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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힘써서 알자 ! (2007년11월25일,성령강림주일후스물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11.25 13:47 | 조회 2014


하나님을 힘써서 알자 !

2007년11월25일(성령강림주일후스물여섯번째주일) 엡1:15-19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이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세상 사람들이 감히 넘 볼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하며 이 하늘의 신령한 것에대해 힘써 알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하늘에 속한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이미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택하였을까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택하였다는 것은 구별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창 입시의 계절입니다. 수능이 끝나서 이제 본 고사를 준비합니다. 지금 한창 문제가 되는 것이 기존의 내신과 수능 만으로는 학생들의 실력이나 자질을 변별, 즉 구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구별, 선택은 그 구별 당사자들이 잘 해야 선별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잘 하는 사람을 뽑으려 합니다. 특목고, 외고,,,그리고 대안학교도 역시, 그리고 명문 대학, 더구나 기업은 말 할 것도 없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택하십니다. 오히려 병든자, 가난한자, 배우지 못한 사람을 택하여 온전케하시며, 그가 마땅히 드러내야할, 누려야 할 가장 귀한 모습으로 세워주십니다. 4절 말씀을 따르면 흠없게 하시어 어떻게 하였다고 합니까? 5절에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셨으며, 11절에서 상속자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당시 로마의 풍속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법률>에 따르면 양자를 포함해서 아내·자식 및 집안 남자의 자손에 대하여, 그리고 가족의 재산에 대하여 로마인의 가족의 가장이 지닌 지배권 이 있는데, 양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부권으로 들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것, 예를 들어 토지나, 귀금속, 아니면 어떤 사람을 양자로 삼으려 할 때에 증인들과 함께 저울에 동전을 세 번 던지는 의식을 통해 계약을 체결하는데, 두 번째 까지는 양자로 보내는 아버지가 그 아들을다시 되 돌려받는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동전을 저울에 던졌을 때에는, 자기가 보낼 아들을 다시 돌려 받지 않으므로 증인들 앞에서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거래가 다 끝나면 새로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는 재판관에게 가서 양자로 삼았다는 것을 법적으로 신고함으로서 모든 법적 절차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양자를 삼는 행위는 매우 복잡하고, 그리고 신중하게 행해졌는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절차의 신중함과 복잡함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선은 옛 부모로부터 받는 모든 법적 권한은 상실되며, 이제 새로운 아버지 아래에서 새로운 법적 권한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새로운 아버지의 재산에대한 상속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설령 이후에 친 아들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똑같은 상속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과거의 모든 이력이 말소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그가 빚을 많이 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빚도 모두 깨끝이 지워졌다고 합니다. 네 번째로는 법적으로 완전한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로마의 풍속을 통해 좀더 영적으로 양자됨을 풀이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8:15 이하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성령께서 증언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본래 완전히 죄에 물든 인성에 포로된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삶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가고, 옛 것은 깨끝이 지워졌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며, 하나님의 모든 풍요로움을 상속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같은 상속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상속하는 것을 우리도 같이 상속받으며, 또한 그리스도가 받는 고난을 우리도 같이 받으며, 나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과 영광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삼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6절에 보면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12절에도, 그리고 14절에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다는 말이 잘 와닿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금세기의 손꼽는 영성가 중에 한 사람인 토마스 머튼은 그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라디오, T.V
인터넷, 신문 등 대중 매체를 보노라면 세상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얼핏 T.V 드라마, 특히 아침드라마를 보면 그 주제가 거의 불륜입니다. 그러한 드라마를 보노라면 그것이 아주 멋있는 사랑, 불꽃 같은 사랑으로 여겨지게 합니다. 세상이 온전치 못해서 그런지 적지 않은 오락 프로그램들이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남을 헐뜯는 것으로 웃기고, 상대를 비하하는 것으로 억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들을 넋 놓고 봅니다. 이러한 세상 찬양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찬양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식으로 찬양을 받으실까요? 7-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식으로 우리가 찬양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7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서, 그분의 피로 구속 곧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습니다.”주께서 죄 짐을 다 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벌거벗었고, 부족하며, 연약함으로인해 드러나는 모든 죄의 굴레를 벗겨주셨습니다. 그다음에 8,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뭐라구요, 알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여 흠없게 하셔서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그 풍요한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신비한 뜻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비한 뜻은 무엇일까요? 10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멘’해야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죄로 뒤범벅이 되어 공허하며, 혼돈하며, 어두운 세상을, 점점 폭력적이 되어가는 세상을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을 예외 없이 하나로 통일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또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뜻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아, 그렇구나, 앞에서 왜 로마의 풍속을 길게 설명했는가 하니, 이렇게 하기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값없이 양자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상속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상속합니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 섭리를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됨을 위한 상속자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자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내용처럼 알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탈랜트가 아프리카의 한 부족을 찿아가 그 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체험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과 똑 같이 발가벗고, 사냥하고,,,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 한 번은 물을 뜨러 간다고 하면서 타조알에 구멍을 뚫은 물통을 들고 물을 길러 갑니다. 그런데 한 참 가더니 여기가 물 뜨는 곳이라고 토인이 함께 한 탈랜트에게 이야기 하는데, 어디를 둘러 보아도 물을 찿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토인은 자기가 서 있는 곳을 파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삽이나, 어떤 도구를 이용해서 파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말 한 뼘 정도 팠을까? 그 곳에서 물이 나기 시작합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야 모르지만, 원주민들은 그 곳을 한 뼘 정도만 파면 물이 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늘 일상적인 신앙에 머물고 만다면, 마치 발 밑에 물을 놓아두고 물을 찿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신앙의 깊은 지혜를 알라고 권면을 합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발 밑에 생명의 값진 보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엉뚱한 곳을 헤메고 다니지는 않았느지요?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알라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의 기업을 상속받으려 한다면, 먼저 부모가 무슨 뜻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통일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통일이 될까요? 하나님 보좌 앞에 일렬로 설까요? 인간에서부터, 고등 동물로 그리고 미생물에,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한 줄로 쭉 세워 한 뜻으로 묶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통일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 나름의 창조의 뜻을 따라 존귀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존귀한 모습을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때가 차면’ 그럽니다. 언제일까요, 바로 주님 다시 오실 그 때입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왜곡되어 그 피조됨의 존귀함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통일이 되려면, 남과 북이 통일이되려면 남과 북이 서로를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해 주어야합니다. 상대의 상황을 관용해야합니다. 너그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물이 어떻게 존귀하게 될까요? 벚나무가 어떻게 존귀할 수가 있으까요? 발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 하나가 어떻게 존귀할 수가 있을까요? 생명도 없는데 말입니다. 교우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피조물이 존귀한 것입니다. 죽은자 앞에 서면 아무리 아름답고, 귀하다고 할 지라도 결국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분, 영원히 살아계셔서 온 우주와 시간을 주관하시는 분 앞에 서면 모든 것이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존귀케 여기려면, 다른 피조물을 존귀하게 여기려면, 먼저 내 자신이 존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 사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에 너도 삼류, 나도 삼류 우리 삼류 끼리 놀아보자, 하면서 나 완전히 새 됐어 하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스스로를 천박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스스로를 바라보게 합니다. 부정함과 부패를 정당화합니다. 그러니 부끄러운줄을 모릅니다. 우선 자신 스스로가 온전하지 않고는 서로의 존귀함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우리를 왜곡되고, 상처받고, 거칠어지기도 한 우리를 괜찮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인정을 한다는 것은 바로 존귀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조건없이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누구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까요?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아야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바로 나를 인정해 주시는 아니 온 인류를 인정해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누가 찬양을 돌립니까?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자녀, 택함받은 믿음의 상속자를 통해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말씀 처럼 ‘때가차면’ 모든 것이 통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39-41에서 모든 피조물의 영광에대해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느날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살 떨림을 느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영광을 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계획하고 섭리하신 뜻을 따라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 왜곡되고, 오염되고, 썩어진 것에서 본래의 온전한 모습, 본래 마땅히 받아야할 존귀함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온 우주가, 온 시간의 섭리가 하나로 통일된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면 지금의 환난과 고통과 어려움은 비교가 될 수없다는 것입니다.

자존심 다 잃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감 다 잃었지만, 끊임없이 천박함에대한 도전을 받지만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갑니다. 저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풍요로움이 어떠한지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스런 상속이 얼마나 큰지를 압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습니다. 비록 공교육이 무너지고, 정치, 경제의 공신력이 땅에 떨어지고, 자연의 질서가 점점 더 속도를 더하여 무너진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의 맘몬의 거대한 힘이 온 지구를 덮는다 할지라도 제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9절 말씀은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그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의 문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소 소강 상태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세 천사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찿아 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라는 ‘나는 이미 경이 끊어진지가 언제’이고, 아브라함도 ‘나는 기력이 다 쇄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즐거운 일이 있으랴!’ 합니다. 표준 새번역에 “!”가 찍혀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정체입니다. 저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저도 그렇게 “!”를 찍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인본의 끝에, 벼랑에 하나님이 웃으시며 우리를 품어주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겸손히 그 품에 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하느냐?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 앞에 어느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주께 고백했듯이 우리도 그 고백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변하여 변화산에서 내려 오실 때, 한 귀신들린 아이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때 그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역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일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때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합니다. 그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바리새인 부자청년과 대화한 끝에 너의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했을 때, 이 청년이 고개를 갸웃하며 근심어린 모습으로 에수님을 떠나자 제자들이 저 바리새인 청년도 구우너을 받지 못하는데 우리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자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가요?“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이 할 수 있다는 말은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과, 교훈, 그리고 그 많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 능력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금드려준 이야기들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 수 있다는 말씀을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삶의 희망, 삷의 역동성, 생명력을 회복하시기 바랍니가. 오늘 이시대가 비록 아무리 천박하며, 존귀함을 거의 폭력적으로 무너뜨리며, 부정하며, 합당하지 않더라도, 온 피조물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존귀케 된다는 희망 속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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