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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것(2007년4월15일, 부활 둘째주일)

하늘기차 | 2007.04.15 15:01 | 조회 2019


다시 사는 것

2007년4월15일(부활 둘째주일) 고전15:50-58

오늘 본문 고린도 전서15장은 그 유명한 부활장 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던, 그리고 잘 못 이해하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예수 부활에대해 말씀합니다. 부활은 글자 그대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원불멸이나, 불로장생이 아니라 다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부활은 이성으로, 어떤 깨달음으로, 명상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위대한 삶을 살았던 사람의 사상이나 철학이 거듭 다시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이루어 지거나,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활에대해 만져지고, 보여지고 함께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에 있어서 2가지 점을 간과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는 죽었다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었다 살아났는데 이 전과 똑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전히 술먹고 집안 살림 깨부수며 폐가망신 시키고, 도박하며 가산탕진하고, 또 이기적인, 욕망가득한, 시기와 질투, 슬픔과 절망...등등 옛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난다면, 그것은 죽은 것만 못하지 않은가하는 것입니다. 아마 가까운 사람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왜 살았어, 죽지 그러면 너도 나도 다 편한데”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부활을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무조건 믿으라 해서 믿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활을 이해시키고, 설명해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오늘 이 시대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은 충격이었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어 잠시 혼절하였다가 깨어나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부활했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마28장에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했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 부질없는 인간의 말 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부활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A.I.라는 인조인간에대한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인조인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희안하게 생각하며, 그 눈물을 분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화학적으로 분석해 보아야 H2 0 와 소금기 이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의 눈물에는 화학적 성분 외에 슬픔, 기쁨, 억울함, 통회함, 감사, 감격... 화학적 성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과 체험이 있습니다.

생명도 그렇습니다. 생명은 심장, 허파, 피, 세포 등... 으로만 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으면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심을 본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습니다. 부활도 그렇습니다. 부활을 설명해야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설명할까요? 썩어 문들어진 살이 다시 아물어 보송 보송해지고, 썩는 냄새가 사라지고, 혈관에 다시 혈액이 돌고, 심장이 박동하더니, 숨을 토하더라! 한다면 이것은 납양특집에서 죽은 사람이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나는 것 아닌가요? 이건 영락없이 귀신이야기 일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너무 충격적이고, 너무 벅차 어찌 할 줄 모를 수 밖에 없으며, 부활을 처음 목격한 여인들처럼 두려울 수 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과연 이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마28:6에 보면 무서워 하는 여자들에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요20:9에 보니까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씀대로의 부활입니다. 말씀을 믿지 않으니 부활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활에대해 설명하지 않고 신앙으로 고백하고, 말씀으로 증거하고 선포합니다. 부활은 부활을 보고 만지며, 함께했던 제자들을 통해 선포되고, 증거되고, 고백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고백되어지고, 증거되어진 부활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것입니다. 만일 죽었던 사람이 지금 살아난다면 어떨까요? 언젠가 순복음교회에서 죽은 쳐녀가 살아났다고 해서 교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아니 그 쳐녀가 실제로 살아났다면 어떨까요? 아니 가까운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면 어떨까요? 그런데 그 사람이‘아유 참 아쉽내 하며 더 살아야하는데, 더 귀한 일을 많이 해야하는데’하는 사람이 아니라,‘아이구 그 놈 잘 죽었다’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면, 아이구 이 놈에 왠수 하며 난리가 날 것입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삽들고 다시 무덤에 생 매장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데 다시 살아나도 또 죽어야 합니다. 아니 다시 살아났는데 이 전의 모습 그대로라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납양특집이고, 귀신이야기입니다. 종종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죽음에대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지옥에 갔더니 “...락 하더라”, 천국에 갔더니 좋은 집, 금은보화, 만화방초로 가득 덮힌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세상을 살며 가졌던 물질적인 욕망을 천국을 빗대어 그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죽은 사람이 관 뚜껑 열고 살아났다는 귀신 이야기 이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오늘 말씀처럼 변화입니다. 단지 죽었다 살아난 다음에 또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변화의 부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대해 이야기 할 때 변화된 부활을 이야기 합니다. 바울 스스로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아니고, 2천년 전의 예수 부활을 바라보는 것만도 아니고, 또한 앞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 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속에서 내가 밟고 있는 땅 위에서의 부활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바로 변화입니다.

어떤 변화인가 하면 몸의 부활입니다. 사람들은 이 몸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을 보여주었는데,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아니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전부터 확실한 것은 온 우주와 삼라 만상이 부활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시 살지 않는 것이 어디 있나 하는 것입니다.

볍씨 한 알을 보아도, 이 볍씨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즉 부활을 볼 수 없는데, 씨앗은 스스로를 죽여 이렇게 부활의 삶을 살아갑니다. 나비들도 알에서 애벌레로, 번데기로 그리고는 성충이 되어 날아갑니다. 변화합니다. 뱀도 죽을 힘을 다하여 허물을 벗습니다. 가재도 일생 동안에 3,4번의 껍질 벗기를 합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깊은 겨울잠에 빠졌던 동물들이 기지개를 폅니다. 모두 부활의 징표들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만 조금 열면 지금도 변화의 생명력, 역동성을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여름에 그렇게 한창 자신의 푸르름을 피워내던 식물들이 찬 바람 한 번 휙 하고 불면, 성장을 멈추고 이제 열매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또 열매를 다 키워내고서는 자신의 잎을 다 떨구어 겨울을 준비합니다. 자연은 죽어야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마련하신 생명의 질서인 것입니다.
온 지구의 피조물들이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데, 오직 인간만이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죽지 않고는 다시 살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가 있음에도 우리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살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얼마 전에 도올 김용옥님의 요한복음 주석으로 잠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은혜공동체라는 교회에서 도올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린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였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할 수 없는 게 인간의 모습이다. 내 자신을 반성해봐도 그렇다. 내 자신이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신앙이 필요하다. 내가 아무리 잘 난척해 봐도 인간은 인간이다. 변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육체를 가지고 있고, 육체에 의해 지배당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말에 공감을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변화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변화할 수 없는 이 몸을 썩을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변화이며, 부활의 역동성이며, 생명력이요, 축제인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이 변화에대해 인간 뿐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부활, 변화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한 번 고전 15:39-41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살이 똑같은 살은 아닙니다. 사람의 살도 있고, 짐승의 살도 있고, 새의 살도
있고, 물고기의 살도 있습니다.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과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저마다 다릅니다. 해의 영광
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들의 영광이 다릅니다. 별마다 영광이 다릅니다

가끔 인디언의 영성에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신비롭기도 하고, 자연과 서로 통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난주 밤토실 세계문학읽기 모임에서 엘리자베스 마셜 토마스라는 여성 인류학자가 쓴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작품 속에서도 2만년 전 구석기 시대의 인간들이 어떻게 자연과 합일된 삶을 살았는지를 잘 보았는데, 박경장님이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자연과의 모든 내적 교감의 능력을 다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를 보아도 듣기 보다는 보는 감각, 물질적 감각만이 확대되어버린 모습을 봅니다. 대중 매체가 모두 보는 것을 극대화 합니다.

물질문명이 발전하였지만 인간의 내적 성숙은 조금도 진보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죽어야 사는 생명의 섭리 보다는 죽지 않고 영생불멸하려고 합니다. 장기집권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고전 15장에서 보면 온 우주의 모든 피조물이 각자 나름 대로의 자기 존귀함을 유지하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각 피조물의 존귀함, 각 존재의 장차 누릴 영광의 표출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죄로 인하여 그 존귀함,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생명의 존귀함을 회복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믿음을 따라 그 존귀함을 마땅히 누려야 합니다.

고기교회 처음자리 들꽃 동산에 여러 가지 들꽃들이 피어 오릅니다. 노랑제비꽃, 족두리 꽃이 처음에는 한 송이만 올라왔는데, 뒤에 5,6 송이가 또 올라와 그 앙증맞은 모양새를 드러냅니다. 또 너도 바람꽃의 꽃 몽우리들이 10개 이상 솟아 오르는 것이 보기에 좋습니다. 지난해 심어놓은 대나무 밑에는 개불알꽃이라는 코딱지만한 보라색 꽃이 이쁘게 피어났습니다. 각자 자기 존귀함, 자기 영광을 피어냅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모습 드러내니,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그러니 처음자리가 얼마나 화사한 살아있는 생명이 살아있는 동산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이제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경륜을 따라, 더 이상 죄에 붙들려 고사하지 말고, 몸이 다시 사는 부활의 은총을 따라. 내 고유의 생명의 축제,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하는 생명력, 역동적인 삶을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피워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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