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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안에서 죄인으로 발견되는 기쁨(2008년2월17일, 사순절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2.18 18:24 | 조회 2293


은혜 안에서 죄인으로 발견되는 기쁨

2008년2월17일(사순절두번째주일) 빌3:3-11;신명기26:5-11

신명기서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그들이 원하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마지막으로 한 유언인데,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첫 농사를 지은 후에 얻은 소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1절 이하에 볼 것 같으면 첫 농사를 지어 얻은 소득의 처음 것을 취하여 그릇에 담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헌금은 단지 일반 시민단체나 아니면 복지재단이나, 장학회에 기부하는 것 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는 우선 대속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출13:11이하에 볼 것 같으면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 가서 첫 번째로 태를 열고 나오는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하나님께 바쳐야하는지 훗 날 자녀들이 물어보면 이집트에서 종 살이 하다가 이끌림을 받아 이집트를 빠져 나올 때, 바로가 고집을 부려 이스라엘을 내 보내 주려고 하지 않자 이집트 땅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것은 바로 이집트의 사람을 포함한 모든 처음 난 것의 희생 때문임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 난 수컷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난 것들을 위해 대속물로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대신 죽은 죽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드림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의 종 살이에서의 해방에대한 구원의 감격,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대속의 구원에대한 감사의 드림인 것입니다.

둘째로 헌금에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 시간, 역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창조자요 주인으로서, 나의 생명, 건강, 가족, 직장...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에대한 고백인데, 그러면 어느 정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당할까 하는 것인데, 최근에 와서는 구약의 십일조 개념은 이제 초대 교회의 공동체에 의해서 깨져서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그러나 ‘십일조의 정신’, ‘십일조의 드림’을 어떻게 다른 것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할 때에는 머뭇 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있을 때는 드리고, 없을 때는 말고, 기분이 좋으면 드리고, 나쁘면 말고, 또 깜빡 잊어버리면 다음에 하고 말지 하는 그러한 상황에 접할 때, 어떻게 신실한 하나님, 변함 없으신 하나님 앞에 그러한 분방함으로 설 수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여 한 번도 그의 신실함을 버리지 않고 한 번도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그러한 드림이 합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 나의 수입에 얼마를 할까 할 때 나름대로 스스로 정할 수가 있는데, 그 합당함은 어디서 찿을 수 있는가 할 때, 그런 면에서 나의 것 중에 십의 일을 드리는 것은 믿음의 조상들의 드림을 따라 그 마음과 동일한 자세로 나도 하나님께 그와같은 신앙으로 하나님께 십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헌금에는 나눔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11절에 보면
“레위 사람과 너희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와 너희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려라. 새 해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해가 되면, 너희는 너희의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따로 떼어서,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너희가 사는 성 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여라.”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나눌까요? 이스라엘이 이전에 바로 그렇게 가난한, 떠돌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이스라엘이 뛰어난 민족이어서 이스라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고 보잘 것 없는, 그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준 백성이니, 그것을 잊지말고 너희도 그러한 사람들, 특히 외국인, 고아, 과부, 병든자, 가난한 자들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헌금에는 이런 우리의 정체성에대한 자기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헌금에대해 본의 아니게 길어졌는데, 그런데 오늘 헌금을 할 때 보면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5절 말씀에 보니 “아뢰십시오”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고백하며 드린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고백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노예였고, 나라 없이 떠도는 장돌뱅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처음의 것을 드릴 때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꼭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정체성이란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정체가 무엇인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어느 시점에서 전환점이 있음을 봅니다. 즉 병고치고, 귀신쫓아내고, 말씀나누고, 함께 먹고, 마시고, 죽은 자를 살리고, 5병2어의 기적, 무수한 이적들을 베푸시는데 어느 한 시점에 이르러서는 그런 일들이 멈추어 지면서 십자가와 부활에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전환점이 되는 시기가 어느 때인가 하면 바로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 입니다.

베드로가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제자들이 고백한 예수님의 모습으로서의 역할에대해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전에 먼저 제자들이 자신에대해 어떻게 알고 있나를 시험하셨고, 그 후에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시고, 그러므로 고난,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정체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오래 전에 미국 T.V에서 “뿌리”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기억이 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대단했지요. 아마 그 당시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이 핍박을 받고 한 창 고조되었을 때 ‘알렉스 헤일리’라는 흑인이 자신의 정체성에대한 질문을 합니다. “피부 색이 검은 내가 왜 미국이라는 나라의 뉴욕에서 사는가?”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역추적해 갑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니 어느 농장의 노예였습니다. 그 주인이 누구이고,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어느 노예선을 타고 왔는지,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자랐는지, 그리고 자신의 조상이 아프리카의 한 부족의 추장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자신의 Identity, 자기 정체성을 찿는 중에 흑인들은 자기정체성을 회복하고, 흑인의 지위가 일층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민주당 예비 선거에서 바락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로 당선이 된다면 미국 흑인에게는 또다른 자기 정체성에대한 회복과 아울러 지위 향상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회복, 확인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 전환점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신앙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고기교회 교회당에 나아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까요? 친구 따라서! 부인의 손에 이끌리어! 목사 보기에 미안해서! 병고침을 받고! 자식들, 가족 평안하고 사업 잘 되기를 위해!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부모 체면 살려 주려고, 아니면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좋아서! 목사, 장로, 군사, 집사, 교사로서, 또 우리 집안의 신앙 내력을 따집니다. 몇 대째 장로, 몇 대 째 목사, 아니면 나의 신앙 경력이 모태 신앙입니다. 등 이렇게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신앙의 정체를 어디에서 찿을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정체에대해 말하면서 나는 율법대로 태어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 베냐민 지파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학파의 제자로,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자로서 유대의 공회원이기도 하다고 자신의 신앙의 계보를 말하지만,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찿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이 외적인 것에대해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기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에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와 부활을 얻었다고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기존의 것을 다 버리고 십자가만을 얻었냐 하면 빌3:9에 보면 한글개역의 번역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우리의 신앙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신앙, 자기의 직분, 자기 취향, 신앙의 자취, 또 세상의 지위나 명예, 다른 사람을 의식한 모습 등 이러한 것은 모두 허구입니다. 이런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 같이 해로운 것으로 여겨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나의 신앙의 정체를 제대로 찿을 수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신명기서의 말씀은 첫 번째 거두어들인 소산물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인데, 그냥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이 함께 합니다. 그 내용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본래 보잘 것 없는, 아무 땅도 없고, 가진 것 없는 떠돌아 다니는 장돌뱅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어우러진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이라 하면서 어려운 말 써 가면서 나의 Identity하며 복잡한 해석하기 힘든 정체성에대해 고민해 보는데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입니다.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벌레다, 흙 먼지다 그래서 긍휼을 얻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어라 했습니까? 죄인의 괴수 중의 괴수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은혜 안에서 죄인으로 발견되는 기쁨, 그 축복, 그 감사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한 자가 고백하는 감격의 말입니다. 자기가 죽은 자로 살아왔는데, 이제 산자로 생명의 삶을 살게 된 것에대한 은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은혜 안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또 나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 죄 사함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에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의인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의인으로 발견되는 것이 맞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입니다. 1992년도에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이 템플턴 상을 수상하였는데, 그 때 교계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성자로 부르자는 말이 얼핏 나온 적이 잇었습니다. 그 때 교계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어찌 성자일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카톨릭에는 성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나, 선한 일을 한 스님을 큰 스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는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인 것입니다.

야곱은 잘 알지만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로 치면 부동산 또는 주식투자, 기업합병 등과 같은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한 그러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의 그의 삶은 이집트의 총리 대신이 된 요셉을 만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섰을 때 야곱이 고백하듯이 야곱은 참으로 험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삶을 보면 몇 번이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 때 마다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지만 그의 모습은 여전합니다. 얍뽁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변화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만 딸 디나의 사건을 통해 보면 여전히 옛 야곱의 모습 그대로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야곱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사기성이 있는, 욕심이 한 없는, 누가 보더라도 싫어할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십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엎치락 뒤치락하지만 언제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그리고 경륜 안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인류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과학과 물질의 문명을 뽐내며 마치 무한한 능력이 있는 존재와 같이 스스로의 자유를 만끽하는 오만함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안에 죄된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 즉 바리새인과 세리가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열심인지를 하나님께 드러내 보입니다. 기도, 십일조,,, 그러나 세리는 성전 한 쪽 구석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머리를 뜯고, 옷을 찢으며 회개합니다. 누가 옳다다고 인정을 받았느냐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며 세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안에는 죄가 자리잡고 있다고 탄식을 하면서 누가 나를 이 죄의 죽음에서 에서 건져 줄까 하고 물으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을 합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죄인의 괴수 중에 괴수라고 말 하기 까지 합니다. 나의 정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이요, 벌레,요 흙 먼지, 죄인의 괴수 중의 괴수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떠나 불안하여 나무 숲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하나님 떠나면 이렇게 불안한 것입니다. 공허합니다. 어둡습니다. 무질서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의 붙들려 있는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의는 필연적인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의 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자존감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존감, 그 자기 의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나, 종교, 나라의 지도자일 경우 자기 의 에 붙들리면 자기 뿐만아니라 다른 함께 하는 사람들도 힘들어 지는 것입니다.

과연 자기 의, 자존 감을 어디에서 찿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스스로 죄인인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하였듯이 이스라엘이 보잘것없는 떠돌이요, 종살이 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의 종노릇하는 삶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에 부역하는 삶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시며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 은혜 그 기쁨이 우리의 의이며, 나의 자존인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자존감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자존감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참 평안한, 참 자유하며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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