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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기 계시지 않소(2012년 4월22일, 부활절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2.04.22 15:30 | 조회 2383


그는 여기 계시지 않소 2012년 4월22일(부활절세번째주일) 막16:1-8 부활은 글자그대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부활은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천년 만년, 몇 겁을 사는 것이라 하면 편할텐데 왜냐하면 그렇게 살 길이 없으니 그러려니 하면 되는데, 성경은 태어나서 죽는 그 중간에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장자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곤이라는 물고기와 붕이라는 새가 나오는데, 또 불교의 겁이라는 개념도 그런 개념인데 한 개를 넘어서는 추상적인 시간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요11장에 보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사로의 집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 마르다가 찿아와 나사로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 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장차 마지막 때의 부활을 이야기 하는데 주님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마르다의 생각은 바로 종교입니다. 부활은 그러한 종교적 영생의 의미를 거부합니다. “어! 성경에 영생에대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할 지 모르지만, 요17:3은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인데, 그 영원함을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내 보여줍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죽음은 죽음인데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따르지 않으면 엉뚱한 거짓 부활에 이르를 수가 있습니다. 아까 영생이란 참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했듯이 십자가의 죽음의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일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고난에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난은 커녕 요즈음의 선거 분위기로 말하자면 모두들 예수님을 대권주자로 세우고 정권창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에게 마20:22에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이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데, 여기서 이 잔은 고난의 잔을 의미하는데,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과 축배의 잔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24절에 보면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예수님 좌, 우에 서겠다는 뜻입니다. 잔을 이야기 하는데 이렇게 동상이몽입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님을 쫓았던 것은 이적과 병고침, 먹고 배부른 것에 기인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첫 신앙의 실마리요, 단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앞세워 정권을 창출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에대해 3번씩이나 분명한 언질을 주었지만, 제자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꾸짖기 까지 하였습니다. 다 된 밥상에 제를 뿌린다는 식의 반응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다윗왕권을 회복할 왕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지만(슥 9:9은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 자기 생각, 자기 논리, 집단의식에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망하던 예수는 체포되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런 주님에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대해 잘 못 이해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기대에 부풀어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제자들은 축배의 잔이 아니라 쓴 잔을 마시고 모두 돌아섭니다. 바로 십자가에 등을 돌린 것입니다. 예상치 못하게 급작스럽게 다가온 죽음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수치와 허망한 마음을 품고 모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와 무관한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것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가을 바람에 낙옆 떨어지듯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니 역으로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의 것을 끝이 나게 합니다. 인류의 오만한 물질 문명을 멈추게할 수 있는 유일한 브레이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십자가가 아니였다면, 만일 예수님이 빌라도와 가야바공의회 재판과정에서 적당한 판결이 떨어져, 그저 구속이나, 몇 년 형이나, 무혐의 처리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사람들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설득과 회유와 투쟁을 통해 사람의 일, 자기일들을 완벽하게 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무력하게 그 날 새벽에 체포되어 변론이나, 상소 한 번 하지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바로 그 날 오전에 십자가형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 해 볼 수 있는 일말의 꼬투리나, 단서, 실마리도 남기지 않고 그냥 무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무력함은 제자들에게도 무력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의 욕심을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요21:3에 보면 베드로가 제자들에게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다른 제자들도 아마도 어부였던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아니었겠나 십은데 ‘우리도 함께 가자’고 합니다. 눅24에는 엠마오 출신의 두 제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사람들의 생각, 의도, 관계, 욕심과 이기심, 편견을 끝나게 하였습니다. 교우여러분! 부활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인간의 모든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창출한 모든 물질 과학 정신 문명의 총화는 궁극에 죽음입니다. 고기잡으러 돌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고 선언합니다. 교우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나의 논리나 생각, 감정, 나에게 속해 있는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달리신 것 처럼 십자가에 못 밖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 모든 나의 것을 못박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부활로 찿아와 만나주신 것입니다. 부활은 은혜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움과 의혹, 불신 속에서 부활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부활에대해 분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덤 속에 있던 사람이 수의를 풀고 관뚜껑을 제끼고 무덤문을 열고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듭 이야기하지만 납양특집이야기거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건 귀신이야기입니다. 종종 제자들의 입에서도 귀신이라는 말이 입에 오르기도 합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귀신이라 하고, 눅24:27에도 보면 무서워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연약한 그리고 지식과 지혜가 부족한 우리들의 반응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죽었다가 우리 몸 그대로 다시 사는 것은 부활이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사는 것, 바울이 살린 유두고, 엘리야가 살린 사렙다 과부의 아들은 육신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부활은 그러한 지금의 몸으로의 부활이 아닙니다. 고전15장에서 사도바울은 부활을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고백을 볼 것 같으면, 우선 예수님인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20에 보면 무덤에 처음으로 달려간 여인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생각을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잡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찿아왔을 때에도 제자들은 주님을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 하신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졌는데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주님이시다’합니다. 다락방에 문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서 무서워 떨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한 순간에 찿아오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함께하며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풀어주신 주님을 그 때 까지는 전혀 몰랐던 두 사람이 함께 식사를 나눈 후에야 비로서 주님인 줄을 알게 되는데, 그 순간 주님은 그 곳에 계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던 발길을 돌려 무섭기도 하고, 수치와 허망함의 장소로 여겼던 다시는 가고싶지 않았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죽음은 부활을 가두지 못합니다. 우리의 지금의 몸 역시 부활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부활은 신령합니다. 그것은 영광의 몸입니다.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 신비의 자리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부활은 걸림돌입니다. 걸려 넘어지던지, 믿음으로 고백되든지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것에, 다시말해 육신의 것, 눈에 보이는 쪽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에게 속해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에대한 미쳐 우리의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부활에대한 믿음 중에 가장 공감할 수 있는 부활의 증거는 ‘빈 무덤’에대한 고백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무덤이 비어있다고 고백합니다. 죽음과 무덤은 부활을 가두지 못합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조계사에서 진행되는 강정생명평화금식기도회를 다녀왔습니다. 목요일이 개신교담당이었는데, 그 곳에서 반가운분들을 만났습니다. 문규현 신부, 도법스님, 그리고 강동균 강정마을회장도 만나고, 또 전주나눔교회 여자목사님이신 박상희 목사님도 만났는데 65세 정도 드셨는데, 한 50 정도나 들어보이는 체구가 자그마한 목사님이신데, 수영도 못하시는 분이 구명조끼를 입고 강정구렁비 해상침투조에 끼여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구렁비에 가지도 못하고 여경들에게 양 어깨가 붙들려 나와 아직도 어깨가 아프다고 하며 서로 처음 보았는데도 왜 이렇게 정겨운지, 한 도우미 분은 40정도 들어보이는 여성분인데 남편이 성공회 신부님이라고 하면서 오후에는 유아원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아이의 이름이 그루라고 하는데, 얼마나 아이가 똘망똘망한지 또 해상침투조에 함께했던 연극을 하는 청년, 그리고 생명평화결사 순례를 담당하는 박용성 국장등, 또 육사 대령으로 예편한 제주도민, 그리고 점심시간에 잠간 1인시위한다고 하면서 가지고온 책 놓아두고 피켓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가던 신사분 등, 그리고 7순 정도 들어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 양재성 기독교환경연대 사무총장님 등 모두 정겨운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6시 일정을 마치고 대한문 쌍용자동차 희생자 합동 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목요일 하루를 서울시내에서 보내면서 느낀 점은 마치 내가 안식 후 첫 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자 무덤으로 향하는 여인들과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계사에 설치된 강정평화캠프도 그렇고, 대한문 앞의 분향소도 그렇고 폭력 앞에 연약하게 드러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최근 거듭되는 학교폭력과 입시경쟁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아이에대한 이야기도 우리를 무력하게 합니다. 어찌보면 이 사회가 커다란 무덤같은, 그 무덤을 향해 죽은 예수 찿아가는 꼴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사회 뿐 아니라, 중동, 남미, 아프리카의 열악한 나라들을 볼 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무덤에 주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의 부활에대한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 한결같은 목격담은 처음에 예수가 죽었다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덤을 향하는 여인들 역시 예수가 아주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에대한 확신은 부활하셔서 무덤에 계시지 않은 주님과 만난 사람들에 의해 깨지기 시작하여 죽음이 아니라 부활에대한 확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부활에대한 신앙이 단순히 종교적 신앙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 시대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인 능력으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한면에서 일본의 한 교장선생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귀한 본이 되는 것 같습니다. 2004년 일본 작가가 오세이 라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다큐를 찍었는데, 이 분은 암에 걸려 3-6개월 정도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학교 교육의 개혁에 열정을 가졌던 분으로서 어느날 공개수업을 하는 중에 인생에대해, 나아가 죽음에대하여 아이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 교장 선생님은 죽음의 두려움에대해 이야기 하면서 자신의 소망은 잠을 자다가 잠든채로 그냥 죽는것이라고 합니다. 원인은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라고 했고 그것은 솔직한 자신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죽으면 거기서 끝이 나는가?” 아이들은 똘망 똘망한 눈을 굴리면서 대답합니다. ‘아니다’, ‘그렇다’ 하면서... 아이들의 대답에 꼬리를 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왜 끝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느냐고 하면서.. 동화책을 읽어줍니다. 바로 ‘오소리 아저씨의 소중한 선물’이라는 동화였습니다. 오소리가 있었는데 그는 참 친절했고, 주위의 많은 동물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보여 주기도 했고, 도움도 주는데, 개구리에게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쳐 주고, 두더지에게는 인형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또 여우에게는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오소리는 죽게됩니다. 친구 동물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와 평소에 즐겁게 지내던 생각들을 끄집어 내어 그를 생각해 내었다라는 내용인데... 아이들의 입에서 왜 끝이 나지 않았는가에 대해 대답하면서 아이들은 ‘추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오세이 교장은 “그 추억은 그는 죽었지만 그를 생각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에 죽지 않는 거라고.. 삶의 끝은 없다.. ”고 합니다. 영원히 지속되어지고 있는 것은 그를 생각하는 마음들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인생은 영원한 삶이라고 합니다. 오세이 교장은 쇠약해 지는 몸을 이끌면서 아이들과의 마지막 학기말까지의 수업을 마치고 이틀 있다가 고요히 숨을 거둡니다. 참 따뜻한 부활에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부활은 이렇게 따뜻합니다. 우리 서로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목요일 강정생명평화금식기도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따뜻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무덤에 계시지 않는 주님의 부활을 어느 인디안의 노래를 통해 공감하여 함께 보고싶어 이렇게 동영상을 띄어 보았습니다. 글쎄다 61회 '굶주림'읽기에서 박경장님이 9.11기념식에서, 그리고 다이애나 왕비의 추도식에서 불려진 캐나다 인디언 부족의 기도문이라고 소개해 준 시입니다. 부활을 바라보는 시각이 약간은 차이가 있는데,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이 각기 자기의 존재감과 영광이 다른데, 대부분의 종교적 시어를 보면 이렇게 다른 존재의 모습으로 투영이 됩니다. 참 연민이 가지만,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인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 그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 존재의 영광이, 아름다움이 각기 다른 것입니다. 부활은 내가 나되는 참 아름다운 영광의 빛인데, 그러나 바다같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는 본질적으로는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아름다워 이렇게 올려봅니다. 하여간 부활은 그래도 무덤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 어두움의 힘, 죽음과 거짓의 폭력에 붙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weep, I am not there; I do not sleep. I am a thousand winds that blow, I am the diamond glints on snow, I am the sun on ripened grain, I am the gentle autumn rain. When you awaken in the morning’s hush I am the swift uplifting rush Of quiet birds in circling flight. I am the soft starlight at night. Do not stand at my grave and cry, I am not there; I did not die.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말아요. 나는 거기 없어요. 나는 자고 있지 않답니다. 나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천 개 바람이에요.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지요. 나는 여문 곡식 위 눈부신 햇살이랍니다.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에요. 고요한 아침에 당신이 깨어날 때 나는 원을 그리며 조용히 날다가 빠르게 솟구쳐 오르는 새무리지요. 나는 한밤에 부드럽게 빛나는 별무리랍니다. 내 무덤가에 서서 울지 말아요. 나는 거기 없어요. 나는 죽지 않았답니다. (박경장님의 번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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