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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2009년 6월28일, 성령강림후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6.29 15:15 | 조회 2006


예수님의 마음

2009년 6월28일(성령강림후네번째주일) 빌2:5-11
간혹 의구심을 갖고 저에게 묻는 질문 중의 하나는 진화론에대한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저에게 진화론에대한 타당성을 묻습니다. 그 때 저는 언제나 그렇게 대답합니다. 신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는 개념 자체가 틀리다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신앙 고백의 글인 것입니다. 간혹 성서를 과학적인 시각에서 보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창조 과학회입니다. 그러나 정도가 자나치면 득보다는 실이 많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특히 창세기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오류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진화는 진화의 논리 구조가 있고, 신앙은 신앙의 언어체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또한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큰 손과 편 팔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 안고 뛰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화에대해 이야기 하라면 저는 영적 진화에대한 이야기를 하소 싶습니다. 프랑스의 신학자 떼아르드 샤르뎅은 영적 진화의 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영성이 점점 진화해 간다는 것입니다. 점점 더 높이, 더 넓게, 더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앞으로 스타트랙 같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물체 순간 이동이라는 과학의 매체가 등장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그러한 과학 물질 문명을 사용하는 인간의 도덕성, 마음의 됨됨이가 여전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라고 한다면 그 과학 문명의 발달과 진화가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성서가 우리에게 귀단아 이야기하고 있는 영적 진화에대해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성은 어디까지 진화해 갈까요? 엡3:18.19를 보면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마음’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 주 수요일 밤토실에서 아동문학평론가인 이재복님께서 꿈, 옛이야기, 판타지에대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 이 세가지 꿈, 옛이야기, 환타지가 모두 한가지로 통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날에 시골스러운 동네에서 농사짓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별로 잘 짓지는 못했지만 동네 어른들의 귀동냥을 통해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양식이 없어 굶어 죽거나, 배가 곺아서 힘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예전에는 농사가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도 계시고, 우리 이태훈 집사님, 우리 교우님들의 손은 아직도 낫, 호미,,,, 등 농사 연장을 잡으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익숙해 있습니다. 이제는 농사가 다 지나갔는데, 그저 사는 것이 농사요, 놀이도 농사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많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열심히 나무하고, 철따라 푸성귀 심고, 밭 농사 지어서 그렇게 먹고들 살았는데, 이제는 시간이 많다고 하면서, 그래서 요즈음에는 자연의 논, 밭 농사도 중요하지만 마음 농사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 밭에 온갖 잡풀들과 독초가 자라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자기 좋은 것 따라,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인 마음,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원치 않는 결실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종종 그릇으로 비유합니다. 바구니에 꽃을 담으면 꽃 향기가 나는 꽃 바구니가 되지만,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냄새 나는 쓰레기 통이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 그릇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요? 우리의 마음 그릇에 좋은 열매 소담하게 담아 함께 나누어 먹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 그릇에 무엇이 담겨있나요? 미움, 시기입니까? 아니면 사랑, 평화... 인가요?

한 체로키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인데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분개 자기연민 죄의식 열등감 거짓 허영 잘난 체하고 자신의 거짓자아를 나타낸단다.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선의 고요함 겸손함 동정심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를 나타낸단다. 이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동안 그 말을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다고 했답니다.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성령의 9가지 열매에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육체의 욕심에 대하여도 쭉 나열을 하고 있는데, 성령의 일과 육체의 일은 서로 거스르며, 적대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모임, 단체, 국가이든지 서로 싸우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도둑질도 마음이 맞아야 해먹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육과 영이 싸우면 삶이 소진되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스스로 ‘아 나는 참 비참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는가 하였습니다. 누가 이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같아서는 내 마음 바구니에 성령의 열매 하나 가득 담아 함께 나누고 싶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갈5:25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앞 24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밖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삶,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성령의 감동이 찿아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는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건국의 아버지의 탄생에는 그 어머니 한나의 신앙이 있습니다. 한나의 가족은 그 내력이 좀 복잡하였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늘 업신여김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한나의 삶을 지탱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기도였습니다. 한나는 정말 하나님께 아들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엘리였는데, 성경에 보면 엘리가 영적으로 매우 혼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날 그렇게 간절히 서원까지 하면서 기도를 하였는데, 그 때 한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입술만 움직이고 기도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한나에게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술이 취한 줄 알고 술을 끊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나가 얼마나 섭섭하고, 답답하고, 억울하였겠습니까? 그래서 한나는 엘리제사장에게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 처럼 기도를”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엘리는 한나에게
“그렇다면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가 간구한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오”합니다. 그러자 한나는
“제사장님, 이 종을 좋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만일 한나가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 이 영감탱이... 하고 털어놓기 시작하였다면 이 평화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을까요? 참 귀한 것은, 이 한나가 그 퇴락한, 너덜 너덜한 엘리 제사장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 한나의 마음은 마치 마른 스폰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훌륭하고, 귀한 말을 하여도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결국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 같습니다. 한나는 평화의 열매를 먹게 되었고, 기도의 응답 을 받았습니다. 한나는 마치 난시청 지역의 비행접시 안테나가 T.V 전파를 잘 받아들이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노아는 당시의 퇴락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음이지요. 들을 수 있는 귀, 즉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가요?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가요? 수14:12에 갈렙은
“이제 주께서 그 날 약속하신 이 산간지방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때에 당신이 들은 대로, 과연 거기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은 크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그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마음입니다.

또요, 성경에 이러한 마음의 성도들이 줄줄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신앙고백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평화, 확신, 등 이러한 열매들은 그 바탕이 무엇인가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 본문 빌2:8에 보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여러 영적 지혜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데, 그 중에 특히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순종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십자가 순종은 영적으로 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창3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과 멸망, 육적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어디에서부터인가요? 사탄의 말을 듣는 것에서부터입니다. 그런데 하와가 사탄의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듣나요? 죽기로 듣습니다. 창2:17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창3:4에선 뱀이 거꾸로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말을 듣나요, 사탄의 말을 들었나요? 네!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데, 이 건 죽기를 각오한 들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죽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분이 오셨습니다.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에 나아가 기도하였을 때에 사탄의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리고는 묵묵히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의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낮출 때 죽기까지 순종하여 낮추었다고 합니다. 그 마음입니다. 이 마음에 온 인류를 다 태우고도 남을만한 큰 방주를 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 도종환님의 시중에 ‘깊은 물’이란 시가 있다고 합니다.

깊 은 물<도종환>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그대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개울엔 종이배를 띄우고, 큰 바다엔 여객선이나, 화물선을 띄웁니다. 사람들은 물을 보고 그 물에 뜰 수 있는 배가 어떤 배인지를 압니다. 과연 우리 가슴에는 종이배 하나라도 뜰 수 있는 깊이와 여유를 지니고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마음의 깊이 보다는 자기 생각, 자기의 뜻에 사로 잡혀 시냇물은 커녕, 메마른 돌밭이나, 사막이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배처럼 작고 가벼운 남의 아픔이나 슬픔, 고민 같은 것을 조금도 담을 수 없는 마음은 이미 바닥이 드러난 마음입니다. 넓고 깊은 마음의 소유자를 만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바닥이 낮고 낮아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사람들의 상처와 웃음과 눈물이 섞여와도 다 푸근히 감싸서 정화시키고, 담아서 띄울 수 있는 그러한 마음 바로 십자가의 낮고 낮은 마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십자가에 달리어 죽기 까지 낮아지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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