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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면과 외면(창조절 열두번째주일, 2019년11월17일)

하늘기차 | 2019.11.17 22:35 | 조회 940


                                                             

                            직면과 외면

201911월17(창조절 열두번째주일)                                                                              13:10-13

  <발견과 직면>             이 설교는 안병우 장로님께서 전한 말씀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면서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논쟁하며, 그들의 위선과 당시의 형식적 관습과 싸울 때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리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자를 치유한 기사를 보면, 환자 본인이나 그 가족, 친지들이 환자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치료를 요청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던 여자를 발견하고 치료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지만,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금지한 당시의 규율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율법에 도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등을 펴고 싶어 한 그 여인의 간절함을 예수님은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면 시비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셨지만, 그런 시비는 18년 동안이나 등 굽은 상태로 살고 있는 그 여인의 간절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발동된 것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그의 상태에 대한 직시에서 비롯됩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사가 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느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가엾게 여기셔서 울지 말아라하시고, 관에 손을 대고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 일행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들의 슬픔을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달려가 애원하지 않아도,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고 불쌍하게 여기시며,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사랑의 주님입니다.

  <외면의 대상>

그런데 주님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길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예수님 뿐 아니라 많은 사람과 사건, 현상을, 마치 그런 것들이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요? 그래서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많은 것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나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 복잡한 세상에서 모든 일에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면 피곤해서 살아갈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무엇에 관심을 갖고 무엇을 외면하는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정말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을 외면하지는 않는가요?

큰 관심을 갖고 절대로 외면하지 않는 것의 첫 번째는 돈 아니겠어요? 둘째는 건강쯤 될까요? 가족 특히 아이들의 성적, 직장에서의 승진, 그런 것들이 주된 관심의 대상일 겁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관심을 두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늘 소외된 사람, 즉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병자, 가난한 사람, 눈먼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사마리아인, 세리, 핍박받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은 것을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외면당하는 사람은 대개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다고 평가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무슨 근거로 어떤 사람이 보잘 것 없다고, 그래서 외면해도 좋다고 판단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 돈이 많은 사람, 학식이 많은 사람, 용모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고, 그 기준은 권력, 빈부, 지식, 용모와 인종, 이념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적인 외면과 무의식적 외면>

외면에는 무의식적인 외면도 있고,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외면도 있습니다. 의도적인 외면의 경우, 외면하는 사람은 대부분 우위에 있는 사람이고 외면당하는 사람은 약자의 처지에 있습니다. 의도적 외면의 사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1950년대까지 한국역사학계는 일제의 식민사관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조선후기까지도 고대사회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매우 정체된 사회였다는 정체성론과 한국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타율성론이 식민사관을 떠받치는 두 기둥입니다. 이런 식민사관의 정체를 파헤치는 연구를 19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젊은 역사학자들이 시작했는데, 그것은 곧 자기 스승을 부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젊은 교수가 자기 스승들의 역사관이 곧 식민사관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스승은 길에서 만난 제자가 인사를 해도 받지 않고 외면하였습니다. 결국 그 젊은 교수는 다른 학교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도적 외면은 적대성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사람을 해치거나 심지어 파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도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외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제자임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의식적인 외면은 괜찮은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외면당하는 사람들이 입는 피해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외면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한 이주민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얼마 전 북한 이주민 모자가 아사하여 충격을 주었습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목숨을 걸고 찾아 온 남한 땅에서도 굶어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곧 뉴스에서 사라졌고, 우리의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이 사건은 같은 동네 주민들이나 정부 기관의 부주의가 낳은 참사이지 나와는 관계없는 사건이라고 외면합니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요.

무의식적인 외면이 위험한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의도적인 외면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한에 들어와 살고 있는 북한 이탈주민은 대략 32천 정도라고 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남한 주민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데, 이들이 외면당하는 이면에는 북한이라는 나라와 주민에 대한 의도적 외면, 심지어 적대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 북한 주민들을 외면하고 적대시하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와 계기가 있겠지만, 한국전쟁의 영향이 큽니다. 전쟁 경험자들은 자신의 체험 때문에, 전후 세대들은 반공 교육의 영향으로 적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 이후에는 우리를 위협하는 상종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며, 북한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기도 합니다. 이념이 다르고 가난한 사람은 어디서나 외면당하기 쉽습니다. 북한이라는 국가에 대한 반감이 주민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북한 주민을 우리와 다른 민족으로 보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이 사마리아인 보듯이 하려는 것입니다.

   <외면의 후과와 북한 외면>

외면으로 인하여 입는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어 오래 남습니다. 아일랜드와 영국은 한국과 일본처럼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입니다. 인접 국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1845년부터 7년 동안 아일랜드에 감자 잎마름병이 돌아 기근이 들었을 때 영국이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일랜드 사람 800만 가운데 100만이 굶어죽고 100만은 미국 호주 등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아일랜드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영국인에 대한 원한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유사한 사건이 한반도에서도 벌어졌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남한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이때 수만에서 수십만 명이 굶어죽는 고난의 행군을 했습니다. 그 충격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의 행군을 다룬 작품들이 북한에서 많이 발간되었습니다. 제가 2007년 여름 백두산 일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20대로 보이는 안내원 여성이 그 때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통일이 된 뒤에도 이 사건은 계속 역사적 기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식량 부족국가입니다. 남한은 이제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여 사실상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중위권 이상의 복지국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이 복지를 북한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몇 년 전 민족복지라는 말을 사용해보았다.

그렇지만 남한 사회 전체가 북을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는 현실을 직시하며 함께 하려고 합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교류한 사람들은 사업가들이고, 이들은 정부와 함께 개성공단을 만들었습니다. 인도적 교류를 실천하는 사람들, 즉 의사, 종교 단체, 민간 지원단체들이 있습니다. 평양에 약을 갖고 가는 수녀님들과 같은 비행기를 탄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체육 분야에서 교류가 이루어졌고요.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중에는 북한 선수들과 응원단이 왔었지요.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이나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조사사업처럼 민족문화유산을 공동으로 조사하고 보존하는 사업도 했습니다. 만월대는 2007년에 시작하여 작년 12월까지 8차례 발굴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교류는 지금 모두 중단된 상태이고, 며칠 전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이 설치한 금강산 시설물을 철거하라고 하여 남북교류를 더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잡힐듯하면서도 멀리 있습니다.

   <외면 사유의 부정>

우리가 이렇게 외면하며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외면하는 사유, 그 자체를 부정하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얻어 마심으로써 유대인의 사마리아인 외면을 한 순간에 부정하신 것입니다. 그 부정 속에는 유대인의 우월 의식을 포기하는 결단, 즉 나와 다른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평등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너와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동등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똑같이 창조하신 생명을 인간이 멋대로 구분하여 외면하고 차별하는 것이 죄악이라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면서 등 굽은 여자를 외면하고 그냥 가르칠 수도 있었고, 나인성문 앞의 장례 행렬을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지나쳐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會堂 長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에 분개하여, 안식일에 고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이 매임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였고, 무리는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들은 70년 넘게 자유를 빼앗기고 기근과 질병에 매여 있습니다. 이제라도 이들을 풀어주는 데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기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하나님과 역사 앞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동참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외면에서 직면으로의 전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늘 외면할 것인가, 직면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외면하고 살았다면, 직면하는 전환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에 통곡한 그 전환의 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결단입니다. 직면이 어려운 삶을 초래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전환의 과정에는 주님이 개입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후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습니다(22:61). 예수님의 이 직면이 베드로를 변화시켰습니다.

주님께서 교우 여러분도 똑바로 바라보시고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직면을 외면하지 말고, 우리의 이웃을 직면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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