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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 종교 개혁(2010년10월24일, 성령강림절후스물두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10.24 15:48 | 조회 2062


프로테스탄트 : 종교 개혁

2010년10월24일(성령강림절후스물두번째주일) 대하34:3,8,19,20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이면서 종교개혁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기 때문에 종교개혁 주일과 겹치게 됩니다. 그래서 늘 종교개혁주일을 지키지 못하는데, 오늘은 종교 개혁의 의미에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우리 개신교를 보통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그에 반하여 천주교는 캐톨릭이라 부릅니다. 그 의미는 보편적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어디나 있는 하나의 유일한 보편적 교회 그것이 케톨릭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둘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트는 쉽게 말해서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이고 보편적인 캐톨릭에대해 아니다 하고 저항하고 나온 것이 바로 개신교입니다. 그래서 개신교에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 변화의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개신교의 정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개신교는 끊임없이 개혁하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과 변화의 정신이 기원 전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요시야 왕의 개혁을 볼 수가 있는데, 요시야는 8세에 왕위에 올라 31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합니다. 그 당시 국제정세는 앗수르 바니팔이 다스리는 앗수르제국이 내적 권력 싸움으로 몰락하면서 신흥 바벨론이 새롭게 강국으로 떠오르는 변혁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랜동안 우상숭배로 쩔어있었는데 이런 시대적 어두움 속에 서 먼저 개혁을 시도한 사람은 요시야의 증조부 히스기야였고, 그러나 히스기야가 죽자 개혁은 중단되고 맙니다. 그러나 다시 손자인 요시야 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보다 더 철저하고도 근본적으로 개혁을 일으키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개혁의 과정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산당을 포함한 모든 우상을 불태우고 없에 버립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성전을 수리합니다. 다음으로 정점을 찍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찿아 그 말씀을 실행하며유월절 절기를 회복합니다. 결국 말씀의 자리로 돌아 오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출발 점이며, 개혁의 자리인 것입니다.

종교 개혁은 마틴 루터에의해서 발발하였습니다. 1517년 10월31일 정오에 마틴 루터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비텐베르그 성곽 교회 앞에 내 걸게 됩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면죄부였습니다. 면죄부는 십자군 때부터입니다.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이교도들과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는 특혜를 베풀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고 기부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었고, 그러한 기부금이 교황청의 중요한 재원이 되기 시작하면서 성당, 수도원, 병원을 건립할 때 기부금을 내는 사람들에게도 면죄부를 배부하게 됩니다. 당시 베드로성당 건축이 100년 이상 지속되었는데도 여전히 완공을 하지 못하자 교황 레오 10세는 성당을 신속히 완성하기 위해 면죄부를 통해 건축비용을 마련합니다.

한 편 독일의 알버트라는 교구 감독이 마인츠의 감독직을 요청하자, 교황은 거래를 합니다. 8년 동안 면죄부를 팔 수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반은 베드로 성당을 위해 바치게 합니다. 그당시의 면죄부 판매를 종용하는 설교를 들어보면 귓가 솔깃해 집니다.

“. .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과 세상을 떠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에대해 생각해 보십시오...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 가운데서 맹렬한 시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될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죄를 슬퍼하고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기부금을 바친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죽은 친척들과 친구들이 여러분들을 향해 애우너하며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말은 유명하지요 “...동전이 궤 속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영혼이 연옥에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저들의 영혼을 낙원으로 인도하기를 원치 않으십니까?” 정말 호소력 있는 웅변설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신분에 따라 왕족과 귀족은 더 많이 내고, 평민들은 적게 면죄부를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돈으로 구원을 사는 꼴이 된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중세교회의 타락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루터가 신부가 된 동기는 마을 근처의 시골길을 걸어 가다가 갑자기 어두워지며 소나기와 함께 천둥 번개가 자기 옆에 있던 친구를 내리쳐 친구는 죽고 자신은 살게 되었는데, 두려워 땅에 엎드려 지면서 삶에대한 질문을 하게 되고 그리고는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수도원 생활을 하는 중에 또 한 번 두려워 떠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신부가 되어 미사를 처음으로 집전하면서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성례집전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되어 이 더러운 몸에 찿아오시는 가 라는 생각에 이전에 벼락이 떨어졌을 때의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후 엄격한 수도원의 금욕 생활을 수행해 가는데, 아무리 고행과 금식과 기도와 규율을 따라도 마음에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육체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이 오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수도원 생활이 자신의 영적 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조금도 자신을 의롭게 하지 못하자 갈수록 하나님에대한 분노와 증오심만 키우게 되었는데, 그런 중에도 그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을 연구하였는데
“어떻게 가장 거룩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이 의롭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죄인인 루터 같은 인간에 의해 음미될 수 있을까?”하며 고민하는 중에
시22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토해낸 말을 읽으며 그리스도이신 주님 자신도 육체의 고통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이내 왜 주님이 버림을 받을까 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장 죄 많은 인간 처럼 버림을 받았으며, 이 버림 받은 것이 루터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루터가 자기 노력을 통해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버림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사랑이 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연결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롬1:17 말씀을 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
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루터는 의로움은 행함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요, 선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입음으로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고 구원 받아 자유함을 얻는 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실제 루터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순례 했을 때에도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혀로 핥으면서 오르락 내리락 할 정도로 고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행함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고 당시 중세의 어두움 속에서 빛으로 나아 올 수가 있었고, 세상도 빛으로 인도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루터를 자유케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루터는 말씀을 통해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끌어냅니다.

지금도 맹인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안요한 목사님은 청년 때에 정말 장차 외교관의 꿈을 간직한 잘나가는 청년 엘리트였지만 갑자기 이유 모를 실명이 찿아오면서 그는 가족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서울역의 노숙인의자리에 까지 내려감니다. 죽음이자기 앞에 있었지만 그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절망 속에서 희망으로 이끈 것은 바로 한 구절의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수1:9입니다.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이 말씀이 결국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 것입니다.

몇 일 전에 ‘클라스’라는 그러니까 교실이라는 다큐 영화를 보게되었습니다. 중학교 아이들이 교실에서 선생님과 학교 생활을 하는 내용을 담은 다큐였습니다. 우선 놀라왔던 것은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는 것입니다. 아니들의 학습 태도가 제가 볼 때는 정말 꽝입니다. 예를들어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하는데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선생님에게 수업 중에도 수업과 상관 없는 전혀 다른 사적 이야기를 하여서 수업이 지연되거나 망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예를들어 ‘선생님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선생님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한 아이, 한 아이를 진정성을 가지고, 그리고 진지하게 대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 성생님은 프랑스어 선생님인데, 한 번은 숙제를 내 줍니다. 자기 소개를 하라는 숙제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에 자기는 남에게 자기를 알리고 십지 않다든지, 왜 자기 소개를 하느냐, 나를 소개할 거리가 없다고 투덜댑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다 받아줍니다. 그 선생님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열정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결국 자기 소개의 글들을 써오는데, 한 번은 수업 중에 중국아이가 부끄러움에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끄럽냐고 하니까 아이들이, 지금 자기 반 아이들이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 시간, 아니 다른 수업 시간도 그렇고, 아이들의 수업태도가 정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지요. 아이들 반응은 한 마디로 “너나 잘 하세요”입니다. 그런데 그 중국아이가 부끄럽다고 했을 때,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질서와 부끄러움을 혼돈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한 아이가 친구 친구 집에 갔는데 그 친구 어머니와 식사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는 존경하는 사람과 식사하는 것이 다 부끄러우냐 하고 질문을 하니까, 그 아이는 자기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아이들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잘 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아니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작년인가 지역의 청소년들과 간이역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인문 사회의 가치가 몰락하고 돈의 가치만 남은 안타까운 세태 속에 청소년 아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기 위해 시작이 되었는데, 그 때 인문 가치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대하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대해 정확히 알고, 그리고 그 생각한 것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상대방이 이야기 할 때 잘 들어주며 상대방이 이야기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소통이지요. 인문의 가치는 소통입니다. 그런데 소통하려면 우선 스스로 자존감이 있어야 하고 상대를 존중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날 다큐를 보면서 아이들의 수업 태도를 보면서 자기 자존감이나 상대에 대한 자존감을 인정해 주는 태도는 찿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느낀 것은 인문의 가치가 학교 안에서만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회, 가정, 이웃 그 전체가 하나가 되어 돌아가는데, 그 속에 과연 사람에대한 존귀함이 살아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미 자본의 가치에 길들어진 아이들에게 인문의 가치, 소통의 가치, 진정성, 진지함, 자존감이 자리잡기에는 너무 조건이 열악하지 않은 가 싶은 것입니다.

하여간 그 ‘클라스’라는 다큐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그러한 가치, 소통의 가치, 아이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모습에 감동을 먹었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아이들이 미쳐 자기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리고 예를들어 부끄러움과 질서, 부끄러움과 존경하는 것의 관계, 차이점을 자분 자분 이해시키려 하는 모습에서 진정 교육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생각과 표현 그리고 대화의 관계들을 섬세하게 잘 이끌어 주시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역시 내 자존감, 내 생각, 그리고 적절한 표현에 익숙해 있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합당한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무엇을 먼저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 해야 하는 건지. 세속의 가치관 앞에 노출된 우리로서는 마치 어린 양과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드러내 주며, 분별해 주고, 진정한 것, 진지함, 그리고 존귀한 것을 밝혀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가치, 어떻게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지에대해 잘 알려주고, 인도해주며, 우리를 풍성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책입니다. 아니 인류를 멸망에서 건져낼 수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히4:2에 보면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말씀이 그들
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어떻게 읽었습니까? 얼마나 진지한 마음을 스스로 갖고 있습니까? 마음 속에 얼마나 애뜻하고 갈급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시42편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찿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찿기에 갈급하나이다” 처럼 신앙을 고백해 보았는지요? . 히4:12-13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
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 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
아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병든 심령을 갖고 말씀 앞에 설 때에 우리의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말씀은 우리의 고뇌, 두려움과 떨림, 우울함, 고통을 수술 해 냅니다.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서 쪼개어 떨쳐버립니다. 여러분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 할 때 행20:32에 보면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
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한 것 처럼 그 장로들을 ‘말씀’에 부탁한다고 했을까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성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딤후3:15는
“...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인류의 유일한 탈출구 일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라 했습니다. 루터도 그랬고, 요시야 왕도 그랬습니다. 결국 말씀의 힘이 내 안에서 살아날 때, 우리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고 개혁하며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켜주고 인도하며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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