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물을 찿지 못하였다(2007년10월 7일, 성령강림주일후열아홉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7.10.09 14:12 | 조회 2291


물을 찿지 못하였다

2007년10월 7일(성령강림주일후열아홉번째주일) 출15:22-27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사흘이 지났을 때에 마라라는 곳에서 물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물이 써서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오염이 된 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나뭇가지를 던져 물을 달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물 샘이 12이 있고, 종려나무가 70 그루나 있는 곳을 발견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물이 없어 죽겠다고 아우성 치는 이스라엘의 바로 옆에서 쉴 만한 나무 숲과 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로 광야 40년의 생활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은 인생의 여정에 있어서의 영적 샘, 영적 양식으로 늘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7:38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샘물은 땅을 팔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그 샘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샘을 파는게 문제가 아니라 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샘은 필수입니다. 특히 비닐하우스 농사는 더 그렇습니다. 교회도 여러번 샘을 판적이 있습니다. 보통 동네에서 파는 우물은 포크레인으로 파기도 하고 아니면 관을 묻어서 파는데 많이 파야 13m 정도 였던 것 같은데, 요즈음 샘을 파는 장비들은 몇 십, 몇 백 미터도 파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샘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샘이 어디서 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전문가들도 동네에서 우물을 팔 때 보면 ‘여기다’라고 파 보지만 그 곳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 안의 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삶은 참 퍽퍽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가 끝난 논, 묘를 심어놓은 밭이 거북등 같이 쩍쩍 갈라지고, 흙먼지만 풀풀 날릴 때 농사짓는 사람의 마음은 하늘을 바라보며 원망과 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 교회 뒤에도 논이 있는데 모두 7배미입니다. 그런데 논 맨 위에 샘이 있습니다. 그래서 왠만한 가믐은 견딜만 합니다. 그런데 논에 물을 댈 때 제일 위의 논에서부터 한 마지기 씩 거쳐서 맨 아래 마지기 까지 물이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3번째 배미의 물고를 막아놓았다고 합시다. 그 아래 논의 벼는 답답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잘 풀려야 할텐데 잘 안 풀리고, 계획하고 수고한 일들이 잘 되어야 할텐데 잘 안되고 면, 어떻게 합니까? 답답하고, 뭐 좀 시원한 것 없나 합니다. 꼭 점보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종종 사람들은 결혼, 사업, 입시, 그리고 부동산 투기 할 때 어떻게, 무엇을 선택할지 모를 때 찿아가는 곳이 있습니다. 점집이나, 토정비결, 손금 등을 보는 곳을 찿아가 물어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겉의 땅의 물 길만 보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가물어서 개울의 물이 고갈되기는 하였어도, 지하수의 물은 그대로 흐르고 있거든요. 인생의 물 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 우리 안에서 강 같이 흐르는 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샘을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우물을 팔 때 보면 기술자분들이 산과 골짜기의 세를 보고, 또는 막대기 2개를 가지고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는데, 그것도 잘 찿아내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귀신 같다고 그러지요, 또 그렇지 못해서 헤메는 경우도 있는데, 영적 샘을 발견하는데 있어서는 어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의 기득권과 차별이 있겠지요. 예수님은 요7:38에서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통해 영적 샘을 찿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찿아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샘을 믿음을 통해 찿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떠야 볼 수 있겠지요.

앤소니 드 멜로라는 인도의 신부님이 계신데, 도서관에도 그 분의 책이 있는데, 그 분은 짧은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지혜를 잘 드러내 주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 분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 가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겁니다. 한 손에 물동이를 들고서, 그래서 그 줄을 따라가 보니까 강 가에서 한 분이 주걱으로 강의 물을 퍼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 씩 물을 퍼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퍼주는 사람은 교회의 신부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는 그 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 가에 가서 물동이 하나 가득 물을 퍼서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적 샘은 누가 퍼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자신의 배에서 스스로 믿음의 양동이로 무한한 샘을 퍼 올리는 것입니다. 얕은 곳에서는 얕은 그러니 오염된 샘을 마실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곳, 깊은 자리로 나아간다면 신선한, 생명력 넘치는 오염되지 않은 물을 마실 수있을 것입니다.

지난 금요 밤토실 책읽기 모임에서는 도스또예프스키의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을 읽었습니다. 2권으로된 1400 페이지 분량의 대작이었습니다. 청년 때 읽고 이 번에 다시 읽었는데, 결국 시간이 짧아 다 읽지는 못하고, 그 대신 카라마죠프의 핵심이며, 도스또예프스키의 정수라 할 수 있는 5권 5장의 대심문관의 내용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어느 곳에서 종교재판과 마녀 사냥으로 이교도들과 이단자들을 거침없이 처형하던 그 시대의 재판관에게 어느날 저녁 마지막 심판 때에 오실 예수님께서 찿아오십니다. 재판관은 놀랜 가슴을 추스르면서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지금 이 시대에 찿아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우리의 지도 아래 잘 먹고 사는데, 왜 오셔서 풍지 평파를 일으키냐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은 당신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마귀에게 받은 시험에서 거부한 빵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어 죽었지만, 그 죽음으로 보여준 자유를 지키며 누리기에는 너무 어려워 아마 극 소수의 사람만이 따를 뿐이고, 대 다수의 인류는 모두 우리가 베푸는 빵 아래에서 즐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가 아니라 빵이라는 것입니다.

청년 때의 기억으로는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며 더 이상의 소설은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 인간 심연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문학도 더 이상 이러한 깊은 인간 내면의 질문을 던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는 정말 문학에대한 관심을 접은지 30여년 만에 다시 문학에대한 관심을 갖게된 것입니다. 그만큼 또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이성과 의지의 혼돈 속에서 형제들의 종교관과 인생관을 통해 자유의 본질을 파헤쳐 갑니다.

특히나 박경장님이 통찰력있게 이야기 했듯이 무신론자처럼 보이는 둘째 이반이야말로 궁극에 인류가 끊임없이 고민하며 끌어 않아야할 자유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박경장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나름대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대심문관은 인간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빵을 부족함없이 주면 만사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대한 관심을 차분히 기울이기만한다면 자유는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것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정치, 경제, 종교에 이르는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빵의 만족에 머무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가믐이 왔다고, 물길이 끊어졌다고 물이 없는 것이 아니니라는 것입니다. 논과 밭은 거북이 등같이 쩍쩍 갈라지며 흙먼지 풍풀 날지 모르지만, 땅 속 깊은 곳에서는 신선하고 오염되지 않은 물이 풍요롭게 흘러 넘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내적 본질을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논리나 또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빵을 나누어 주겠다는 공허한 사회주의에 모두 빠져 대심문관이 베푸는 빵에 배부르는 것에 머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 대통령 선거를 놓고도 보면 후보 경선자들이 내거는 슬로건을 보면 전부 빵입니다. 재벌의 총수가 범죄를 하여도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 그들을 집행유예를 선고합니다. 나라 전체가 아니 지구 전체가 그러한 신자유주의의 빵 경제에 목을 메었습니다.

여기서 교회도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에도 교회가 자꾸 행복, 웰빙, 가정, 치유, 상담, 경배와 찬양(마치 신앙의 저부인 것 같은)에 머무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있다고 지난 주에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의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처음 예수님이 공생애 직전 시험 받을 때 찿아왔던 사탄의 선언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우리는 무한정의 자유로 설정을 합니다. 대심문관도 사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한한 자유라는 개념을 설정해 놓고는 우리는 접근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빵만을 가지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빵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라고 합니다. 즉 먼저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우리의 태생이,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본래적으로 육을 입고 제한적으로, 가난하게, 부족하고, 연약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그것을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로 표현을 합니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것이 유한한 것 안에서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유한하다면 육적인 존재로서의 삶의 고통, 아픔을 그대로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심문관은 그것을 부자유하다고 합니다.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 찿아와 빵이 없음을 부자유함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가난함은 인간의 태생적인 존재의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벌거벗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보기에 심히 좋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 마귀는, 대심문관은 그것을 부자유하다고 합니다. 정치, 경제, 종교의 대심문관은 그래서 모두 물질 축복, 웰빙, 경제를 영원히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또스토예프스키는 그 연약함의 아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부족함에대해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에대해 자유라고 합니다. 바로 신비입니다. 고통의 신비입니다. 답답하고, 괴롭고, 일이 잘 안풀리고 할 때 점 집에 가서 앞 날의 횡재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 가난함의 기쁨, 감격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정치, 경제, 종교의 지도자들은 이 근원적인 아름다움, 인간 실존의 가을 단풍 나뭇잎 사이로 내리 쫴는 햇살 같은 가난함의 신선함을 망각하고 자꾸 옷을 ,덫입히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물과 관련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중동지역이 물이 귀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장님을 치료할 때 실로암 못가로 가서 씻으라 합니다. 암몬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을 치료받을 때, 요단강에 7번 들어갔다 나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 때 대야에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어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님이 성령을 불로 비유하면서 그 뜨거움, 다 태워버리는 폭력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교회를 비하했던 적이 있는데, 성경은 성령을 오히려 물로도 많이 상징하고 있습니다. 계 22:1,2에 보면 참 아름다운 물에대한 은유가 등장합니다.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
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오는 물 상징의 극치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에 예수님의 허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다고 합니다. 어쩌면 요7:38의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는 바로 예수님 스스로를 말씀하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흐르는 물과 피는 우리에게 생명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위해 죽으심으로 피와 함께 다 내어 쏟으신 그 생명의 물이 십자가에서부터 흘러나와 온 교회와 성도들에게 흘러넘쳐 그 교회와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샘 솟듯 흘러 영생을 얻게 합니다.유한한, 부족한, 힘없는, 연약한, 그래서 들 한계지워지는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는 것은, 그 제한, 한계의 벽을 열어 재끼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피와 함께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물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물이 써서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물이 오염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기 오염되지 않은 생명의 물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이 생명의 맑은 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허리, 배에서부터 피와 함께 흘러넘치는 생수를 마시고 우리의 벌거숭이의 모습 그대로 서로를 보며 서로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있지 않고 없다는 것을 서로에게서 확인하며 나눕시다. 그렇게 서로를 인정해 주고 위로합시다. 지난주에 말씀 통해서 보았지만 사도 바울은 갈5:1,13을 통해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탄 마귀의 말을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T.V나 인터넷 같은 무수한 대중매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거짓정보에 귀기울이지 마시고, 눈을 뜨고, 귀를 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는 자유하다’는 말에 꼭 귀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부족함의 자유, 궁핍함의 자유, 가난함의 자유, 그로부터 오는 내적 풍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는 아니 대심문관의 논리는 인류역사상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어 우리는 빵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라고 하지만 빵이 아니라 말씀이 우릴 자유케한다는 진리로 자유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2/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51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76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61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52 2005.09.02 16:30
155 [일반] 회개하지 않으면(2008년3월 2일,사순절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4 2008.03.02 15:10
154 [일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난의 축복’(2008년2월24일, 사순절세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45 2008.02.25 08:48
153 [일반] 은혜 안에서 죄인으로 발견되는 기쁨(2008년2월17일, 사순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94 2008.02.18 18:24
152 [일반] 가장 큰 사람(2008년2월11일, 사순절첫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1 2008.02.10 13:21
151 [일반]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2008년2월 3일, 주현절후네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4 2008.02.03 14:07
150 [일반]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2008년1월27일,주현절후세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4 2008.01.27 13:43
149 [일반] 너는 참 이스라엘이라!(2008년1월13일, 주현절후첫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77 2008.01.13 13:12
148 [일반] 주님을 찿는 큰 기쁨(2008년 1월 6일,주현절)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9 2008.01.06 17:07
147 [일반] 끊임없이 새로워지기(2007년12월30일, 성탄절후첫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82 2007.12.30 13:36
146 [일반] 복음의 능력( 2007년12월23일, 네번째대강절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52 2007.12.23 14:31
145 [일반] 앞 길을 예비하는 자(2007년12월 9일, 대강절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878 2007.12.09 13:21
144 [일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2007년12월2일, 대강절 첫번째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27 2007.12.02 16:13
143 [일반] 하나님을 힘써서 알자 ! (2007년11월25일,성령강림주일후스물여섯번째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14 2007.11.25 13:47
142 [일반] 내 안의 그리스도(2007년11월18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물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70 2007.11.18 15:40
141 [일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2007년11월11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물네번째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48 2007.11.11 17:01
140 [일반] 감사하는 마음으로(2007년10월21일, 추수감사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1972 2007.10.28 16:37
139 [일반] 믿음, 소망, 사랑(2007년10월21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물한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33 2007.10.21 15:27
138 [일반] 부자와 거지 나사로( 2007년10월14일, 성령강림주일후스무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64 2007.10.14 13:36
>> [일반] 물을 찿지 못하였다(2007년10월 7일, 성령강림주일후열아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292 2007.10.09 14:12
136 [일반] 위엣 것을 찿으라(2007년9월30일, 성령강림주일후열여덟번 첨부파일 [1] 하늘기차 2077 2007.09.30 1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