들 그리고 사기꾼들과 도적들 밖에는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망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왜냐하면 주님이 친히 문을 세우셨고,주님이 친히 출입할 때에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된 목자는 또한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는 것입니다.오늘 본문 4절 말씀에 보니까 자기 양을 다 불러낸 다음에,그는 앞서서 가고,양들은 뒤 따라 간다고 합니다.양들이 목자를 따라 가는 것은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이스라엘은 양을 칠 때 자기 개인의 우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여러 주인의 양들을 한 우리에 함께 넣어 키운다고 합니다.그래서 아침 일찍 꼴을 먹이러 양 우리로 목자가 들어 가서는 자기 양을 데리고 나올 때 목자는 독특한 자신의 소리로 신호를 한다고 합니다.그러면 신기하게 그 목자의 음성을 듣고는 그 목자의 양들만 따라 나온다고 합니다.한 마리도 예외없이 모두 다 따라 나온다고 합니다.양은 아주 온순한 동물인데 아무런 제주가 없다고 합니다.싸울 줄도 모르고,하소연 할 줄도 모르고,그런데 한 가지 제주가 있는데,그것은 오직 주인의 사인,주인의 소리를 알아 본다는 것입니다.말씀할 때,소리낼 때 알아들을 수 있는 것 이야말고 얼마나 귀한 지혜입니까?

아마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생명을 위한 가장 귀한 지혜는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하여간 주님은 오늘 3절 말씀에 보니까,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고 합니다.당시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자기 양들에게 이름을 하나씩 지어주었다고 합니다.얼마전에 101마리 강아지를 보니까 강아지 주인이 강아지 새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데,짝귀,뚱땡이,오줌싸개,영화배우,,,하면서 하나 하나의 특성과 개성을 따라 이름을 재미있게 짓는 것을 보았습니다.교우 여러분 이 목자가 자기 양의 사정을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교우여러분 목자이신 주께서 양이신 우리의 사정과 처지를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예수님은 14,15절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나는 선한 목자이다.나는 내 양들을 알고,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은 참새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아니하며,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실 정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 교우여러분께서“하나님은 나를 알아보실까?”할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교우여러분!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이 장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베드로전서 2: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것은,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라고 합니다.주님은 우리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시어 이 자리에 참석케 하셨고,뿐만아니라 이제 어린양의 피흘리심의 십자가의 문으로 손수 우리를 이끌고 들고,나며 푸른 초장,맑은 물가로 인도하시며 평안케 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모두가 죄인이라고 무시하며,멸시하던 장님을 보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또한 유대교에서 출교당하였을 때에도 찿아 오시어 위로해 주셨습니다.예수님은 다시 만난 그 눈 뜬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네가 인자를 믿느냐?”“선생님,그 분이 어느 분이십니까?”“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그러자 그는 “주님!내가 믿습니다.”하고 예수님께 엎드렸다고 합니다.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목자와 양에대한 비유를 그들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성경에 능통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듣지는 않았지만 눈을 뜬,그래서 결국 출교를 당한 이 사람은“너와 말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이다.”라는 한 마디에“주님 내가 믿습니다.”고 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과 눈을 뜬 이 사람과는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며 믿음을 통해 서로 잘 알게 되었습니다.좋은 목자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이 통합니다.스스로 문이 되어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신 좋은 목자 앞에 어떤 양의 모습으로 서야할 까요?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를 때 바로 주님이 통과 하는 그 십자가의 문을 통과할 것입니다.그럴 대 맛 있는 풍성한 꼴과 맑은 물,그리고 안식이 우리에게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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