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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잔과 고난의 세례(2007년3월25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03.25 14:23 | 조회 2454


마실 잔과 고난의 세례

2007년3월25일(사순절다섯번째주일) 단5:18-23;막10:35-45

최근 대권주자에대한 하마평이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데,오늘 말씀을 보니까,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예수님께 말합니다.“선생님 우리가 꼭 원하는게 한 가지 있는데 들어주실랍니까?”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 해 보렴,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야기 합니다. “주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로마와 헤롯을 몰아내시고, 다윗 왕권의 정통을 회복하시면 그 때에 저희 형제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그리고 총리로 세워주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고 하시면서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늘 읽은 다니엘서의 말씀은 절대 권력의 교만과 타락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읽은 단5:21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게 되셨습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스스로 절대 권력을 행사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과 그 아들 벨사살 왕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며, 나라는 메데와 바사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타락한 권력의 말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악한 권력의 구조 속에 얼마나 많은 귀한 것들이 희생당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총체적 결함도 이런 합당치 않은 권력 창출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병리적 사회의 구조적 틀이 바로 이러한 잘못된 권력 구조에서부터 나온다고 볼 때, 오늘 말씀에 야고보와 요한이 그 권력의 핵심에 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몰라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있던 제자들이 분을 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다만 두 제자만의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막9:34에서도 보면 가버나움에 머물렀을 때에도 서로 누가 권력의 핵심에 설 수 있을까를 가지고 논공행상을 따지다가 주님께 그 일이 들통나기 까지 했습니다.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주께서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와 주라고 했을 때 근심하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하면서 이미 대권 도전의 불을 지피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대권도전의 분위기는 마태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까지도 동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서로 간의 견제와 야망의 표출은 드디어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다락방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이제 바깥에서 돌아와서 식사를 하려면 발의 먼지도 털어내고, 손도 닦아야 할 텐데, 그러면 물도 필요하고 해서 누군가 손 발을 닦을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무도 나서지를 안습니다. 그 때에 바로 주께서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오셔서, 손 수 제자 하나, 하나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사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분위기가 느껴졌고, 주께서도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리라는 이야기를 3번에 걸쳐 했기 때문에, 물론 무심코 지나 갔겠지만, 그 되어지는 정황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왕권에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한 이후 많은 제자들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보면 그들에대한 예루살렘의 견제, 위협이 매우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3년 동안 모든 것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제와서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끝까지 따라야지, 설령 위협과 핍박이 와도 그 정도의 핍박을 못 견디고 어떻게 권력을 차지할 수 있을까? 암, 끝까지 포기할 수 없지’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의 암투가 예사롭지가 않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 자리에 앉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42절 말씀입니다.
“너희 아는 대로,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백성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 끼리는 그렇게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 님 나라의 통치 방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죽기까지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했지만, 제자들은 다윗 왕권 회복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지금 곧 한 자리를 차지할 터인데, 가릴 것이 어디있고, 거부할 것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제자들은 대뜸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어림도 없다, 너희들이 구하는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너희들이 고난의 잔,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하고 꾸짖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장차 동참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하면, 제자들이 원하는 그 권력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 자리에 앉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다고 합니다.

사실 이 대화의 발단은 한 부자 청년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할 때,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가자,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이 10:29,3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부응하여 100배나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100배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까요, 누가 100배나 받을까요? 버린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버린다고 하나요? 자신이 그동안 누렸던 것들을, 즐거워 했던 것들, 귀하게 여겼던 것들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 기준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00배나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논밭 100평을 버렸으니 10,000 평을 얻고, 아파트 25평을 버리면 2,500평을 얻는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성경은 부동산 투기의 모범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100이란 완전의 수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입니다. 아니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은혜,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는, 아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하여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버릴 때 무엇을 위하여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나요? 복음을 위하여 버립니다. 쉽게 말해 주님을 위해 버립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또 교회를 위해, 교회 건축을 위해, 교회를 위해 뭐도 바치고, 뭐도 바치고 합니다. 복음 초기에는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리고 버리고, 헌신하는 것을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매도해 버리면 벌받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에 보조장치를 달아 놓으셨습니다. 100배로 받겠지만 박해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100배가 당연히,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역사가 온전히 그 버림을 통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실제 예수님의 제자들의 대부분이 예수님 처럼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자리에 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헤롯의 박해 때에 사도로서 첫 순교를 당한 사도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였습니다. 사도 요한도 100세 까지 살며 그 모진 박해를 감당하며 사랑의 사도로 온전히 서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전설에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다고 합니다.

이 생명을 내어 놓는 일을 통해 순교자들은 복음의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100배로 받은 것입니다. 이 100배의 은혜로 지금 우리가 이 귀한 복음의 은혜를 이 고기교회에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싸움에서 평화로, 분쟁에서 화해로, 미움에서 용서로, 분노에서 온유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공허함에서 충만함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고통 속에서 치유로, 억압에서 자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갈 때 그 중간의 정점에 십자가의 은혜, 100배의 은혜, 인간의 수고나 의지, 노력이나, 제도로 얻을 수 없는 신비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맛 보기 위해서 우리는 버리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맛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노력이나, 수고가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관행, 가치관, 관계등을 가만히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마땅히 누려야 할 것 누리지 못하고, 참으로 즐거워 할 것을 즐거워 하지 못하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여전히 세상권력, 명예와 부에 한 쪽 다리를 걸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 서로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섬기는 모습으로, 버리는 모습으로, 진정 종의 모습으로 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잔을,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질 수 있을까요? 결혼할 때가 된 청년이 있는데 이 청년은 무엇에나 부족함이 없는 청년이라고 합니다. 가정, 학문, 인물,능력 모든 것에 흠이없는 청년인데, 그래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인정받고, 당당한 그런 청년이었는데, 이 청년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지면서 변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렇게 아름다운데, 문제는 자기 자신이 다른 남성에 견주어 볼 때, 그렇게 그 여자 앞에서 자신이 없고, 초라해 지고, 그 사랑하는 여자와 관계가 있는 남자들과 견주어 볼 때, 자기가 다른 남자들과 전혀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당당하던 어깨가 그 녀 앞에 서기만 하면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교우여러분 오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종, 헌신, 버림, 낮아짐, 순교 등 그 모든 것이 사랑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나의 선택도, 의지도, 노력도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정말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빠질 때 이 은혜가 이 사랑이 나에게서 솟아 나는 것입니다. 이 삶의 기쁨, 감사를 어디서 돈으로 살 수 있을까요?

최근 헨리 나우엔의 책을 읽었습니다.‘두려움을 이긴 사랑’이라는 책입니다. 과테말라에서 순교한 한 선교사와 그 뒤를 이어 여전히 그 자리에서 헌신하는 존 베시라는 한 신부에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1981년에 13년 동안 봉사해 오던 과테말라 고산지대에 위치한 산티아고에서 군인들에 의해 피살된 로터 신부와 그 후속으로 그 산티아고 마을로 들어간 존 베시 신부에대한 증언입니다. 군사 독재에대한 반정부 투쟁이 거세지면서 산 골의 산티아 마을에도 그 내전의 열기가 불어왔고, 지역 주민을 돌보고 감옥에 갖힌 주민을 면회하는 과정 속에 당연히 반정부 인사를 돌보게 되었는데, 정부군에 이 사실이 알려져 결국 끝내 교회의 사제관에서 피살됩니다.

그런데 로터 신부가 내전이 극심하여 바로 피살 당한 것이 아니라, 계속 정부군의 압박이 교회로 좁혀져 왔지만, 미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간접적으로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속한 지역의 교회를 섬기도 있었는데, 얼마 후에는 정말 직접적인 협박과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 로터신부가 정부군의 처형 명단에 올라 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산티아고를 떠납니다.

그런데 참 귀한 것은 이 곳 주민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이들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지만, 그것이 죽임을 당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영웅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모한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순교에대한 열망이 있어도 말입니다. 이 책은 로터 신부가 그러한 어리석음에 빠질 사람이 아니며, 로터 신부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사랑했고, 사는 날 까지 분별력이 있고, 신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는 늘 나는 지역과 함께합니다라는 자기 고백이 계속되었고
그러나 죽기 전의 편지 속에“만약 직접적인 위협이 있으면 저는 이 곳을 떠나겠습니다.”라고 편지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산티아고 주민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왔고 그래서 그는 떠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나 몇 개월 후 직접적인 위협이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결국 로터 신부는 교회의 사제관에 침입한 괴한들에의해 살해되었는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외부로 끌려가 무고한 죽음을 당하고는 시신 조차도 찿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시신을 찿는 일로 많은 사람들이 애를 태웠다고 합니다. 로터 신부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괴한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심한 몸싸움을 하였습니다. 침대가 부셔지고, 거실 벽의 혈흔등, 그래서 괴한들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로터 신부를 살해하게 된 것입니다. 괴한들이 침입했을 때, 그는 외부에 소리쳐 살려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섬겨온 사람들을 위해 호리라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혼자 괴한들과 필사의 싸움을 벌인 것입니다.

로터 신부의 선택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엄청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가장 최악은 생며의 위협이나, 협박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버려두는 것입니다. 단지 그가 한 일은 자신과 함께 하려는 사람들과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편지에서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언급했는데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순교는 항상 그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의 삶은 신실하게 지역을 섬기다가 생을 끝낸 것 같지만, 그 섬김의 이야기를 접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헌신의 싻을 틔운다는 것입니다.실제 그가 죽은 다음날부터 수 천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그의 헌신의 삶을 따르는 자들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마 로터 신부가 영웅적인 죽음을 선택했다면 이러한 생명의 새 출발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 참으로 놀랍게도 그 죽음이 있은 지 한 달 후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전 로터 신부와 함께 신학공부를 했던 존베시 신부가 같은 파라과이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전 동료였던 로터신부의 죽음에대한 타임지 기사를 읽게됩니다.

그 때 존 베시 신부는 “나는 살아있고, 로터는 왜 죽었는가?”“나는 지금 건강하고 안전하게 내 일응 마치고 안식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로터는 죽었구나”하면서, 그는 로터 신부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결국 “주님, 만약 당신께서 저를 그의 자리로 보내기 원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고백을 하게됩니다. 그리고 3년 후에 그는 로터 신부가 섬기던 산티아고로 가게됩니다.

사실 존 베시가 산티아고로 갈 당시 엘살바도로에서는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당했고, 그 곳의 4 수녀가 엘살바도르의 안보군에게 납치되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였습니다. 그럼에도 존 베시 신부가 기꺼이 친구 신부가 봉사하던 곧으로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을까요?존베시 신부는 항상 순교자, 성자에대한 각별한 사모함이 잇엇다고 합니다. 성인들과 함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엿고, 가까운 친족과 같이 여기며 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늘 그들과 만나기를 원했고, 순교자들의 생명력과 자신의 생명력이 늘 만나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존 베시 신부는 바로 산티에고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3년을 준비하여 들어갔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관심, 배려,그리고 참여를 통해, 예를들어 엘살바도로에서 죽은 4 수녀에대한 죽음을 철저히 조사하라는 탄원을 비롯해서, 라틴 아메리카에 처한 정치적 상황에대한 숙지, 그리고 그 지역의 대주교와의 면담, 또 산티에고 방문을 통해 하나 하나씩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신, 봉사, 순교, 종이된다는 것에, 하나님 나라의 일에 어느 인간적인 계획, 의지 노력이 들어갈 수 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인가 하는 겸허한 질문, 나의 생각과 의지, 관행, 가치관을 겸허히, 그러나 단호하게 내려놓는 자세를 통해 우리는 아마도 내가 이 시대의 마땅히 지고 갈 십자가를 말없이 질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39, 40에서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내 왼쪽에 앉는 그 일은, 내가 허락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해 놓으신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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