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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이 되자(2008년1월27일,주현절후세째주일)

하늘기차 | 2008.01.27 13:43 | 조회 2104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2008년1월27일(주현절후세째주일) 왕상17:17-24

이스라엘의 신앙의 지도자를 두 사람 꼽으라 하면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도 바로 이 두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 때에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분열왕국 시대에 가장 타락한 왕 중의 하나가 바로 아합왕이었습니다. 바알 신앙을 국가적으로 공인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6:32에 보면 사마리아에 바알의 사당을 건축하고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바알은 폭풍의 신으로서 비를 내리고, 농사를 주관하는 가나안의 토속 신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모두가 이 바알 신앙에 빠져들었습니다. 그것이 당시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신앙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 유명한 갈멜산에서의 450대 1의 대결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으시며, 이 분이 바로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바알과의 싸움이 있기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비를 주시지 않아 어려웠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아합왕을 위시하여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 바알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택하여 이러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17:1에 보면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 아합왕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 때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섬기는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이것은 비의 주관자가 바알이 아니라 여전히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비가 오지 않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예언자 엘리야를 포함하여 가믐의 고통 속에 빠지게 됩니다. 얼마나 어려웠는가 하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렙다 과부가 자기의 자식과 한 끼니를 때우고 이제 죽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교우여러분! 이렇게 어려움이 심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러한 죽을 정도의 어려움을 당할 때에, 즉 살 소망 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고후1:9을 볼 것 같으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를 신뢰하지 말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렙다 과부가 하나님의 갑절의 은혜를 입는 것을 봅니다. 기가막힐 지경에 처한 속에 모두가 그 고통, 그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오직 사렙다 과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예수님은 눅4장에서 “오직 시돈 지방의 사렙다의 한 과부”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엘리사 때에도 많은 문둥이들이 있었지만 오직 이방인 아람사람 나아만 장군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 어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선포한 엘리야 자신도 물이 없어 사르밧으로 거쳐를 옮겨야 할 처지에 이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이런 큰 어려움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중심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상숭배,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물질숭배의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려움, 시험, 환난이 닥칠 때, 이 어려움이, 이 고통이 왜 나에게 오는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아픔을, 고통을 그저 힘들고 괴로운 것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내 죄 때문에, 내가 못 나서, 아니면 나를 힘들게 한 상대와 한 판 싸움을 벌이는 수준이 아니라, 그 어려움 속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를 헤아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마치 조개가 진주를 품기위해 자기 살을 파는 아픔을 감당한 후에야 아름다운 진주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아픔, 고통 속에서 잘 못된 것, 온전치 못한 것이 바로 잡힙니다. 스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 하나님은 각별한 손 실로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돌이키십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값진 보석과 같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믐의 어려움 속에서 사르밧의 과부는 하나님의 은혜를 2 번씩이나 얻습니다. 한 번은 일용할 양식에대한 은혜이고 또 한 번은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죽은 아이를 살리는 은혜를입은 말씀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일용할 양식의 은혜를 입는 중에 졸지에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이에 이 여자는 엘리야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신 어른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저에게 오셔서, 저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그러자 엘리야는 다락방에 올라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이의 생명을 살립니다. 이 때 이 과부는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야 저는, 어른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과,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 합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고 했습니다. 이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지혜와 은혜를 주지만, 오늘 저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에대해 관심을 갖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풍조가 엘리야 시대 당시 남쪽 유다나 북쪽 이스라엘과 별 차이가 없이 너무나 눈에 보이는 것에대한 이기적 욕구, 물질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혼돈케 하는 허구적 담론들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마음에서 이 말씀을 나누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사르밧의 과부는 엘리야에대해 하나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무슨 뜻일까요? 사르밧 과부가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은혜를 입고서 엘리야에대해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의 하나님의 사람에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 째 엘리야는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말씀에대해 순전하고 온유했습니다. 말씀을 더하거나 빼지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엘리야는 극심한 가믐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릿 시내가로 가라 했을 때에 갔습니다. 또 사르밧 땅으로 가라 하자 그대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숨으라 하면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아합 왕 앞에 ‘나타나라’하면 주저하지 않고 아합 왕 앞에 섰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거짓 예언자 450명과 싸울 때 먼저 바알의 선지자가 비를 부르며 길길이 뛰고서 아무런 응답이 없자, 홀로 저녁 해 질 무렵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수그러 들 때 엘리야는 백성을 자기 앞에 모아 세우고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주의 종이며, 내가 오직 주의 말씀대로만 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지금 북 이스라엘에서 행하는 그 모든 언행은‘주의 말씀대로’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녕코 자신의 뜻을 펴고자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펴고자 이 땅에 왔다고 합니다.

둘 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깨우치게 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아들이 죽자
“하나님의 사람이신 어른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저에게 오셔서, 저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자식의 죽음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일용할 양식의 은혜를 입었지만, 고백의 내용을 보니또한 자식의 죽음이 자신의 죄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죄가 엘리야를 통해서 스스로에게서부터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가 그 과부집에서 생활하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피해주지 않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해야 하겠지만, 엘리야는 그 과부의 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 앞에서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죄를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만일 계속 자신의 죄를 드러내지 않았다면, 회개의 고백이 없었다면, 아마도 아이를 살리는 은혜를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나 이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의 거룩함, 순전함 앞에 자신의 죄를 드러냈고, 그로 말미암아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회개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대한 아픔과 고통도 따르지만 회개에는 기쁨과 그 은혜가 따릅니다. 입으로 하는 회개가 아니라 돌아서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자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고백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죄를 깨우치는 삶, 죄에서 돌아서는 삶이 귀합니다. 성적 타락, 폭력, 물질만능, 이기적 투기... 이 모든 것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아름답게 미화되는 시대에, 그 스스로의 삶이 죄를 드러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죄가 드러날 때 나도 살고, 함께하는 모두가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근 조용기 목사님, 하용조 목사님 등 교계의 원로들 중심으로 회개의 집회가 있고, 또 당신들 스스로도 한국 교회가 귀족교회가 되었다, 작년 한 해의 대각성 운동은 그저 집회였을 뿐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만, 한국교회가 지금 누구를 쫓아 가고 있는지, 오늘의 이른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끈 장본인이 누구인지에대해서는 전혀 고백이 없습니다. 물질축복, 예수 잘 믿으면 성공한다는 출세, 성공 지향적 설교, 프로그램 등을 통해 교회가 공룡처럼 성장한 것에대한 진정한 회개가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가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합니다.’하자, 바로 예수님께서‘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죄 용서의 은헤가 없다면, 그것은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더 내 마음을 걸어 잠그고 마치 예수와 상관이 있는 것 처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도 죄를 깨닫게 하는 사람입니다.

셋 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이 죽자, 죽은 아이를 바쳐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세 번 그 아이의 몸에 엎드려서 기도하였습니다. 생명을 살려달라는 기도는 참 믿음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는 아직 죽을 병에 걸린 여러분을 보았고 그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해 왔지만, 생명을 살려달라는 엘리야의 기도를 아직은 해 보지 못 한 것 같습니다. 목사가 무슨 말을 저렇게 해 할지 모르겠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오는 것이고, 다가오는 죽음을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귀한 것이라고 하는 당위성 때문에 기도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으니 주께서 살리시고자 하신다면 살리지 않겠나 하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께서 필요하다면 기도하는 자에게 그러한 당위성, 합리성을 뛰어넘는 기도를 권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못 하면 자신의 관행과 게으름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미세하게 들리는 요청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집의 과부에게 이렇게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하고 부르짖습니다.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한 아이를 살렸고, 한 여인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17:1에 보면 “내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비는 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약5:17은 3년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한 것은 엘리야의 기도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에 늘 머물러 있는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엘리야에대해 야고보는 엘리야가 어떤 특별함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실제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선지자와의 싸움에서 이겼지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지만 그는 기도할 때 18:42에 보면 ‘땅을 바라보며 몸을 굽히고,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별명이 낙타무릎이었다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기의 조국인 네델란드에 가면 커다란 마차 바퀴들을 장식품으로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바퀴는 기고 생활에대한 이해를 잘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바퀴의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면 바퀴살을 하나씩 차례로 만나게 되지만, 중심축에 있으면 모든 바퀴살을 한꺼번에 만질 수 있다고 하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삶의 가장자리에서 삶의 중심으로 옮겨 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 삶이 바퀴 살의 바깥 쪽과 같이 뻗어나갈 때 그 다양한 삶의 내용들을 일일이 체크하거나, 그 삶의 여러 가지들을 잘 인지하며 온전히 잘 풀어나가면 좋은데, 그러지 못하고 그 하나 하나의 다양성을 미쳐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양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퀴 살의 중심에 있으면 그렇게 산만하게 뛰지 않아도 그 삶의 진정함 의미, 당연한 것, 가치 있는 것, 마땅히 지켜야 할 것, 누려야 할 것, 거부해야할 것이 무엇인지에대한 중심 축에 자리한다는 것입니다.

중심축이란 바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 중심이 아니겠습니까? 바퀴의 힘, 에너지가 중심에 있듯이 우리 삶의 축도 바로 기도생활을 통해 하나님 중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만능과, 과학문명의 이기심이 만들어내는 허구적 담론들과 정보들 속에서 기도의 축을 중심으로 허구적이지 않은 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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