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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성령강림후두번째주일, 2016년5월22일)

하늘기차 | 2016.05.22 16:09 | 조회 1589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

                                                                                                          고전12:21-27;14:1-4

    오늘 말씀에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하다고 합니다. 나도 약하고 힘들고, 사는 일들로 우울해 지고, 짜증나기도 하고, 절망하여 힘이 드는데, 성경은 더 약한, 그것도 ‘비교적 더 약’한 지체들에게 향해있습니다. 비교적 더 약한 사람에게 마음이 향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려면 비교적 더 약한 사람이 눈에 보여야 합니다. 겉으로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보면 보입니다. 제가 종종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보는 만큼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은 보는 것, 머무는 것,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나요? 홍해 앞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지 보라고 합니다. 모세는 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지를 압니다. 봅니다. 믿음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62:1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

                            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까지 결코 쉬지 않고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십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몰려다니지 말고, 무엇을 한다고 으쌰 으쌰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알고, 보고, 믿고,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근데 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보는 것 뿐 아니라, 본 것을 말해야 합니다. 증언해야 합니다. 제3세계 신학연구소 김진호 박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씀은 그 당시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고, 실제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패하여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끌려 와사 참담한 노예생활을 하는데, 아마도 이스라엘이 해방될 것이라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말을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지도 모르는 시대였다고 합니다. 아니 그나마 이제 바벨론에 잘 순응하여 자리 잡고 살만한데 역모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친놈 미친 짓 한다고 모멸을 당했을 것입니다. 근데 이사야는 끊임없이 목숨을 걸고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자유케 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한, 두 사람이 귀담아 듣습니다. 아마도 유언비어 유포죄로 감옥에 갖히고 처형당하고, 그러나 이사야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아마도 바벨론 제국과 대치되는 긴장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의 소리는 커다란 강줄기가 되고, 바다를 이룰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인류를 위한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담론입니다.

   음행하다 잡힌 여자가 예수님 앞에 비참하게 끌려 왔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어떻게 하나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에대해 아무런 평가나, 판단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땅에다가 무어라 쓰시고서는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던지라 하지 않고,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합니다. 이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들로서 당시 기준으로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종종 죄인들을 돌러 쳐 죽여 율법을 수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울일 때에 스테판 집사를 그렇게 처형하였습니다. 돌로 치는 형 집행은 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자긍심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없는 자라고 하지 않고, ‘먼저’라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먼저’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린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렇지만 이러한 형 집행은 광기어린 집단적 체면에 의해서 이루어 집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집단적인 광기에 찬 물을 끼언진 것입니다. ‘먼저’라고 합니다. ‘먼저’라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개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개인이 스스로 돌을 들어 한 사람을 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우려되는 것이 열광주의와 냉소주의인데, 특히 열광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섬세한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내적 감동을 놓쳐버립니다. 엘리야가 아합왕과의 한 판 싸움 이후 이세벨 여왕에게 쫓길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후 지진이 일어났지만 거기에도 주님이 게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불이 났지만 거기에도 주님은 게시지 않았고, 그 후에야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먼저’라는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은 자기를 봅니다. 그래서 아무도 돌을 들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에대해 말씀합니다.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약한 지체들이 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근데 교우여러분!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약하지 않은 지체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비교적 더 약한 지체들입니다. 그런데 보이지가 않습니다. 보다 더 약한 지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보이지 않을까요? 고린도 교회가 그렇했습니다. 어느 교회 보다도 하나님의 은사가 풍성했지만 옛 삶의 관행도 여전하여 교회가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요긴하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게 된 동기는 성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성찬은 주일 저녁 각자 음식을 지참하여 먹으며, 식사가 끝 날 즈음에 주님의 떡과 포도주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였는데, 성찬 기념은 무시되고, 단지 상징 만 남아 자기가 가지고 온 음식을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먹고 마시며 일반 식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더욱이나 가난하여 음식을 가지고 올 수 없는 사람은 그 식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죽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 까지 한 어처구니 없는 성례를 베풀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일들이 버젓이 자행된 것은 바로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 때문이었습니다. 이 열광주의가 성례에 마술적인 요소를 끌어들이기 까지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의 대표적인 현상은 방언이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덕을 끼치지 않는 방언을 시도 때도 없이 그저 모이면 방언으로 집단으로 부르짖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을 들을 여지도 없고, 비교적 더 약한 지체가 보일리도 없습니다. 성찬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내 끼리 음식을 싸와서 성찬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 헬라문화권에서는 늘 해 왔던 만찬을 나눈 것입니다. 비교적 더 약한 지체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방언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방언기도에 찬 물을 껸지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먼저’ 라고 한 것 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비교적 더’ 라고 합니다. 그냥 약하다고 하였으면 집단이 되어버렸을 텐데, 비교적 더 라고 함으로 전체중에 나를 포함한 각 자를 다른 각 자와 띠를 띠웁니다. 그러니까 보이기 시작합니다.

     카톨릭 예수회에 속해있는 비폭력 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존 디어 신부가 쓴 ‘예수와 평화의 영성’에는 5병2어의 기적 사건을 묵상하며 다른 복음에는 나타나지 않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문구 하나를 봅니다. 눅9:14입니다.

                                 “사람들을 한 오십 명씩 떼를 지어서 앉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대로 하여 모두 다 앉게 합니다. 사실 13절에서는 예수님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자 제자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보리떡5개와 물고기 2마리 밖에 없는데, 이 것 가지고는 우리도 나눠 먹기에 부족한데,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어디서 먹을 것을 사 올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오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제자들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돈으로 하면 기적은 없습니다. 생명도 없고, 평화도 자유도 없습니다. 성찬이 아니라 그냥 만찬입니다. 그런데 한 오십명씩 앉게 하라는 말씀에는 순종하였습니다. 생명의 기운을 불러오는 기적은 말씀의 순종에서 옵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생명의 축제에서도 항아리에 물을 체우라는 말에 말 없이 순종한 사람들에 의해 생명의 잔치는 일어났습니다. 자본에 종속되어 합리적이고, 편의적인 것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생명은 점점 사라지고, 이벤트와 6개의 물 항아리처럼 의식만 남아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지금 예배당 안에 놓여있는 사진들의 원초적 모습은 생명입니다. 흙벽돌과 예배당에 깔아놓은 가마떼기와, 나무로 세워놓은 종탑 등은 어떻게 죽음이 생명이 되었는지를 이야기 해 줍니다. 고기교회는 복이 있습니다.

     존 디어 신부는 사람들이 오십명씩 나늬어 앉자 군중은 사라지고 개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5천명이라는 통계 숫자가 아니라 각 자가 50명 중의 중요한 일원으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 거리를 나누며, 눈과 눈을 마주치며 마음을 읽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들은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넓은 산 언덕에 편히 앉아 소풍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돈으로 사가지고 온 빵이 아니라, 있는 먹거리에 감사하며 빵을 떼어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또 50명씩 앉아있는 무리들에게 나누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 본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존 디어 신부는 5천명의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여자와 어린이들이 제일 먼저 예수님을 따라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 보다 더 약한 지체들을 바라 보며 빵을, 물고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넉넉히 먹고도 12 광주리나 음식이 남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말 처럼 각자 알아서 식사를 해결하고자, 먹을 것을 사자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해결 할 수도 없었을 것이지만, 각자 음식을 먹는 대신에, 예수님이 지금 있는 보리떡5개와 물고기2마리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축복하고 나누는 것을 보고, 50명 씩 나누어 낮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돈이 아니라, 있는 것을 서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 5병2어의 사건은 2천년 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딱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 특히 이 천박한 빌어먹을 자본주의의 굴레 속에서 꼭 일어나야 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니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나와 지금 옆에 있는 분들, 그리고 교회 바깥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과 갈릴리 바닷가 들판에서 5병2어의 식사 직전에 있다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긴장감이 넘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와서도 사회에서 생활하던 그대로 여전히 개인적인 것에 몰입해 있는 것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냥 다수에 몰입해서 통개 숫자로 존재합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냥 자기 생활을 장소와 느낌, 종교적인 느낌 만 바꾸어 아무런 변화없이 행동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전 교회의 신앙생활, 교회 생활에 묶여있기도 합니다. 보는 만큼 신앙합니다.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 합니다. 빌4:6,7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합니다. ‘아무것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라고 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냥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 복음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과 경험과 판단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아무것도’라는 말이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수가 있습니까? 기뻐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합니까? 감사하는데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기도하라고 하는데,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앞에 것이 있으면 복음이고, 앞에 말이 없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하는데, ‘먼저’라고 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먼저’ 돌로 치라고 하니 복음이 되었습니다. 앞의 수식어 때문에 우리는 말씀 앞에 꼼짝없이 무장해제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이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먼저’ 앞에, ‘항상’ 앞에, ‘무엇이든지’ 앞에, ‘아무것도’ 앞에, ‘쉬지말고’, ‘범사’ 앞에 서야합니다.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 바로의 군사가 밀고 들어올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는지 보는 것이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입니다. 약하지 않으면 무언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약하면 은혜를 구합니다. 약할 때 강합니다.

     5병2어의 기적 후에 예수님께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 도 그렇고 무엇을 해야 믿음인줄 압니다. 수 많은 프로그램으로 열심히 무엇인가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일에만 매몰된 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찬 물을 끼언집니다. 예수님은 종종 찬 물을 잘 끼언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일이 아니라 열매가 맺힙니다. 보며 머물면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일하는 방법입니다. 보며 머무는 것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약한 지체라 했으면 보편적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약하다고 한 것 뿐 아니라, 비교적 더 약하다 하였으니 참 그 보는 눈이 놀랍습니다. 비교적 더 약한 지체가 보입니다. 복음입니다. 어찌 보면 비교적 더 약한 지체는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중에 가장 작다고 자기를 칭하였고, 고후12:9에서 자신이 고쳐야 할 병이 있어 기도하였음에도 고치지 못하여 매우 약한데, 주님이 자기에게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 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정말 비교적 더 약한 분은 주님이십니다. 빌2:7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우리는 자꾸 신이 되려고 하는데, 사람같이 되었고, 죽기 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약한 지체, 더 약한 지체, 비교적 더 약한 고기교회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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