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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에게서(2010년12월26, 성탄후 첫 번째 주일)

하늘기차 | 2010.12.26 14:20 | 조회 2490


마리아에게서

2010년12월26(성탄후 첫 번째 주일) 눅1:30-45

성경을 한 번 통독하려고 한다거나, 성경을 한 번 마음잡고 읽어보려고 할 때 마태복음부터 시작하면 실기하기 쉽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낳고. . . 하다 보면 ‘애이!’ 하면서 성경을 덮기가 십상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가 우리들에게는 의미 없는 낳고, 낳고 일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에게 이 족보는 눈이 번쩍 뜨이는 내용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메달아 죽인 예수가 바로 다윗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다 혈통의 예수라는 것으로서 이는 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의 족보는 이러하다”하면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 . 하면서 쭉 낳고, 낳고로 가다가 마지막에 좀 기록이 변경이 됩니다.

야곱이 예수를 낳고가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이어지는 이 틀에서 ‘~에게서 누가 낳았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 라고 해야 하는데,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낳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셉과 예수 사이에 어떤 단절이 있음을 봅니다. 요셉의 전 까지는, 그러니까 예수의 부친인 요셉 이 전 까지 열거된 이름들은 예수의 족보가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의 족보인 샘입니다. 그런데 요셉에 이르러서는 요셉과 예수 사이에 마리아라는 이름이 끼어듭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이 요셉과 예수 사이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히 가문의 족보가 아니라 마리아에 이르러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태는 요셉과 예수 사이에 혈연 관계가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하면 그것은 몸으로 낳은 것이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하면 그것은 대를 잇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가 믿음의 족보를 기록할 때 ‘낳았다’라는 말은 곧 대를 잇는 의미로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맨 끝에 가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낳은 것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씨받이라는 정도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에게 이르러서는 ‘누가 누구를 낳고’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목적어로 쓴 것이 아니라 주어로 쓰고 수동태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기록을 하면서 예수의 탄생이 그저 조상의 대를 잇는 탄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지평을 여는 탄생임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의 자손인가 보다는 누구에게서 태어낳는가 하는 것을 드러냅니다. ‘누구에게서 입니까?’ 마리아에게서 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두려움 속에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에대해 고백합니다. 믿음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족보에 보면 예수의 어머니 말고도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이름은 없고 우리아의 아내 라고만 언급된 솔로몬의 어머니에대해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말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네 번 째인 유다의 첫 번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다말의 남편 에르가 죽게됩니다. 그러자 동생인 오난과 결혼을 하는데, 여전히 자식이 없이 아들 오난이 또 죽습니다. 유다 생각에 며느리 다말이 부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막내 아들 셀라가 있지만 두 아들 처럼 죽지나 않을까 해서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막내 아들이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지만 며느리 다말을 부르지 않습니다. 다말은 남편을 두 번이나 잃은 기구한 운명의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났을 즈음에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가 딤나라고 하는 곳에 양털을 깍으러 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창녀 처럼 하고 시아버지 유다가 지나가는 길목 에 앉아있습니다. 유다는 지나가다가 그 거리의 여자가 며느리인 줄도 모르고 잠시 너에게 들렀다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말은 잠시 머물러 가는 조건으로 유다의 지팡이와 도장, 그리고 허리띠를 담보로 잡습니다. 그리하여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아이를 갖게됩니다. 얼마 후 유다는 다말이 창녀짓을 하여 아기 까지 가졌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자기의 아이인 줄도 모르고 크게 노하여 그녀를 끌어 내어 화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말은 유다와 관계를 맺을 때, 그 조건으로 도장과 허리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받습니다. 다말이 마을에서 끌려 나와 시아버지 유다 앞에 섭니다. 그 때 다말은 담보물로 가지고 있던 지팡이, 도장, 허리 띠를 보여줍니다.

그제서야 유다는 막내 아들 셀라를 며느리 다말에게 주지 않았던 잘못을 시인하게 됩니다. 대역전이 일어난 것이지요. 자기 가문을 잇기 위해 필요할 때는 며느리로 맞이하고, 필요 없으니 매정하게 버리고, 또 자신은 하루밤을 즐기기 위해 창녀를 찿아 간 부끄러운 짓을 했으면서도, 다말이 창녀 짓을 하여 아이를 가졌다고 하자 화형에 처하려고 하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한 것이 들통이 난 것입니다. 당시의 남성중심, 권위주의적인 부계중심의 사회 속에서 도덕으로 위장한 부도덕을 다말이 온 몸으로 저항하여 유다를 부끄럽게 만들고 잘못을 시인하게 한 지혜롭고도 용기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예수의 조상 중에 한 사람입니다.

또 라합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곳에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당시의 근동지역의 가장 난공불락의 성채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성에 정탐꾼을 보냅니다. 정탐꾼이 여리고성으로 들어가 저자거리의 창녀의 집에 몸을 숨깁니다. 그러자 창녀 라합은 순발력을 발휘해, 소문으로 듣던 하나님에대한 신앙을 정탐꾼 앞에서 고백을 합니다. 라합은 거리에서 몸을 파는 창녀였습니다. 거짓 이야기, 허황된 이야기들, 신화와 쾌락과 욕망의 이야기들이 흘러 넘치는 곳에서 하나님에대한 이야기를 듣고 믿음으로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현재 여리고성의 백성들의 마음을 전해줍니다. 여리고성 주민들이 모두 애굽에서 탈출한 히브리민족이 승승장구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 백성들의 마음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전해줍니다. 그러면서 숫2:12에서 기생 라합은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과연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침공의 첫 작전의 성공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 것입니다. 신약의 히11:31과 약2:25에서도 라합의 신앙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정탐꾼이 왔을 때, 그들을 맞이하는 라합의 순발력과 결단, 그리고 여리고성 왕의 군대가 라합의 집에 들이 닥쳤을 때의 기지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라합은 군대가 들이닥쳤을 때 아주 재치있게 정탐꾼들이 우리 집에 왔었는데, 성문을 닫을 때 쯤에서 급히 떠났다고 말을 하여 집안을 뒤질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순발력과 결단과 기지는 준비하고 있던 믿음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후에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침공하여 들어 올 때 라합은 창문에 징표로 기다란 빨간 줄을 늘어 뜨려 구원을 받습니다. 후에 라합은 정탐꾼 중의 한 사람인 살몬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데, 그 사람이 바로 룻과 나중에 결혼을 한 보아스입니다. 정탐군이 라합에게 들어와 우리를 살려주면 너희 온 가족을 살려주겠다고 한 협상에 응하여 한 순간에 인생을 바꾼 장본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순간의 찰나적인 결단을 요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정말 믿음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잘 못 결단하여 때를 놓칠 수가 있는가 하면 정 반대로 함께하는 사람들과 구원의 자리에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룻은 어떻습니까? 룻은 모압 여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엘리멜렉이 그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극심한 가믐을 피하여 모압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만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죽게됩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비통한 마음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며느리 룻이 나오미에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룻1:16입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
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
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

그래서 나오미는 룻과 함께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자 나오미는 이제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합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인데, 이제 기뻐할 일을 다 잃어버렸으니 자기를 마라, 즉 ‘쓰다’라도 불러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이스라엘에서의 삶을 두 과부가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마침 친척 중에 보아스라는 남자가 있느데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보아스와 맺어주려고 합니다.

룻2:10에서 보면 보아스가 자신을 특별히 돌보아주는 것에 고마워 룻이 보아스에게 묻습니다.
“저는 한낱 이방 여자일 뿐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것을 이렇게까지 잘 보살피시고 생각하여 주십니까?” 이 말은 성경에서 늘 고백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의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자의 겸손한 모습인데, 바로 룻이 그러한 불쌍히 여겨 주는 것에대한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네가 고국 모압을 떠나 너의 시 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룻을 칭찬하는데 11 후반부와 12를 보면
“댁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 까지만 해도 알지못
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
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
히 갚아 주실 것이오”라고 합니다.

보아스는 룻에대해 가족과 그가 태어난 땅을 떠나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왔다는 것을 극찬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고향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온 것입니다. 이 떠남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비교될 만한 믿음의 떠남인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그동안의 세상에서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가치, 생각, 커넥션, 즐거움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기쁨을 맛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룻은 참 잘 떠난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고 다윗의 혈통을 잇는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아의 아내라고 하는 여인을 예수의 족보에서 보게됩니다. 이 여자는 마태복음 족보에 이름도 나오지를 않는 여인입니다. 다윗에게 강간을 당하였고, 남편은 음모 속에서 전쟁터에 나아가 죽음을 당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8왕비 중에 가장 총애를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이 늙어 아내를 물리쳤을 때에도 끝까지 다윗 왕 곁에 잇었던 여인은 밧세바였습니다. 아마도 이 밧세바에게서는 아름다운 여인의 향기가 풍겼던 것 같습니다.

다윗이 늙어 후계자를 정하여야 할 때 둘째 아들 아도니아가 다윗의 오른 팔이었던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등에 업고 왕처럼 행세를 합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와 사독제사장은 아도나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나단은 아도니아의 행세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찿아가 다윗왕을 찿아 왕권에대한 물음을 단도 직입적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밧세바는 다윗왕에게 찿아가 누가 왕이 될 것이냐고 묻습니다. 사실 이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감히 다윗 왕에게 나아갈 수 없는 다윗왕의 고유 권한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밧세바는 용기를 내어 다윗에게 찿아 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솔로몬이 차기 왕이 될 것이라고 하고, 바로 대제사장 사독을 불러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게 하고 솔로몬이 왕이라는 것을 온 백성에게 선포하게 합니다. 배다른 솔로몬의 형 아도나이가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왕의 행세를 하는 정황 속에서 밧세바는 아도니야를 지혜롭게, 용기있게 제거를 하고 아들 솔로몬을 왕 위에 앉힙니다. 그리고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갑니다. 참 비련의 여인이라 할 수 있는 고통과 아픔의 여인이었지만 밧세바는 지혜롭게 자신의 삶을 기쁨의 삶으로 전환한 탁월한 여자였습니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이 네 여인들의 면모를 보면 모두 험악한 인생, 막장의 자리에 까지 나아간 여인들이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 가문을 잇고 가문을 일으킨 진정 지혜롭고 용기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떤 여인이었을까요? 누가는 마리아에대해 “은혜를 입었다. 복있는 여자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진정 행복한 여인이었을까 하고 물어 봅니다. 훌륭한 가문도 아니고, 미모의 여성으로 나오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시골 처녀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그런데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기뻐하시며 들어 쓰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하고, 그리고 그 아이가 구세주라는 천사의 말에 놀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 가라고 합니다. 요셉이 파혼을 하려 하고, 곧바로 영아살해의 참담함 속에 이집트로 피난의 길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예수가 12살이 되어 함께 성전에 올라 갔다가 잃어버리는 일을 당하며,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예수가 탄생했을 때에도 목자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모든 말을 마음에 간직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나타나 하늘의 소리를 들려 줄 때에도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며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한 번은 고향에 찿아 온 에수를 만나러 갓을 때에도 예수님은 친 어머니에대해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나의 형제인가라는 말을 듣는 당혹감을 감네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성품은 비록 자기에게 다가오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무슨 뜻이 잇을 것이라고 하는 배려, 그리고 그 말을 소홀히 하지 않고 마음 깊이 간직하는 말씀의 보물창고 같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진정한 모습은 가장 큰 슬픔을 이겨낸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걸작인 피에타라는 조각품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시신을 끌어 앉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담고있는 아주 정교한 조각상이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채찍과 조롱, 십자가에 피투성이로 매달린 모습을 바라 보아야만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아마도 마리아의 모습은 대동아 전쟁 때에 정신대로 끌려간 딸들과 징용을 당한 자식을 향해 울부짖는 모습이 아닌가, 용산의 재개발로 인해 죽어간 자식을 부여잡은 어머니의 모습이 아닌가? 군에 간 자식이 이유없는 죽음을 당하여 고통 받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닌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을 스스로 지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아들 예수를 속 깊은 마음으로 품고 눈물흘리는 이 땅의 어머니들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의 족보 속에 들어 있는 여인들은 자기의 삶을 운명이겠거니 하며 절망 속에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을 지혜, 순발력, 용기를 통해 믿음을 통해 새롭게 전환 시킨 여인들입니다. 이 지혜로운 여인들의 신앙이 아기 예수 탄생의 기간에, 또 한 해를 마감하는 기간에 여러분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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