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만난 부활 (부활주일, 2022년4월17일)
막달라 마리아가 만난 부활
부활주일 요20:1-10
부활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혼자 무덤으로 향합니다. 부활의 증언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유난히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천년 전 가부장제도, 특히 중동에서 여성은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12제자를 남성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여인들 중에 상당 수도 예수님의 선교 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눅8:2에 보면 예수님이 두루 다니실 때에 몇몇 여자들도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에대해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갔다고 소개를 합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요? 하지만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입니다. 그만큼 막달라 마리아가 완전히 회복되어 예수님을 온전히 따랐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막16:9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참 해방, 참 구원의 은혜, 참 자유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어라도 해야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무덤에 찿아가 향유를 바르려 했던 여인들과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며 불안했습니다. 모두 십자가의 죽음에 매여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동안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예수에대한 생각을 멈추게 하고, 그 욕망을 모두 떨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나마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 시신을 수습하고자 닫혀있을 돌문을 걱정하며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연시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신료를 구하여, 안식 후 첫 날, 주일 이른 아침 예수님이 안장된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을 누가 치워줄까 하며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돌 문이 한 쪽으로 굴려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은 우리가 부활을 만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제일 먼저 돌 무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합리적으로 맞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부활은 우리의 논리와 인식, 무의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건입니다. 교우여러분! 나와 부활을 가로막는 장애물, 돌문은 무엇인가요? 건강인가요,자녀문제인가요, 사업, 인간관계? 그 돌문은 이미 옮겨져 있습니다. 부활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은 우리 힘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주님은 내 삶 속에 자리잡은 버거운 큰 돌문을 이미 옮겨 놓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돌문이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며, 주저합니다. 그러나 돌문도 옮겨졌고, 무덤도 비어있습니다. 죽음이 부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주시하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엇을 찿고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12제자들 이상으로 가장 잘 주님을 따랐을 마리아 역시도 2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누가 죽음을 가져가서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찿으려 합니다. 13절에서도 보면 제자들과함께 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천사들이 “왜 우느냐?”고 말하자, 막달라 마리아는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15절에서도 역시 막달라 마리아는 이 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울고 있느냐?”고 묻는데,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전히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다고 합니다. 슬픔과 자기 연민, 두려움에 매몰되어 여전히 주님의 무덤가에서 서성대며 죽음을 찿습니다. 혹여나 부름받은 우리의 삶이 이렇지는 않겠지요?
잠시 후에 예수님이 “마리아야!”하고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인지합니다. 공관복음 눅24:6에서는 말씀을 상기하며 부활을 보았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 9절은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합니다.주님은 우리가 십자가와 자기 연민, 경험과 생각에서 부활신앙으로 넘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합니다.
돌문은 열려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이 전에 3번이나 거듭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 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부활에대해 닫혀있습니다. 10절 말씀 그대로 "그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죄책감에 수치와 부끄러움, 두려움에 스스로를 무너뜨리리며 다시 고기잡으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히4:12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부활의 신앙입니다. 말씀으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이제 지금 여기 살아있는 공동체 속에, 고기 교회에, 그리고 성도의 가정 가정 마다, 땀흘려 수고하는 일터에 찿아와 용서와 사랑, 기쁨과 평화, 감사와 위로를 드러내십니다. 오늘 이 부활에 자신과 세상에 매몰되지 말고 말씀을 상기하며, 성령의 내적 감동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이 ‘아무게야!’하고 부르실 때에 “예!”하고 응답하는 우리모두같이 교회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