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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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것 (2008년7월 6일, 성령강림주일후여덟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7.06 16:03 | 조회 1886


어리석은 것

2008년7월 6일(성령강림주일후여덟번째주일) 고전1:18-25

몇 년 전만해도 송골에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곳에 가구 공장들이 많아서 태국, 필리핀, 파키스탄, 그리고 조선족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농협 앞길에 저녁 때 쯤 되면 동남아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산다고 해서 한국인 일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곳에 살지만 필리핀사람이요, 태국사람입니다. 또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광하기 위해 잠간 들렀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인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국적이 있고, 그들의 시민권이 있는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분들은 돈을 벌기위해 안먹고, 안입고, 안 다니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열심히 벌은 돈을 보내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그 분들이 이 곳에 살면서 우리나라 사람처럼 살려면 한 달 월급 가지고 아마도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자기 나라가 있고, 언젠가는 다시 돌아간다는, 돈을 많이 벌어 가족들이 있는 자기의 나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갖고 궃은 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인들은 오늘 본문 말씀 1:24처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인데, 다시 말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거나, 붙들리어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가치,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니 “우리에게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우리’는 어떤 우리인가요?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라고 합니다. 그 구원을 받은 우리는 18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는 사람의 지혜나 힘,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인가요? 24절에 볼 것 같은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앞 서 18절에서도 무엇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까?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기독인들의 삶의 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라고 합니다. 한글개역성서에 따르면 ‘전도의 미련한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나요?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 얻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때, 그 ‘구원 얻는 자 ’라고 하는 것은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롬1:16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보니 고전1장18의 ‘십자가의 말씀’이 롬1:16을 통해 보니 복음‘입니다. 십자가가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그래서 23절을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비위가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빌2:6-11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이들 모두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

이것이 바로 그냥 흉악범의 십자가가아니라, 십자가의 내용, 죄목입니다. 십자가의 뜻이요, 오늘 말씀의 18절 처럼 십자가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는자에게, 즉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뜻을 버렸다’,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뜻 버리니 누가 함께 합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깨우치시고, 감동시키시고, 변화하며, 역사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릴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능력과 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가끔 정치인들이나, 재벌구릅의 총수들이 ‘대권의 욕심을 버렸다’, ‘사심을 버렸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보면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기득권을 웅켜잡는 모습을 볼 때면 민망스럽습니다. 추하고, 냄새나고 소리가 요란합니다.
막6:2에 보면
안식일이 되어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
또 마7:28,29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
께서 그들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 주님의 지혜, 권능, 권세가 어디에서부터 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의 뜻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고향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저 사람 그 목수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형제들은 야고보, 요한, 시몬이 아닌가?’합니다.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얻은 우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세상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하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21절에서 ‘전도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음이 어리석은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꿉니다. 구원 얻은 백성,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특징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세상사람들과 구원 받은 백성들을 구분짓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세상에서 구원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가 아니라 산에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어리석은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어리석은 거입니다. 갈대아우르의 아브라함의 치척과 친구들은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놓아 두고 떠난다고했을 때 어리석다고, 미련하다고 해을 것입니다. 노아가 산에서 배를 만드는 것을 보고 미쳤다고 했을 것입니다.

고전 13장 13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의미를 풀어보면 우선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희망에는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향하였을 때,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정찰대를 각 지파별로 12명을 파송합니다. 그 때 돌아온 사람들 중에 10 사람은 성이 튼튼하고, 거인족들이 있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땅을 확실히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10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의 용기인 것입니다.

어제 시청에서 있었던 광우병 소고기 반대 집회에 다녀 왔습니다. 기독교에서 맡은 합창을 위해 합창 성가대로 참여하여 ‘희년을 향한 행진’과 ‘우리 승리하리’를 힘껏 불렀습니다. 사실 이 촛불집회를 다시 살린 것은 6월30일 월요일 정의 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였습니다. 이 미사를 인도한 김인국 신부님의 말씀은 이 번 소고기와 관련한 모든 사람들의 낙심한 그리고 상처받은, 그리고 위축된 모든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는 미사요, 말씀이었습니다. 정부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이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겁먹은 자들에게 평화, 하늘이 주는 평화를 베풀자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분하는 것이 예의라 하면서
‘하수구에 떨어진 쌀밥 한 톨도 버리지 않고 주워먹을 줄 아는 게 예의 입니다. 반면 뇌물과 같이 아무리 비싸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뇌물은 당장 아무리 좋아 보여도 잡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고 하면서 광우병 소고기 반대의 당위성과, 이 반대 운동의 당위적인 윤리를 정말 푸근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들 마다 하는 염려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눈, 코 잎을 막고 소통을 거부한 사람인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것 처럼 촛불은 진화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사건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6월29일 토요일 정부는 평화행진을 하는 시민들을 폭력집단으로 매도하며(조중동의 여런 몰이가 한 몫합니다.) 강력 대응한다는 방침을 내렸습니다. 그 날 토요일 저는 세종로 쪽에 있었는데 그 때에 시민들은 버스를 밧 줄로 묶어 끌어내는 작업을 하였고(축제였습니다, 최소한의 소고기 반대에대한 적극적 표현)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징적인 사건은 광화문 쪽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날 YMCA의 회원들이 거리행진의 선두에서 경찰의 폭력을 비폭력으로 대하겠다는 뜻으로 경찰들 앞에 누었는데, 그 시민들을 경찰들이 사전 예고도 없이 방패와 몽둥이로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여러 시민들이 다쳤는데, 그 와중에 이학영 전국YMCA연맹 사무총장께서 심한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저는 이 폭력사건이 촛불 진화의 방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사건이라면 작지만, 그러나 촛불집회의 과정 속에 비폭력 무저항의 한 모습을 처음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군사독재 시대의 저항 운동은 통상 공권력의 폭력 진압으로 막았 는데, 거기에 맞서 시민단체나 민주운동 단체들이 여러방면으로 반정부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이제 국민의 정부에 들어서서 그러한 참담한 공권력 투입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요(그러나 이상한 조짐이 감돌고 있음) 시대적 흐름으로 보아도 바로 이제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한층 수준 높은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평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윤리와 도덕의 운동이기도 합니다. 무저항 비폭력을 통해 폭력을 감화하여 폭력을 이끄는 사람들의 손에서 폭력의 도구를 내려놓게 하는 인격 운동입니다. 이 운동의 시작은 인도의 간디가 시작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소금행진입니다. 영국의 엄청난 소금세를 반대하여 바다로 가서 소금을 직접 체취하는 운동이었는데, 수 많은 인도인들의 행렬을 경찰이 무력으로 저지하였지만 온 몸을 던지는 인도인들의 무저항 행진에 결국 경찰들이 곤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전 세계인을 감동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인격적 감화의 운동입니다. 그렇다면 이 운동이야말로 기독인들이 나서서 감당해야 할 운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촛불이 어떻게 나아갈지, 정부가 어떤식으로 대처할지 모르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부터 나올진데, 인격적 감화를 통해 평화와 정의를 세우는 운동이라면 앞으로 교회와 기독인들이 이렇게 폭력 앞에 무저항과 비폭력의 행진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용기이며, 십자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적 요청 앞에 예언자적인 역사관을 가진 교회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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