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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난의 축복’(2008년2월24일, 사순절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2.25 08:48 | 조회 2344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난의 축복’

2008년2월24일(사순절세번째주일) 렘17:5-11;눅6:17-26
산마루 교회의 이주연 목사님의 ‘불타버린 숭례문’이라는 제목의 짧은 단상입니다.
"아, 대한민국"에서 귀한 것은 무엇이냐?
아파트, 오피스텔, 뉴타운
반도체, 휴대폰, 김치냉장고
백화점, 은행, 청와대.........

오늘 새벽 기도회를 가는 길에
늘 위용 있게, 고풍스럽게,
때로는 쓸쓸히 서있던 숭례문이 시커멓게
무너져 내려 있었다.
이장하느라 산모퉁이에서
불태우다 남은 조상의 시체처럼.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하였구나!
내가 악몽 속에서 거리를 달리고 있는 줄로 알았구나!
차라리 간밤 뉴스라도 보았다면 그 길을 피해서라도 갔을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니!
그 참혹함이 나를 종말적인 미궁의 공간으로 내던져버렸다.

아, 나의 사랑 대한민국 너는 미쳤느냐?
빨갱이도 불태우지 아니하였고
감히 임란 호란의 적들도 불태우지 못한 것을
네가 추운 밤 불소시게로 삼았다니!
알고 보니 내가 미쳤구나!
어찌 너라도 지키지 못하였느냐.
정신이 드니 내가 조상 앞에 부끄러운 놈이었구나!

너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
우리는 무엇을 겨레의 혼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
속알머리 없는 것들, 영혼을 빼놓고 사는 것들
우리가 미쳤구나, 시대가 미쳤구나,
아, 대한민국이 미쳤구나.
금수강산 푸른 바다 은빛 모래에 시커멓게
기름을 쏟아 붓더니
이젠 600년 제 나라 첫째 보물을 불태우다니!

아, 대한민국에서 귀한 것은
달라밖에 없고, 주식밖에 없고, 경제 성장률밖에 없더냐!
아. 이 겨레의 필수품은
고속철에 경부운하에 벤츠에 렉서스에 BMW밖에 없더냐!

흰옷을 벗어던졌다고 백의민족이 아니며,
어린 입에 빠다가 들어가고, 혀꼬부라진 소리 나온다고
배달겨레가 아니냐!

타다 남은 숭례문 서까래로
대한민국을 화장하라, 이 겨레를 화장하라!
제 정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
세종로 한복판 서울역 광장에서 태우고 또 태우라.
영혼의 껍데기 벗겨 화장하고 또 화장하여
이 하늘 아래
무엇이 소중한 것인 줄 아는 혼으로
다시 부활할 수만 있다면.

이 주연 목사님은 숭례문이 소실된 것을 안타까워 하며, 주상복합 아파트, 외제차, 명품 등으로 상징되는 물질 가치에 이 나라 전체가 공공연히 붙들려 있는 것에 마음 아파합니다. 그래서 아마 마지막 구절에 타다남은 서까래로 대한민국을 화장하라 하면서 분해하는 것 같습니다.

또 건축가 정기용님은 “문화재는 보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기억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제가 모든 걸 살려낼 것처럼 울부짖고,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대운하로 국민과 입씨름을 하는 이 나라 비극의 실체를 바라보라고 남대문이 탄 겁니다.”고 합니닫.

이 물질 숭배는 몰입식 영어수업, 한반도 대운하 등과 같은 이명박 당선인의 경제 제일의 국정과 관련하여 정점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멤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 넘긴 파우스트 처럼 이 나라가 그 영혼을 팔아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틀을 잘 짜 맞추는 것 같습니다. 어느 신문에 보니 이 번 국무위원들의 됨됨이에대해서 그들 모두가 오늘 이 시대의 외제차와, 주상복합 아파트, 펀드형 예금, 부동산 등으로 대표되는 부를 축적한 1% 특권층이라 하는 가십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득권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니 소위 기득이 없고, 모르는척 하자니 혹 이 사회에서 완전히 뒤로 처지는 것은 아닌지... 사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들의 삶을 조금씩 옥죄게 합니다. 아이들 학원비, 오르는 부식비, 교통비,,, 등 조금씩 조금씩 우리를 하층으로 밀어내는 것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할지?

예레미야는 오늘 7절 말씀에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면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 한글개역에는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 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점점 살기가 만만치 않은 이 때에 우리는 누구를 믿고 따를까요? 무엇을 바라야 할까요?

자주 신문이나, T.V 뉴스에 보도되는 것 중의 하나는 사기당한 것에대한 것입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보면 적지않게 믿지 못 할 것은 사람이라 하면서 사기 당하는 일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사람을 믿으려 하고, 바라기 때문에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서로 신뢰하고 바라는 것이 좋은 것인데 왜 시비를 거냐고 할 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믿고 바라는 것이 자기에게 정상적이지 않은 통로를 통해 힘이 되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되는 것 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고, 되는 것은 되는 것인데, 자꾸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합니다. 이것은 잘 아시겠지만 군대 용어입니다. 군부독재 시절에 이 사회에 사생아 처럼 불쑥 튀어나온 것이 바로 이 ‘안되면 되게 하라’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굴의 신화 하면서 중동 붐, 한강의 기적 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나온 이 구호가 경제 제1 정책 속에 최고의 주가를 날리며 여기까지 달려왔고, 어렵고 힘들수록 안되면 되게 하라고 외쳐 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욕심, 사행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가짜학력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규제가 너무 많습니다. 규제가 많으니 안되고, 안되니 되게 하려고 사람을 만나 거래하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겠거니 합니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면 여러 가지 많은 눈에 보이는 풍요가 실제로 옵니다. 그러나 안되는 것을 안된다고 하면 무능력하고, 인간관계가 나쁘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궁색해 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나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날벼락 치는 소리인가? 모든 가치, 모든 사고, 모든 것들이 경제적 풍요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지금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수출을 하기 위해 온 나라가 혈안이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했을까요? 이스라엘을 다녀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특히 갈릴리 지역을 유심히 보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향락, 사치, 쾌락의 흔적들을 볼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지역에는 예수님 당시의 수 많은 기득권자들의 집, 저택들이 그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눅16:14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대해 언급을 할 때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당시의 기득권자들이었던 정치, 종교의 지도자들의 물질적 풍요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부정, 부폐, 투기를 통해서 최고의 사치, 향락을 누렸던 것입니다. 집의 바닥에 깔린 건축재, 목욕탕, 주거 공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향락을 끝 없이 즐길 수 있는, 아마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건축물의 구조를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직업이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까지는 아버지 요셉을 따라 목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나사렛에는 언급한 그런 집들이 있었고
예수님이 그러한 집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지나친 사치 향락을 보고, 또 한편으로 가난 속에 질병 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고위층, 종교계의 부유층, 기득권자들은 스스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며, 또한 모세가 정해준 이혼법을 교묘히 이용해 성적 쾌락을 즐기며, 창기와 세리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심판관이 되어 가난하고, 굷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그들로부터 물질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고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정과 부폐, 투기와 같은 불로소득으로 인한 부를 누리는 부자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믿음을 바로 잡으신 것입니다. 부자 바리새인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에대해 질문한 것은 바로 자신의 물질적 풍요를 가지고 믿음을 사고, 구원 얻으려는 모습이 그대로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베어나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 다 팔아 가난해 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실까요? 우선 한 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무엇이냐 하면 나는 가난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한 것인가? 정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인가? 아프리카나, 이디오피아, 아프카니스탄 같은 어린아이들이 굶어서 죽어 가는 참혹한 기아 지경에 이른 가난을 주께서는 복되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하지 않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첫 째 가난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의 발가벗은 가난, 죽어 땅에 묻힐 때에 이 세상에서 손에 쥐었던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가난, 인간의 궁극적인 본래의 실존은 가난이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육신의 삶을 다하고 하나님에게 갈 때 우리는 가난하지 않고는, 아니 가난해야 하나님 곁에 설 수 있고, 가난이 너무 당연한 것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둘 째 부자되기 십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난해 지기도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꾸 부유해 지고 싶어 합니다. 더 벌고 싶은 것이 우리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생기고, 무리하기도 하합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장사를 하는데 주일에 손님이 많습니다. 어찌보면 주일 장사가 남는 장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가난해 지려면 주일 가계를 닫고 그 날 하루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되겠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가난의 축복,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누릴텐데,
이게 글쎄 ‘주일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체워주신다’는 것으로, 또 다시 물질적 욕구로 그 가난을 교회가, 목회자가 잃어버리게 합니다. 가난을 가난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한 목사님이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신앙에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소위 영성이라는 것이, 여러 각도로 볼 수 있겠지만 자기가 본 건전한 미국 성도들의 삶에서 참 귀한 것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하면 기도, 전도, 말씀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래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렇게 성령 충만하고, 주님을 간절히 찿고, 부르짖으면 신앙이 좋다고 하는데, 이 번에 미국의 참 온전한 성도들의 삶을 보니까 신앙이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인 미국의 기독교 가정은 대개 부를 분에 넘치도록 얻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회가 안정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 우리나라 같은 사회의 질서 속에서는 끊임없이 재텤크를 하지 않으면 언제 가진 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구조 속에 있어서 항상 그 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데, 미국의 온전한 기독교 가정은 그러한 것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청교도적인 청빈, 순종의 신앙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나누어 준다는 것입니다.

나누어준다는 것은 스스로 가난해 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나누어 주는데 그것을 자랑하거나, 특별한 선행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그 목사님이 다니던 미국의 전통교회의 한 장로님 가정은 둘째와 넷째, 그리고 다섯째 아이가 모두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장로님 이야기가 혈통이 아니라, 약속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요, 가족이라는 믿음을 따라 입양을 실천하였다는 것입니다.

몇 일전 T.V에서 허수경이라는 방송인이 시험관 아이를 낳고 눈물을 흘리며 ‘내 혈육’하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느낀 것은 자기 것, 자기 행복, 내 혈육이라는 자기 울타리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화면을 보면서 내 가족, 내 부모, 내 자식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가족의 단위를 열린 활짝 여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을 깊은 신앙이라 생각하고 새벽기도에 매달리고 전도특공대원이 되고 교회 일에 충성하는데, 그러나 자신의 일상의 삶으로 돌아와 보면 여전히 이기적인, 자기 울타리 만을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희생, 봉사가 없습니다. 반면에 미국의 어느 한 도시의 성도들은 소위 눈에 뛰는 요란스러움은 없지만, 조용히 기도 가운데 입양이라는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일들을 받아들입니다. 스스로 가난해 지는 길을 택합니다. 나눔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선을 행한다고 생각지도 않고, 마땅히 행할 일을 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입양한 아이들을 학비가 엄청나게 비싼 미션 스쿨인 사립학교에 보내면서 까지 입양 자녀를 최선을 다해 신앙으로 키워낸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눔, 스스로 부를 택하지 않는, 나눔에서 오는 복된 삶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면서 종교적인 위로만을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난한자에게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우며, 하나님의 동행에대한 간절함, 그리고 피부적으로 와 닿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축복을 잃어버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똑 같이 부유해 지려 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가난을 인정하고, 그러니까 가난의 어려움, 고통, 불편함을 인정하고 그리고 부끄러워 하지 않도록 하고, 가난함을 교회가 드러내고, 가난과 진정 함께하는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경림 시인이 최근에‘낙타’라는 시집을 내 놓았습니다. 신문기자와 인터뷰 하면서 그동안 세계의 여러 곳을 다녀 보았는데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보니 세계화의 폐허에 덜 물든 곳일수록 본질적인 어떤 것이 남아 있더라”고 하여, 기자가 그러면 ‘본질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자, “사람이 돈의 도구가 되지 않고 사람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시 중에 ‘세계화는 나를 가난하게 만들고-보르도에서’에서
“이제 나는 그 주막집 마루로 돌아가고 싶다
그 가난하던 마을로 되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간절함을 읽었습니다. 기자는 시인이 어릴적 고향 마을에서 겪었던 물질의 가난을 택했다고 하는데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며 교회가 가난을 선택해야, 아니 가난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년 전 군부독재와의 싸움이 한창 치열했을 때 분신이 점점 늘어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김지하씨가 분신은 절대 안된다 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펴며 생태적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 했던 생각이 납니다. 사람들이 분신하는 이유가 결국 추구하던 가치를 가로막는 절망 앞에 어찌할 수 없는 선택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선택을 하는 것인데, 그 때 느낀 것은 이것은 종말론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종말론이라는 것이 한 마디로 기존 세상의 가치가 무가치하다는 것인데, 군부독재와의 극열한 싸움 속에서 세상의 삶의 소중함을 뒤로하고 자기 삶을 멈추는 그런 절박함, 가로막힘에대한 몸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가치에 대한 무가치는 교회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가치관입니다. 그 때 느낀 것은 교회가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세상에게 내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신경림시인의 글을 읽으며 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가치, 즉 가난을 또 내 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가난해야지, 가난을 가난으로 받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이 세상 가치 기준의 빈부의 질서에서 돌이켜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를 선포하고 그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가난의 복된 새로운 질서를 위해 우리는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을 따라 기존의 부를 추구하는 세상의 질서에 줄 서지 말고 돌아섭시다. 마치 거대한 폭포수와 같이 쏟아 내는 부의 그 빠르고도 거센 질서를 거슬러 오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 버리심, 순종에서부터 오는 영의 감동, 역사에 우리 스스로를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손을 잡읍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나갑시다. 세상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하여 열매를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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