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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한 사람(2009년10월11일, 성령강림절후열아홉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10.12 11:35 | 조회 1914


오직 한 사람

2009년10월11일(성령강림절후열아홉번째주일) 눅4:16-30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그리고 병에 걸리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귀울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편파적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공평하십니다. 그들은 눈먼사람, 절름발이, 나병환자에, 굶주리며, 애통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창녀에 세리에 귀신들린, 그리고 감옥에 갇힌, 박해받고 억눌린, 남몰래 무거운 짐을 지며 힘들어하는 사람들, 율법을 모르는 천민들, 세상 맨 끝 벼랑에 서 있는,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자신이 자란 나사렛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그 곳에서 주님께서 가장 주의 깊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에대한 말씀인 사61장의 말씀을 읽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
보 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
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
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이 말씀을 보니 아! 예수님이 왜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는지 고개가 끄떡여졌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데로 행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읽고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 4:22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고 합니다. 은혜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겼다고 하는 것 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합니다. 도대체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가 바닥입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의사를 비꼬아서 '네 병이나 고쳐라'하듯이 지금 너희가 나에게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을 여기서도 해 보라고 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사렛 고향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엘리야 시대의 시돈 땅 스렙다 과부가 이스라엘 백성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은혜를 입었고, 또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그 많은 이스라엘의 문둥병자를 제쳐놓고 아람의 나아만이 문둥병의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하자 사람들이 분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 뿐만아니라 예수를 회당에서, 그리고 동네 밖으로 까지 끌어내어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려 하는 서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입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은혜롭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목수의 아들로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도 사람들은 '니 병이나 고쳐라', '너나 구원하라'고 합니다. 마치 '너나 잘하세요'같습니다. 교만입니다. 가진 것이 많습니다. 율법에대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성과 같은 지식, 그 마을의 추앙 받는 원로, 기득권 가진 것, 그 쥐꼬리 만한 것들이 예수를 주님으로 보지 못하고, 목수의 아들로만 보게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교회가 '부자여서 부족한 것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곤고하여 가난하고, 가련하여 눈멀었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셨듯이 가련하여 눈멀었고 벌거벗었다는 것이 바로 내 모습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오직 한 과부, 그리고 오직 한 시리아 사람 나아만 만이 기근에서 살아나고,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 가셨을 때에도 그 많은 병자들 중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은 그 중 가장 상태가 심한 병자에게 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성경은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긴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긍휼히 여김,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가장 잘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하게 받을 수가 있을까요? 스스로 가장 불쌍하며, 비참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자기 생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존전에서,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불쌍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가 있습니다.

다윗을 보통 성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죄를 범했거든요! 그런데 왜 다윗을 성웅이라 할까요?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김을 온전히 받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103에서 우리의 체질이 진흙이라고 하면서, 시22:6에서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을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로 고백을 합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 그래서 가장 깊은 골짜기에 모이듯이, 은혜도 그렇게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욥이 가족을 잃고, 재산과 건강 마저도 다 잃고, 그리고 친구들 마저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욥은 하나님 앞에서 벌레일 수 밖에 없으며 스스로 의롭지 못하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낮아지니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불쌍하며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김이 임하는데, 시103:14는 이런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듯이, 주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불쌍하다, 가장 비참하다고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위에서부터 흘러 넘치는 귀한 은혜를 가장 온전하게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은 참 잘 나가는 장래가 촉망되는 외교관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요한 목사님의 아버님은 시골의 작은 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렸을 때, 청소년기에 안 요한 목사님은 교회와 교회 신앙에대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짓궂어 아버님을 곤혹스럽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배당 문을 대 못으로 밖아 출입을 못하게 하는 등, 그리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였고, 신학을 전공하기도 했으나 휴학을 하고, 미국의 군사외국어학교에 유학할 기회를 잡았는데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내와 자식들도 떠나고 홀로 남게 되어 길거리로 내 몰렸는데 결국 서울역 지하도에 까지 흘러가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가장 낮은 자리에 까지 내려 앉았는데, 그 낮은 곳에서 자기를 인도해 준 사람은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는 가장 낮은 아이의 도움으로 참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저는 늘 교회와 이웃에게 나눔에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가끔 나눔에대해 이야기 할 때 단지 적선이나 구제 정도로 이해하는 것을 보는데, 나눔은 선을 많이 쌓아 무언가 더 좋은 것을 얻는 것이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일부를 떼어 주는 것으로 이해하기 십상인데, 나눔은 한 마디로 생명 나눔인 것입니다.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이 가을에 우리는 온 식물들이 자기가 여름 내내 결실한 결과물을 서슴없이 떨구어 내는 것을 봅니다. 지난 수요일 우리 처음자리 생태교실에서 고구마 캐기를 하였는데 참 잘 익은 탐스러운 고구마가 흙 속의 줄기를 따라 주렁 주렁 열려있는 것을 캐었습니다. 모두 함박 웃음과 기쁨으로 고구마를 캐어 쩌서 먹고 나누어 가져 갔습니다. 이것이 나눔입니다. 내 생명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밤나무도, 벼도, 온갖 식물들이 나눕니다. 그래도 생명 나눈다 하니 낯 설고, 부담 스러운지 모르겠지만 생명을 나눈다는 것은 생명현상, 즉 평화, 소망, 관용, 기쁨, 사랑, , , 이러한 생명을 나누는데, 그럼 그 나눔의 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낮아짐 속에 생명 나눔의 본이 있습니다.

빌2:5 이하에서 보면 주께서 본래 하나님이셨으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며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치욕에 까지 낮아지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자신이 가장 불쌍하며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요,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히 임할 수 있는 진정어린 비참함, 불쌍함은 낮아져서 복종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깊고, 신앙이 깊어지면 이렇게 점점 낮아집니다. 그러니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은혜가 더합니다. 은혜가 풍성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변화 후에 나중에 가서 딤전1:15에서 보면 스스로에 대해 죄인의 괴수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으면, 받은 은혜 다 잊어버리면 죄인은 내가 아니라 너입니다. 모두 너 때문입니다. 은혜가 없으니 자신이 보이질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쌍하며, 비참하고, 비천하고, 가난한지를 모릅니다.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빌2;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 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바로 낮아지며, 십자가를 죽기까지 따르는 마음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는데, 왜 예수님께서 이런 갈릴리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특별히 관심을 갖느냐 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은 시103에서 다윗이 고백했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지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 마음만 있으면 세상은 변화합니다. 아니 세상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새로워집니다.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은 늘 언제나 세상 그대로 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그대로 인체로 내 삶의 환경, 조건을 봅니다. 남편도, 자녀도,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는 사람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원수같은 이웃도 바꿔치기 해 보고 싶고, 원수 같은 사장 얼굴 보기도 싫고, 그래서 직장도 갈아 치우고, 집에 들어가면 집안이라고 짜증만 나고. . . 이제 지방 선거가 다가오는데, 몇 년 전에 국회의원 선거 때인가요 이정현이라는 가수가 부른 '모든걸 다 바꿔'라는 노래가 힛트를 치면서 야당의 로고송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자기는 하나도 안 바뀌면서 다른 것을 다 바꾸어 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돌을 떡이 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습니다. 변화말입니다. 그런데 자꾸 돌을 떡이되라 합니다. 자신에게 지워지는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빌2:8에 있는 말씀그대로 읽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이 한 마디의 말씀. 이 한마디의 말씀이 내 안에 없어서, 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이 한마디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 없어 늘 세상이 기쁨보다 슬픔, 평화가 아니라 불안, 화합과 하나됨 보다는 나뉘고 찢기우고,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에대한 감사보다는 짜증, 분냄, 신앙의 감격보다는 교회 생활의 지리함,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 변화되고 새로워 지기 보다는 주여! 주여! 하는 모습 만이 있습니다. 진보없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제 자리 걸음하는 피곤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왜그럴까요? 처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때 참 감격스럽습니다. 기적적인 병 고침, 실력도 모자라는데 예기치 않게 좋은 대학에 입학하거나, 무너진 사업이 기적적으로 회생하고, 참 좋은 직장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자녀를 선물로 받고, 어떤 분은 11년 만에 자식을 얻은 기쁨을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언제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할 때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만나였습니다. 날마다 만나가 내렸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이스라엘의 길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도착하고 부터는 만나가 그쳤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처음 받은 은혜, 옛날 신앙을 회고합니다. 옛날에는 어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받은 은혜와 기적을잊지 못해 또 구합니다. 마치 5병2어로 5천명이 먹은 후에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던 것이나, 바리새인들이 그 기적을 또 보여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기적을 다시 보여 달라는 곳에서 옮기어 가셨습니다.

교우여러분! 왜 우리의 신앙에 감격이, 기쁨이, 감사와 평화가, 그리고 소망이 상실되었을까요? 초보 때 받은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마치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유를 달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응석을 부리고 자기 것만 요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신이 지어야 할 십자가를 왜면합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바닥이 났습니다. 주여! 주여! 하지만 그것은 입으로만 합니다. 자신이 불쌍한 존재이며, 또한 다른 사람도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옵니다. 더 나아가 비천함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랄 뿐입니다. 낮아져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를 질 때 참 은혜가 무엇인지,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불쌍하고,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며, 정체인 것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우리에게서 생명나눔은 실종됩니다. 성경은 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거듭 확인시켜줍니다. 요즈음 수요일에 에스겔서를 읽는데 겔16:1-15은 우리가 탯줄도 끊지 못한체 피투성이로 거리에 버려진 자라고 합니다. 물로 씻기지도 못한 체 한 사람의 관심도 받지 못한 우리가 건짐을 받아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 낳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의복과 귀금속으로 치장하고, 관을 씌워 존귀한자로 세웠는데 그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피투성이로 태어나 버려졌다는 말을 읽노라면 어찌 그럴 수 있나 할 지 모르겠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본래 이렇게 죄에게, 죽음의 권세에게, 사탄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소망 없는, 평화와 관용, 참 기쁨 없는 버려진 존재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입양한 것입니다. 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입니다. 이 은혜를 평생에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을 얻은 그 은혜 다시 나누라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인과 갇힌자, 포로된 자, 병든자, 세상죄 지고 가는 자, , , 등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벧전2:9의 왕과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김과 낮아짐에서 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 은혜를 오직 한 과부, 오직 한 시리아 사람이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은혜는 바로 이 한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한 과부, 오직 한 시리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 은혜를 따라 나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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