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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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섬김( 2009년 8월 2일, 성령강림절후아홉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8.02 14:55 | 조회 1890


즐거운 섬김

2009년 8월 2일(성령강림절후아홉번째주일) 눅10:25-37

이 번 여름성경학교는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단은 이스라엘로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이스라엘로 향하기 직전 세상에 출현한 S - 바이러스의 침공을 받습니다. 이 S-바이러스는 세상에 전쟁과 테러, 환경 오염과 가정 파괴 등 세상을 혼돈과 무질서로 공허한 세게로 황폐화시키는 변종 바이러스입니다. 이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세계의 모든 공항과 도로가 폐쇄되어 비행기가 이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성지 순레단은 예수 원정대로 바뀌고, 세계를 혼란케하는 S-바이러스를 퇴치하기위해 예루살렘에 있는 백신을 구하러 이스라엘로 특수 제작된 비행기를 타고 출발을 합니다.

참 재미있는 발상이고, 오늘 이 세계가 처해있는 상황을 회화적으로 만화와 같은 컨셉으로 설정을 하여 아이들로하여금 쉽게 주제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선생님들과 지혜를 모아 수고를 했는데, 결과는 아이들에게 준비한 만큼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위 S-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는 백신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창문에는 여전히 S 문양의 로고가 붙어있는데, 전에는 빨간 S 였고, 이 번에는 군청색의 S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면 빨간 S는 바로 세상을 파괴하는 S, 즉 죄, SIN의 첫 글자이기도 하고, 사탄,SATAN의 이니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 원정대가 예루살렘으로 떠나 우여곡절 끝에 S-바이러스를 물리칠 백신을 찿아 오면서 빨간 S는 지금과 같은 S로 바뀐 것입니다. 이 S는 바로 섬김, 구원의 S입니다. 즉 SERVE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사탄의 역사를 돌이킬 수 있는 것은 바로 봉사라는 것입니다. 죄로인해 피폐해지고, 파괴된 세상을 이 전의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봉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받는 개념이 아니라, 무너지고, 파괴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세상을 섬기는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어떻게 세상 속에 존재하는가 라는 화두인 것입니다.

근래에 세계는 소위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지구촌의 전 인류가 서로 문화, 경제, 기술 등을 서로 평등하게 나누자는 것인데, 사실적으로는 세계적인 거대자본에의해 세계가 널뛰기를 하는 양상입니다.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으로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무엇보다도 모든 삶의 가치 체계가 물질, 돈의 가치만 남게된다는 것입니다. 의료, 교육, 직업,,, 등 삶의 틀이 경제 가치로 양극화 되어 끊임없이 기존의 틀을 언론과 교육, 금융, 정치 그리고 공권력을 통해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니 그러한 세계화에 앞장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과 FTA 자유무역협정을 세계 어느나라 보다도 제일 먼저 앞장서서 체결하였습니다. 마치 무한경쟁의 세계화 앞에서 홍의병 노릇하는 모습입니다. 천박한, 그리고 이기적인 독선적인 일들이 어떤 여과 과정이나 검증없이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결국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 샛터민, 사교육, 의료보험, 언론 등의 문제들이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고 있고, 그리고 전기, 수도, 철도 등의 모든 공기업을 경제 최우선의 논리에 따라 민영화 시키려고 합니다. 약자들을 보호하고, 나누고 함께 이끌어가는 정치, 정책은 사라지고 그야말로 강부자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오늘 이 시대를 울리는 경종과 같고, 탁류 속에 흘러들어오는 샘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을 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는가?" 그가 대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고 합니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고 합니다. 10점 만점에 10점의 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6:5에 기록되어 있고,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레19: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인즉슨 구약의 말씀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의 기록의 근간은 출애굽에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 모세 오경을 출애굽기나 신명기를 제외하고는 그냥 홀대하고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기 싫어하는 법에대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그런 자세에대해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놓치지 말고 지나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법 조항들이 누구를 위한 법이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조항 속에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 그리고 노예에 이르기 까지, 아니 가축들에게 까지도 관용과, 이해,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이 소외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기존 사회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식년에대한 규정이며, 또한 토지를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는 법이며, 어느 것 하나도 보면 인간의 삶을 구속하거나 억합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린느 법 초기에 신신당부하는 것은 너희가 애굽에서 이방인이었고, 종 노릇하며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의 바탕에는 긍휼, 불쌍히여김,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너무나 잘 알지요. 이 율법학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오늘 말씀을 보니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을 과시하려고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여기에 이 청년이 코가 꽨 것입니다. 이 율법학자이며 지도자인 청년에게 이웃은 늘 자기와 함께하는 성전을 중심으로, 율법을 중심으로, 제사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전혀 다른 이웃에대한 관점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넘어가는 산 중의 길에서 강도 만나 그냥 버려두면 죽을 수 밖에 없는 한 강도 만난 사람에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이웃이 아니라,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이웃에대해 이야기 하라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 라고 하면 우리의 몸은 굳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물었듯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이 강도 만난자의 이웃입니까? 이 청년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입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는 이 이야기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시대 속에서 풀어내야 하겠습니다. 이야기는 항상 동 시대에서 살려내야 합니다. 그럼 오늘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가요? 칼 들고 얼굴에 복면을 한 사람에게 돈과 귀금속을 털린 사람인가요? 이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 하는 강도 만난 사람은 폭력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폭력일까요? 오늘 대한민국의 수도 한 복판에서 대낮에 강도당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죽지는 않았는데, 지금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사람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용산재개발 과정 속에 쫓겨나게 된 세입자들입니다. 놀랍게도 이 시대의 강도는 누구일까요? 이 세입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음으로 내 본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또 지금도 평택에서 벼랑 끝에 내 몰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으시고 계십니다. 어떻게 보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강도만난 사람이기도 하고, 또 강도일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도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듯이 그야말로 뒤섞여있는 혼돈한, 무질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저는 이 강도 만난 사람이 단지 사람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자연이야말로 역사 이래 동시대에 가장 큰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그동안 자연에게 해 온 인간들, 특히 오만 방자한 기독교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의 무자비한 폭력은 인류 역사 속에 강도 중의 강도로 남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통회자복해야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면서 얼마나 무자비하게 지금도 천해의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그 폭력을 그대로 다시 받을 것입니다. 폭력은 반드시 다시 돌아옵니다. 여러분 종이에 손을 베 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종이가 사람이 쓰일 수 있도록 재단될 때, 이 청년 시절에 을지로 인쇄 골목에 인쇄물 때문에 자주 들르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 마다 가 보면 시퍼런 작두 날에 쌓여있는 종이 들이 정확하게 잘려지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그렇게 잘린 종이가 우리의 손을 베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4대강 사업에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돈의 탐욕 때문에 허울좋은 홍수조절을 위한 개발이라 거짓으로 포장하고, 폭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바로 우리가 자연의 이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남한의 아름다운 산천을 누가 강도질 하고 있나요? 아니 다시 묻고 십습니다. 누가 이웃인가요? 예수님은 그 청년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여라"하십니다.

이 말씀은 28절에서도 언급하였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그대로 행하여야 할 일이고,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회개하고, 성령 받고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는 수준이 차원이 아니라, 믿음이 행위로 드러나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이야기가 진지하고 무겁게 흘러 간 것 같습니다. 이 번 여름성경학교는 S-바이러스를 퇴치하기위한 백신을 예루살렘에 가서 구해 왔는데 그 백신의 이름이 바로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섬김이 아니라 즐거운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이 섬김이라는 말이 마 20:28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교우여러분 기쁜 섬김으로 죽음의 삶에서 벗어나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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