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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포도나무 사랑(2011년 2월13, 주현절후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2.13 14:20 | 조회 2109


나는 참 포도나무

2011년 2월13(주현절후여섯번째주일) 요15:1-10

존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관계입니다. 불교의 사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상 중에 하나가 연기론인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인과를 풀어내는 매우 복잡한 사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그물과 같이 연계하여 있다는 것인데 복잡한 관계는 모른다 치더라도 예를들어 햇빛과 비, 바람은 내가 살아 갈 수 있게 해 주는 단순하지만 너무나 소중한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그 햇빛, 비와 바람이 온갖 식물, 채소, 야채, 과일 아니 살아있는 모든 것, 아니 모든 피조물에 영향을 끼치며 또한 우리들의 먹걸이를 만들어 줍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옷, 나의 지식, 자동차 등 나에게 있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관계없이 나 홀로 자급하며 살 수 없습니다. 쌀 미(米)자도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는 농부의 손길이 여든여덟 번이나 간다고 해서 쌀 미입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관계 속에 생존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수 많은 인간관계를 통해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첫 관계는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부모님으로부터 받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진다는 것을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점차 성장을 하면서 사춘기를 지나며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렇게 관계를 넓고도 깊게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관계를 맺고,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가는 가 라는 것은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관계맺기는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참 포도나무 비유를 보면서 언뜻 연기론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여러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우선은 관계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 나무이신 예수님, 그리고 가지인 우리가 모두 하나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참 포도나무 비유는 체포당하기 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행위와 말씀인 요13장에서 17장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13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데, 그 동인은 바로 1절 말씀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을 씻기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마지막 십자가를위해, 그리고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마지막 구절인 17:26을 보면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13에서 시작되어 17장에서 끝나는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할 말이 많았을텐데, 마지막 유언의 말씀은 사랑이었습니다. 왜 사랑에대해 말씀하셨을까요? 사랑에대해 말하라면 매우 폭이 넓어지겠지만 오늘은 바로 포도나무 사랑에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1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은’이라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참 포도나무 사랑에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기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기를 원할 뿐 아니라 기쁨이 넘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살면서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기쁨이 있습니까? 방금 사랑에대해 그 범위가 넓지만 오늘은 포도나무 사랑에대해 말씀한다고 했는데, 동어반복이지만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인가 하면 바로 그 참 포도나무 사랑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관계의 기쁨입니다.

그러면 참 포도나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9절 말씀처럼 이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사랑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성질의 사랑일까요? 9,10절 말씀을 보면 머물러 있는 사랑입니다. 머물러 있는 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말씀에서 머물러 있으라는 말이 무려 11번이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머물러 있는 사랑은 바로 포도나무 사랑입니다. 그런데 10절 말씀처럼 계명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 우리는 열매를, 기쁨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머물러있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10절 말씀처럼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것 처럼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매를 맺으려면 2절 말씀처럼 가지치기를 해야합니다. 지난 여름에 교회 밭에 모처럼 수박을 심었는데 수박이 잘 안되었습니다. 심는 시기, 시비, 제초도 중요하고 일조량도 중요하고 한데 김동선 장로님이나, 이태훈 집사님이야기는 한결같이 가지치기입니다. 가지치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당연히 뿌리에서 힘차게 빨아올린 수액이 분산되어 열매를 실하게 맺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가지치기에대해 말씀합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가지치기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3절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음 이지요. 말씀이 더럽혀진 우리의 마음을 깨끗게 한다는 것입니다. 히4:12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
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
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입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또 기도하고, 마음에 새기고 마치 초식동물이 되세김질을 하듯이 반복하여 말씀에 익숙해집니다.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관상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의 오랜 전통을 통해 내려오는 성경읽기의 모습입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는 성서에 익숙해 져야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깊이 자리하여, 없어도 되는, 있어서 해가되는 다른 무수한 정보들 속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 많은 것들을 없애기도 하고, 질서있게 하며, 회복시키며, 선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어떤 기쁨인가 하면 15장에서 못 다한 말씀을 주님은 16장에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포도나무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슨 사랑이라 했지요. 계명을 지킴으로서 누리는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으로부터 오는 열매는 어떤 열매입니까? 예수님은 특별히 기쁨의 열매에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장에서 보면 근심과 고통 가운데 오는 기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근심하며 고통스러워 할까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려고 하니 세속의 가치관과 부딪힙니다. 그래서 손해도 볼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궁핍해 질 수도 있을 텐데, 주님은 16:20에서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근심은 세상과 상충될 때에 느끼는 불안, 염려입니다. 그러나 고통은 잉태를 위한 아픔입니다. 근심과 고통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기꺼이 고통을 감당하며 아퍼합니다. 근심과 염려는 물리치고, 고통은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16:21에서 산모가 아이를 낳기위해 진통이 시작되었는데, 근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 아픔, 고통, 힘든 것을 잘 참으면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에게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요?

그동안 어떻게 살았습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읍니까? 살림 때문에 근심과 염려가 되지요. 전세값은 계속 오르고, 아이들을 위해 지불해야할 학원비, 모든 생필품들이 계속 오릅니다. 그러니 살림살이가 나아질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민주노동당 당수가 대통령 선거 때 T.V 토론에서 한 이야기지요. 그 분은 살림살이에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살림살이에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살림살이에대해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산상보훈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며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살림살이를 예수님께서 나아지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주권자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유대사람이 로마 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동전을 가지고 왔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심, 염려는 그냥 자기 일 하라고 놓아두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맘대로 하라고 합시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염려가 아니라 고통에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에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위해 기꺼이 그 고통을 견디어 내라하십니다. 그래야 태어나는 기쁨을 맛 볼 수 있고, 그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다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는 기쁨은 즐기는 기쁨이 아닙니다. 열매, 특히 기쁨의 열매입니다. 열매의 기쁨은 나눌 수 있습니다. 마치 예배당 옆의 밤나무처럼 말입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에 접어들라치면 어김없이 열매가 맺힙니다. 밤나무가 특히 무엇을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밤나무는 밤나무이기 때문에 밤나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밤나무가 밤나무이듯이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예수, 하나님 성령과 말씀을 지키는 순종을 따라 하나가 되어 세 분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동일한 수액을 빨아들여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로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가 기쁨의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가지치기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마음이 찔려 가지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있는지요? 자기가 누리던 것, 즐기던 것을 떨구는 아픔과 고통없이 어떻게 열매맺기와 그 열매로부터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합니다. 지켜야 할 계명은 사랑이라는것 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는가 하면, 어떻게 계명을 지키는가 하면 내가 한 것 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인가요? 십자가에서 보여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십자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친구를 위한 사랑이 가장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명한 말씀을 따르면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종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15절 말씀처럼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시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우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맨 앞에서 우리는 관계에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우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귀한, 기가막힌 관계가 어디에 있을까요? 온 우주의 모든 것과 관계가 있고, 과거의 내 존재의 모습과 미래의 내 존재의 모습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전생에 내가 어떤 동물이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고, 다음에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난다는 허무맹랑하기 까지 한 관계를 이야기 하지만, 이것이 마치 씨줄과 날줄로 직물을 짜듯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주는 숙명론에 빠지게 하고 허탄한 신화나, 정도령과 같은 허탄한 영웅주의에 물들게 합니다. 아니면 사주팔자나 점이나 관상에 연연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허탄한 관계론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교회로 하나 되었다는 것, 이로부터 열매가 맺히는 것 만큼 분명하고 확실하며 흔들릴 수 없는 관계가 어디에 더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그러한 관계 속에서 친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80:8-12에 보면 주님께서 한 포도 나무를 이집트에서 뽑아 그것을 심으셨는데, 땅에 뿌리를 내려 그 나무가 온 땅을 덮었다고 하면서 그 가지가 지중해에 까지 뻗고, 새 순은 유프라테스 강에 까지 뻗었다고 합니다. 이 포도나무는 온 우주에 초 시간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뻗어있는 포도나무의 모습입니다. 바로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 포도나무인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 나무에 우리 고기 교회도, 나도 한 성도로서 한 가지로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 초 시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동일한 한 가지 수액을 받으며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아픔과 원망과 억울함과 이기적이었던 한이 서린 모든 인과의 관계는, 공과와 업적을 쌓는 모든 관계는 일희일비하는 그런 관계는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관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비죤은 없습니다. 허황되지 않은 한 분 농사꾼인 아버지께서 친히 가꾸시는 포도나무인 것입니다. 얼마나 황홀한 비죤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접할 때 마다 황홀해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를 너무 비천하게 설정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오늘 날의 시대에 모든 시스템이 물질 우선의, 실용주의의 체계에 휘둘릴 때에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을 너무도 싶게 망각하며 살지 않는 가 싶습니다. 우리의 삶의 질을 좀 더 ‘레벨 업’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며,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은 어느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나, 지도력이 있거나, 무언가 남과 다른 특출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에 예수님은 날 저물어 먹을 것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면서 제자들에게 마14:16에서 보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친구라 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초청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뒷짐지고 방관자로 살지 말고, 오늘 이 시대의 역사를, 하나님 나라를, 죽어가는 한 영혼을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두렵고, 염려스럽지만 예수님은 16:20에서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전과 용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나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구하지 않았다면 구하라, 즉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과 16절에서 주님은 거듭 기도를 촉구하십니다.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머무는 것에서부터 오는 열매입니다. 머물지 않는 사랑,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랑은 연민의 정에 불과합니다. 순수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피가 심장과 허파를 돌아 생명력과 깨끗함을 얻듯이 계명을 지키는 주님의 사랑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태어나게 하는 고통 중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열매는 머물러 있어야 맺을 수 있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른 사람들, 제자들,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는 사랑을 받고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마칠 때에 함께했던 제자들과 사람들이 모두 다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배반하고, 도망칠 것이지만, 그 때가 벌써 왔지만 16:32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와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계인 것입니다. 추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니 구하여 열매를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성도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열매가 없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까? 열매가 있어야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열매를 맺는 제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열매를 많이 맺어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근심과 고통 중에 어두운 얼굴 드리우지 말고 기쁨의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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