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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2011년 1월23, 주현절후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1.24 16:11 | 조회 2526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2011년 1월23(주현절후세번째주일) 엡5:15-20

성령이 충만하다고 할 때에 그것은 다윗왕이나 기드온 처럼, 또는 스테판 처럼 어떤 특별한 일,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베푸시기도 하고,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볼 것 같으면 집사로 부름을 받은 7 집사처럼, 오늘 말씀의 엡5:18처럼 계속적이고, 영구적인 영적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성령이 충만하다는 헬라어 원어의 뜻은 “무엇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히면 그 일에 몰두하게 되고 다른 건 관심 밖에 나고 오직 그 일로 마음이 가득차게 됩니다. 예전에 우표 수집할 때 보면 늘 마음 속에 우표로, 청년 때 LP 복사 음반을 통해 음악을 들을 때 머리 속이 항상 듣고 싶은 음반을 구입하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구를 처음 배울 때, 새로운 컴퓨터 게임을 해 보고 싶을 때. . . 마음에 드는 이성을 보았을 때 우리는 사로잡히기가 일 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언어의 한계라고 할 수 있고, 아니면 의미를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하기 때문인데 ‘성령을 충만히 받으라’하면 그것이 마치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듯이 채워 넣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인데 이것은 잘 못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어떤 용액이나 전류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성령을 받는 것에대해 ‘사로 잡히다’라고 하는데, 그 표현이 바로 원어 그대로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기름 붓듯이 붓는다는 말도 있지요. 그것은 왕이나 대제사장, 또는 예언자를 세울 때 양의 뿔로 만든 잔에 기름을 가득체워 머리위에 붓는 의식을 말하는 것인데, 하여간 ‘붓는다’, ‘받는다’, ‘채운다’라고 할 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이지 부어서 받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마음을 그릇으로 비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릇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에 사로잡혔다. 성령의 인도하신다는 것은 인격적인 감동, 감화인 것입니다. 그것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그 감동, 감화의 힘과 능력, 역사, 역사 인도하심을 인식시켜주기 위해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감화, 감동이 능력이 있고, 영향력을 미치고, 힘이 있을 때 ‘부어주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문자그대로, 또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 감화, 역사는 인격적인 감동, 인격적인 감화인 것입니다. 이 감동 감화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시며,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말씀 18을 보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하기 전에 ‘술에 취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방탕함이 따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얼마전 자동차 타이어의 마모가 너무 심해 타이어를 갈러 주성 카센타에 갔습니다. 여 주인이 우리 마을 주민이지요. 주인 남자는 뇌출혈로 지금도 몇 년 째 중환자실에 누워 있습니다. 여주인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입니다. 그런데 타이어를 가는 동안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는 동안 동네 사람들 술 먹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 지금도 그렇지만 1년 12달 365일 술이었습니다. 지금은 돼지, 소, 닭 키우는 것이 없어서 그렇지 마을이 온통 축산을 할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여기 저기서 도축을 하니 늘 술이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술에 찌든 모습을 다른 말로 ‘술 기운으로 산다’고 하는데,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의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술 기운으로 살지 말고 성령의 기운으로 살라는 뜻일 것입니다. 아마 사도 바울 당시에도 술은 패가망신의 주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신정환이라는 연예인이 도박으로 인하여 구속될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도박에 빠진 것이지요, 그 뿐인가요, 마약, 또 컴퓨터 게임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성령의 기운으로, 즉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술 기운으로 산다는 것은 술 기운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술에 의해서 자신의 고상한 감성, 이성을 잃어버렸다, 빼앗겼다 할 수 있습니다. 술의 영향 아래 있으면 더 이상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제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에 충만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병에 무엇을 채워 넣듯이 내 속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자적입니다. 그 표현은 상징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의 자유함을 곡해 할 수 있습니다. 왜 자꾸 이렇게 말 하는가 하면 한 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음에대한 충격을 받고 예수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믿음이 무슨 가질 수 있는 것이어서 더하여 주고 감하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을 성령을 마치 그릇에 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내게 채워져 있어 더 할 수도 있고 감할 수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위험이 따르는데, 그래서 성령에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성령의 통제에 따른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엡5:18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것은 특별한 은사로 주어지는 성령 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성령세례가 아닙니다. 예를들어 부흥집회에 가면 성령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거나 일어서라 하여 안수하여 성령을 받으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렇게 성령을 받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들어 사도행전에 언급되고 있듯이 에베소 교회나, 사마리아 교회가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하자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고 그래서 방언을 했다는 말씀은 성령세례를 뜻합니다.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에게 베푼 은혜는 바로 성령의 세례를 뜻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특별한 체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뜻대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다고 신앙이 없다고 하거나,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낄 필요도 없고,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특별한 것 처럼 교만해 질 이유도 없습니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베풀고자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성령 충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계3:20에 보면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내적인 성령 충만은 자신이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취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듯이 성령의 통제를 받을 것인지를 말 것인지를 결정하고 구하는 것이 사람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는 것,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구원을 받는 것 처럼, 고넬료와 그의 가족, 에베소 교회나 사마리아 교회 같이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이며 신비요, 섭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계속적인 충만함을 받을지에대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8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존재라고 하면서 성령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령을 요청할 수 있고, 충만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에 충만할 수가 있을까요? 먼저 엡4:30에 보면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개역 성경에는 ‘근심시키지 말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뜻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갈5:17에 보면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 스릅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관계에 있으므로, 여러분은 자기가 원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라고 합니다. 성령이 원하는 일을 육체의 욕망으로 인하여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요,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근심할 때 성령은 나를 인도하지 못합니다. 성령은 뒤로 물러날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성령은 인격적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성령은 비둘기 같이 온유하고 섬세합니다. 거칠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점령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령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오시어서 자리하십니다. 설영의 지혜, 진리, 평화, 온유, 그 아름다운 열매들이 우리 가운데 풍성하게 맺힐 것입니다.

둘 째 살전5:19에 보면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합니다. 공동 번역은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나를 깨우치고, 인도하시고, 감동시켜 하나님의 뜻이 합당한 일들을 유발시키고 암시해 줍니다. 우리가 이러한 성령이 제시하는 일들을 거절하고 무시할 때, ‘아니 잠깐 이 일부터 먼저하고 나서 다음에 할께’라고 말 할 때 성령은 소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먼저해야 할지,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반드시 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또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무감하다면 성령은 소멸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감동을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에대한 결정은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선택인 것입니다. 만일 내가 고의적으로 성령을 물리치거나, 성령이 시키지 않는 일을 고의적으로 한다면, 성령은 우리를 인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령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세 째 매우 중요한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6:19에서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
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귀한 손님이 집에 오게 되면
부모들은 아이들이 떠들지 말라,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집에 지금 귀한 손님이 오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손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귀울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함을 스스로 늘 상기시켜야 합니다. 마치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 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나 사이에 늘 교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지시하고, 명하실 대에 그 명하심을 미루지 말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어떤 때는 특별히 더 간절히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지인에게 찿아가 전도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을 지속적으로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의 생각이 떠오릅니다. 내가 이제 주일 저녁, 아니면 수요일, 새벽기도에 나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나를 좀 더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생각, 내 적 감동이 일어납니다. 이럴 때 하던 일을 멈추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시키는 일을 하고, 성령의 지시에 예민해 질 때, 성령에 충만해집니다. 빌2:12는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권면하
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께 복종하면 할수록 성령은 우리를 더욱 독려하며, 고무시킬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하고 요구하심을 세심하게 헤아려 복종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것은 부흥집회에서 어느 날 마음이 뜨거워지고, 안수받고, 목소리 높여 찬양하여 자기 자신을 감흥하는 자기의 종교적 만족이 아니라 스스로 내 안에 성령이 있음을 깨달아 성령으로 하여금 역사할 수 있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마치 온유한 비둘기 같이 말입니다. 성령은 섬세하게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섬세하게 성령과 교감해야 합니다.

성령은 거칠거나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성령과의 교감은 마치 애인이나 친구를 사귀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지만, 함께 차도 마시고, 식사도 같이하면서 서로의 것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관계가 점점 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부부가 되어 함께 사는 관계로 나아가듯이 성령과의 교제도 그와 같습니다. 설사 하나가 되었다 하더라도 부부간에 여전히 서로의 인격과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고 서로가 서로의 것을 인정해 주듯이 성령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인정해 줍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성령은 보다 깊이 나와 내적 관계를 맺어갑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점점 나는 나의 참된 자아, 나의 정체성을 찿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전에 내 본래의 모습으로 살지 못했다면, 성령은 이제 내 모습을 찿아 주시며 나의 나됨을 세워주십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내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기 시작합니다.

교우여러분! 우리는 혹시 이렇게 역사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감동을 소멸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또한 성령의 지시를 무시해 버리지는 않았지? 아니 오히려 성령을 거스르지는 않았는지? 성령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우리의 마음을 일으키실 때, 그 감동을 가로막는 우리의 의지,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인격적인 교통함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성령과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육신의 욕망과 사탄 마귀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두움과 죽음의 힘에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과 적극적으로 교통해야 합니다.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인격적인 교감이 오고가야 합니다. 이 일에는 어떤 지름 길도 없습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조그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 성령의 내 안에 임하심으로 나의 나됨을 회복합니다. 가족, 직장, 이웃, 사회, 국가와 민족. . . 그 무수한 관계 속에서 성령의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기쁨. 시편 4:7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안겨 주신 기쁨은 햇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에 누리는 기쁨
보다 더 큽니다.”
사랑. 요한1서 4:18 말씀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감사와 평화. 빌4:6,7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
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리하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답습니까. 성령 충만하지 못하므로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고, 헛되게 했습니까? 또 다른 사람에게,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습니까? 술에 취하여, 특히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오락과 컴퓨터에 빠져, 뜻 없이, 방향감각을 잃고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요? 이제 성령의 충만한 삶을 받읍시다. 성령에 사로잡히며, 성령이 우리 안에 늘 머물러 소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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