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이 전에 없던 죽음(2007년4월 1일,종려주일)

하늘기차 | 2007.04.01 16:55 | 조회 1989


이 전에 없던 죽음

2007년4월 1일(종려주일) 막10:35-45

예수님의 죽음, 즉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가, 역사가, 각 자와
가정이, 나라가, 지역이 어떤 지향성을 가져야 할지를 가늠하
는 푯대이다. 십자가를 보면, 예수의 죽음을 보면 내가 지금 어
느만큼 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다.
그리고 감사하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 겸허히 무릎꿇고 십자가
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전에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찿아온 일에대해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영광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보자고 했을까요? 요즈음에 보면 가끔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불교에 심취하여 스님이되어 도를 닦는 경우를 본 기억이 나는데,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에게서 저들이 없는 것을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었습니다. 아마도 합리성, 논리, 이성으로 추구하는 사고의 틀을 가지고는 볼 수 없는 무엇인가 고귀함, 순전함, 숭고함을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바라본 예수님의 그 고귀함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지향하는 십자가에서부터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에서 “유대인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십자가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빌2:5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고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사람들이 바로 그 낮아짐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부터오는 고귀함을 본 것일 겁니다. 이러한 삶의 구조, 지향점은 헬라적 삶의 틀에서는 좀처럼 찿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으로 바라보니 겸손이요, 비움이요, 낮아짐이지 당시 로마의 압제하에서 십자가는 굴욕이요, 참혹함이요, 조롱거리였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그 천한, 치욕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언젠가 어느 성도님과 이 말씀에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 건 말두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어냐 하면 어떻게 로마의 백부장의 입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바라 보면서 “참으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 뻔뻔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로마의 백부장은 전쟁터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 것이고, 예루살렘에 점령군으로 파견되어서도 얼마나 많이 잔인하게 이스라엘의 죄수들을 십자가에 처형시켰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분이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다.” 백부장의 고백이 맞다는 것입니다. 무수히 많은 죽음을 보았고, 또 백부장 스스로도 많은 생명을 빼앗았지만, 무언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다른 죽음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앞의 목사님이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줄 곳 십자가에 흉악법, 정치범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을 터인데, 무엇을 달리 느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한창 군사 독재로 언론이 탄압을 받을 때, 동아일보 광고를 차단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동아일보가 진퇴의 위기에 처해있었을 때인데,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셨고, 주필이셨던 송건호 선생님이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며 심한 고통을 받을 때 였는데, 그러니까 군사정부에 협조않하는 기자들을 사퇴시키라는 압력이 계속되는 중에도 끝까지 거부하여, 결국 본인이 동아일보를 떠날 수 밖에 없게되었는데, 그 때 송건호 선생님을 담당했던 안기부 직원의 말이 “선생님은 진짜언론인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상지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고, 연세대에서 구약학을 가르쳤던 김찬국 교수님도 한 때 안기부 직원이 그 집에 상주를 했었는데,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안기부 직원이 “나도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고귀함과 숭고함이 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예수의 죽음은 이전에 없던 죽음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 죄 용서의 은혜를 입지만, 사실 이 십자가의 죽음에대해서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죽음, 의로운 죽음, 영웅적인 죽음에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간디, 조선의 독립과 남북의 통일을 위해 애쓴 김구 선생님, 돌베게의 장준하 선생님, 문익환 목사님 참으로 귀한 죽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죽음을 당하면 함께한 분들뿐만아니라, 온 나라, 백성들이 이 죽음을 애도하며, 안타까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에 우리 모두는 등을 돌렸습니다. 조롱, 질시, 미움 배반,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무관심으로 바라봅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 내려오너라”하였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하였습니다.그런데 로마인 백부장은 주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시고
“참으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합니다.

두 믿음, 보는 시각이 십자가 앞에서 극명하게 다르게 나타납니다.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막15:32에서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인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를 바라 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 속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로마의 백부장이 언제 예루살렘에 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한 분 하나님에대한 제사, 성전, 율법 신앙을 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 짐승을 잡아 피뿌리는 제 사함의 의식,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 등을 보면서 이 것 뿐인가 했을 것입니다.이러한 열정, 열심은 로마에도 있지 않은가 했을 것입니다.

그언데 이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예수를 본 것입니다. 쉽게말해, 아! 이게 진짜구나, 아!다른 행위들은 모두 겉치례이구나 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 신앙을 율법학자나, 제사장등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인을 통해서 고백케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 와 보라”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라는 희랍의 작가가 있습니다. 이 분의 작품 중에 최후의 유혹이라는 예수의 인간적인 고뇌를 묘사한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에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옵니다.

사람들은 자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끌어 내리려고 합니다. 일반 사람들 뿐만아니라 기독교와 교회도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려 합니다. 병고침과 기적과 축복을 위해 내려 오라 합니다. 내려와서 같이 성전을 견고히 하고, 율법을 더 굳건히 지키자고 합니다. 보수하자고 합니다. 아니 보수가 아니라 보수주의 하자고 합니다.

보수는 마땅히 해야할 것, 누려야할 것을 보수하는 것입니다. 생명, 자유, 평화, 그러나 보수주의는 자신이 가진 것, 누리는 것을 나누지 않고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로치면 사학법개정 반대가 대표적입니다. 우리 교단 총회장님과 우리 교단의 대표적인 교회의 목사님들이, 그리고 전국 여전도협회의 임원들이 사학법개정 반대를 위해 삭발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보수주의 하자는 것입니다. 이 번 경기노회에서도 이러한 반대에대한 움직임을 가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전체의 대세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합니다.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 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27:40에서 보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 공생애 시작할 때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결국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로마의 백부장은 기득권을 위해 포장된 자기 나라의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유대교를 보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참 하나님의 아들, 참 신앙의 대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셨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자기 하나 구원하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에게 “살자! 내려와서 함깨 살자!” 하셨지만, 주님은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고통 속에 절규하며 죽으셨습니다. 자기 무덤 하나 없는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공동묘지 중에 어느 곳에 가면 행려병자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묘비도 없는 무덤입니다. 몇 년 그 곳에 묻히었다가, 연고가 없으면 다시 화장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십자가는,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푯대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는 북한에서 온 주민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여명’이라는 대안학교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평생의 소원이 고깃국에 밥 말어 먹는 것이었는데, 목숨을 걸고 북한의 경계를 넘어 들어간 중국 땅에서도 꿈은 역시 고작 개 밥그릇 같은 끼니라도 제대로 연명하는 것 일 수 밖에 없었고, 다시 넘어 온 한국 땅에선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이 평범한 일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분노와 절망만이 가득해진 이런 아이들을 품어 섬기는 분이 계십니다. 간염과 폐결핵에 지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늘 이 아이들을 짝 사랑하기에 시간이 부족한 분이 한 분 계시는데, 바로 그 학교의 조명숙 선생님이십니다. 한 번은 그 아이들 중에 연아라는 아이가 이쁜 구두를 선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느 공식 행사장에 정장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것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렇게 돈이 여유가 있을 리가 없고 그 당시에 참 돈 쓸일이 많아 돈을 쪼개어 쓰던 때 였는데, 이렇게 구두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짧은 편지도 받았는데,

“선생님이 우릴 귀하게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이 말을 듣고 속상했더랍니다. 왜냐하면
“남들은 우리를 천대하는데 선생님은 우리를 잘 대해 주”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 아이들이 귀하지 않은데, 내가 선으로 잘 해준게 아니라, 너무 귀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인데”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남한에 와서 처음 느낀 것은 ‘분노’였다는 것입니다. 같은 민족인데 누구는 ‘남쪽에서’태어나서 잘 살고, 누구는 ‘북쪽에서’ 태어나서 죽어가는 구나, 넘어 오다 죽고, 배고파서 굶주려 죽고, 병들어 죽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참혹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명 대안 학교’아이들이 ‘나눔창고’라는 동아리를 만들어서 난민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면(물론 추방당하는 것이겠지요) 경제적인 영웅이되어서 환대를 받지만 난민들은 추방당하면 죽게된다는 것입니다.난민들을 도우며 이 아이들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움도 주는 구나’, ‘아! 선생님도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이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조명숙 선생님은 지금 그 선물받은 구두를 3년 동안이나 신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연아라는 아이가 시집갈 때, 북의 부모가 올 수 없으니 자신이 엄마가 되어 그 신을 신고 결혼식에 참여하려고 그래서 여직 것 신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북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이 이야기의 본래 방향과는 다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만 ,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 아이들이 죽음과 참 가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도 우리나라, 아니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안타까운 죽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 미쳐 이해할 수 없는 죽음에 수 많은 사람들이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던가? 또 예수님의 죽음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런 죽음이 있느가? 이런 죽음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오늘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러한 소외된 죽음 앞에 나 자신 몸둘 바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철학도, 종교도, 도를 닦는 것도, 참선과, 온 우주와 시간을 뛰어넘는 일을 한다 해도, 십자가의 그런 죽음 앞에 아무도‘나요!’할 자는 없는 것이다. 남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이 십자가의 죽음 앞에 나는 그 동안 내가 누린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끄러운 모습으로, 두렵고 떨림으로,겸허하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 비움, 낮아짐, 겸손, 불쌍히 여김의 마음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4/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49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6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58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50 2005.09.02 16:30
115 [일반] 싸움 속의 은혜(2007년4월29일, 부활 네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3 2007.04.29 15:13
114 [일반] 다시 사는 것 Ⅱ(2007년4월15일, 부활 둘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2 2007.04.22 14:27
113 [일반] 다시 사는 것(2007년4월15일, 부활 둘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9 2007.04.15 15:01
112 [일반] 빈 무덤(2007년4월 8일, 부활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03 2007.04.08 15:12
>> [일반] 이 전에 없던 죽음(2007년4월 1일,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90 2007.04.01 16:55
110 [일반] 마실 잔과 고난의 세례(2007년3월25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4 2007.03.25 14:23
109 [일반]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2007년3월18일, 사순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8 2007.03.18 15:42
108 [일반] 고기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신앙 집회 셋째날(2) 류민환 1575 2007.03.15 21:10
107 [일반] 고기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신앙 집회 셋째날(1) 류민환 1547 2007.03.15 21:08
106 [일반] 고기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신앙 집회 둘째날 류민환 1660 2007.03.15 15:39
105 [일반] 성장이 아니라 성숙(2007년3월11일, 사순절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9 2007.03.11 16:24
104 [일반]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007년3월 4일, 사순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37 2007.03.04 15:09
103 [일반] 변하신 예수님(신화를 버리고! 2007년2월25일, 사순절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0 2007.02.25 14:05
102 [일반] 헵시바라! 쁄라라!(2007년2월18일, 주현절후일곱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389 2007.02.20 12:16
101 [일반]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퍼함(2007년2월11일, 주현절후여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807 2007.02.11 14:42
100 [일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2007년2월 4일, 주현절후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99 2007.02.04 14:15
99 [일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2007년1월28일, 주현절후네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23 2007.01.28 15:31
98 [일반] 이만한 믿음..(2007년1월21일, 주현절후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7 2007.01.21 13:22
97 [일반] 처음, 그 다음, 또 그 다음...(2007년1월14일, 주현절후두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25 2007.01.14 13:36
96 [일반] 은혜의 해요, 보복의 날이라!(2007년1월 7일, 주현절후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504 2007.01.07 1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