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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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가지 간구(2009년11월22일, 성령강림절후스물다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11.22 17:51 | 조회 1725


4가지 간구

2009년11월22일(성령강림절후스물다섯번째주일) 엡1:15-23

산에 오르면 참 좋습니다. 나무와 바위들, 그리고 개울을 따라 오르면 새 소리와 꽃들을 보며 산을 오르노라면 참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산을 다 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산을 보려면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못하면 단편적인 자기 개인적 신앙체험에 머무를 수 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럴때 성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모르면 행여나 영화 마더에서와 같은 광기어린, 집착하는, 편협한, 빗나간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욕망을 소망이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대하여 사랑도 많고 교회를 향한 헌신이 넘처 나지만 그러나 몇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 하나님의 계시에대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에 열심히 있었고, 그리고 사랑이 넘쳐 났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섭리의 깊은 곳에는 아직 당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늘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 나라에대해, 그 비밀과 섭리를 모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자기 일을 하는 경우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이 여리고성 앞의 눈먼 거지의 눈을 뜨게 했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참 인상 깊은 말씀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예수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세 번이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일에대해서 들었건만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체 했는지, 주님의 그 간곡한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눈 먼 거지는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려면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무만 보지 말고, 숲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17절에 보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롭고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섭리와 경륜을, 우주적이며, 초 시간적인 역사를 주관하시는 , 머리카락 한 올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찌 우리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힘입어 에베소 교회를 위해 간절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엡4장 이하에 볼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권면을 하는데, 4:14에 보면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라"고 합니다. 또 5:6에도 보면 "아무에게도 헛된 말로 속아넘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또한 방탕하여 탐욕에 빠지지 말라고 교회를 향하여 권면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 교회가 안 팍으로 도전을 받고 있는데 특히 내적으로는 헛된 소식과 교훈에 이 것 좋다, 저 것 좋다 하는 것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 말씀이 그러한 점에 있어서 좋은 교훈이 됩니다. 첫 째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겠고. 둘 째 예수를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고. 세 째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려 받아야 할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네 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는지, 그 능력을 알아야 할 것을 간곡하게 기도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귀로, 감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성과 감성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도록 간구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참으로'라는 말을 더 붙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참을고 알 수 있을까요? 3-13에 볼 것 같으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10 번 이상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많은 사람들 중에 택하시어 우리가 죄로 얼룩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다고 인정하시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부르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했으며,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4절과 6절에서 거듭 택하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에정하셨다고 합니다. 혹 성도분들 중에 이 말씀을 우리 교회다니는 사람만 택하시고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은 택하지 않으셨서 라고 생각 한다면 정말 골치아파집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세상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택하여 자녀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앉으신 우리 모두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참 얼마난 복잇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편협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심오한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졌는데,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그 일, 그 계획, 그 뜻,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된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놀라운 영적 축복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이 그리스도에게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죄 사함을 받은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 까지입니다. 그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 속에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신앙과는 전혀 차원이 틀린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우주적이며, 종말적이며, 초 시간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깨닫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직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그 자리에 까지 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알자는 것은 하나님의 그 깊은 섭리, 하나님의 뜻의 비밀의 자리에 까지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 비밀, 그 섭리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십자가가 온 세상과 역사와 인간, 자연을 하나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됨이 엡2:11-22에서 볼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을 통해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되는 신앙의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바울은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깨뜨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그 두터운 벽을 깨뜨린(오직하면 베드로가 환상 중에 3번이나 거절했을 정도로 두터웠던 벽) 바울의 신앙고백,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신앙 고백은 오늘 우리 시대에는 어떻게 고백되어질까요? 어떤 벽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나요? 우리에게 씌워져 있는 참 가슴 아픈 남과 북의 분단현실, 그리고 빈부의 심한 격차, 다시 말해 토지 사유제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토지 불로소득으로부터 오는 많은 문제, 진보와 보수의 갈등, 문명과 원시의 갈등 , , ,9.11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진 거대 자본, 종교, 민족 갈등이 뒤엉킨 중동의 문제, 기후변화,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을 통해 보여지는 인류 공동체의 위기 등의 갈등, 분열, 원수맺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됨을 볼 수 있을까요? 언론, 4대강, , , 지금의 우리 나라에서 벌어지는 코메디 같은 사회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가 우리 시대가 갖고 있는 갈등을 푸는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비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이러한 현실에 까지 우리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둘 째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 하기를 하나님의 백성이된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그 소원을 어떻게 간구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37:4-11에 볼 것 같으면 4절 이하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의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우리가 나아가는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의지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고 합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죄짐, 나의 질병, 나의 고민,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므로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있으며, 입에서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올 수 있는 사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한 다리 걸치고, 하나님에게 한 다리 걸치는 그리고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의 소원을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6절에 볼 것 같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의를 빛같이, 그 사람의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밝히신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맡기신 의, 즉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을 그 사람에게서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맡기신 그 선하신 뜻을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람의 의를 밝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또 하나님의 복은 복주머니를 차고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꺼네 쓸 수 있는 그러한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섭리, 뜻을 드러내는 소원, 하나님의 공의를 밝게 드러내는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그 소원을 응답받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합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합니다.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이 잘 된다고 분해하거나 노하지 말고 그저 묵묵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일을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하라고 하십니다. 그 불평과 불만의 화살이 내 영혼을 헤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흐트러 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사업은 불평과 불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해소, 자기 과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 째는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기 바란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 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즉 그 비밀과 섭리, 경륜을 알고, 그리고 그 하나님에게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에게 또한 축복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축복은 하도 커서, 그리고 놀라워서 우리가 좀처럼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축복은 무엇일까요? 축복에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축복은 한 세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아우른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내리신 축복이 지금 이 세대를 통해서도 면면히 흐른다는 것입니다.

과연 대를 이으며 내려오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경제, 명예, 권력, 건강의 축복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몇 대를 잇지 못합니다. 성서 속에서 주는 축복, 면면히 성서 속에서 창조이래로 흐르는 축복은 무엇인가요? 바로 그것은 믿음의 축복, 상속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히11장을 통해 계속 대를 이어 내려오는 믿음의 축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믿음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큰 축복 중에 축복인 것입니다.

4번째는 믿는 사람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권능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능력이라고 합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능력은 이 세상과 다가 오는 세상의 모든 것들,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표현을 하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천사숭배의 신앙이 널리 퍼져 있던 시대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존재도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믿던 기원 초의 시대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천사와 악마에대한 그러니까 흔히 신화에나 나올 법한 정령들이 살아있는 것 처럼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존재하는 모든 것 보다 뛰어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좌절시키며 절망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가장 힘들게 하며, 고개를 떨구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그 어떤 것 보다 위대하시며 강하십니다. 그 분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4 가지 간구를 통해 무엇을 어쩌라는 것일까요?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뿐만아니라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세상이 하나되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문명의 헬라와 미계한 야만인들, 같은 민족 안에서도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갈등하고, 개인에게 있어서도 악과 선함의 갈등이 늘 자리하고, 인간과 자연,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일치 등, 세상의 모든 불일치, 나뉘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위대한 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화해의 도구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일치, 조화를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일치가, 화해가, 하나됨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암을 치유하는 의학 기술을 발견하였습니다. 전세계의 사람을 이 한 사람이 치료 할 수 없습니다. 아마 자기 동네의 암 환자를 치료하는데에 만도 평생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치료 방법을 전세계에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과 박사들에게 이 치료법을 가르쳐 전세계에 알립니다. 교회와 주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며, 몸인 교회가 주님의 그 인류 구원, 인류가 하나되는 사역을 교회를 통해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사도바울의 4 지 소원의 결론은 그리스도요 교회입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라고 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는 충만함의 충만함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엡3:16-19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풀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함께 읽으며 오늘 말씀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그분의 풍성한 영광으로, 그분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해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해주시기
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
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
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여러분
이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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