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엠마오로 가는 길(2008년4월 6일, 부활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04.06 17:12 | 조회 2489


엠마오로 가는 길

2008년4월 6일(부활세번째주일) 눅24:13-35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놀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갈릴리에서 활동하시다가 유월절 절기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향했을 때의 제자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결실을 거두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며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자 베드로가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할 때 마태복음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께 말씀을 드렸는가 하면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겨서 예수님에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헬라어 성경에서 보면 예수를 꾸짖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성경에서는 차마 ‘스승을 꾸짖었다’는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내용적으로는 이미 예수는 제자들의 권력 욕에 포위당해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다 와서부터 모든 사람에게 철저히 고립을 당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모두에게 버림을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가끔 열사다, 의사다 하며 동시대의 위대한 사람들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비교합니다. 특히 청계천 봉제업계에서 어린 여공들과 동거동락했던 전태일에대해서 전태일 예수라고 불렀던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그런 애뜻한,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키는, 어떤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인류 모두의 욕심에 희생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 모두 싫어했던 죽음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간디, 또 장준하 선생님, 1995년 중동의 평화를 외치다 죽음을 당한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의 죽음도 모두 안타까워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인도의 테레사 수녀가 죽은 날 전 세계가 테레사 수녀를 애도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보통 때엔 서로 앙숙이었던 이스라엘 왕 헤롯과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손을 잡은 결과였습니다. 또 종교적으로 서로 입장이 확연히 틀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함께 공모한 죽음이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해방과 자유, 빵을 달라고 하는 것에 침묵한 예수를 버리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다 체포당한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이스 신화에서 인류에게 불을 전해준 벌로 제우스에게 카프카스의 바위에 사슬로 묶이어 독수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진 간을 쪼아 먹히는데 그 간이 끊임없이 다시 회복되곤하는 고통당하는 영웅으로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의 희생과는 정반대인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위해 자기 의를 실현 했지만 예수는 치욕과 굴욕의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자기 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몇일 전 신문에서 문인수 시인의 <이것이 날개다>라는 시에대한 짧은 글을 읽었습니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씨”의 죽음을 다룬 시를 보라. 조문을 온 같은 처지의 동료들에게 정식씨는 죽음으로써 비로서 장애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양 차라리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문인수 시인은 장애인 라정식씨의 죽음을 애뜻한 연민의 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장애인들의 친구였습니다. 눈먼 장님, 중풍병자, 앉은뱅이, 귀신들린 사람 등 그들의 진정한 친구요, 그들을 누구보다도 애뜻한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그동안 보여주었던 연민, 긍휼, 불쌍히 여김을 뒤로하고 냉혹하리만치 스스로 십자가에 자기를 매어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다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감추어져 있던 우리의 죄를 다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들의 욕망에 내어 놓여진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인 예수를 붙잡아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 감추어있는 나의 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서기를 싫어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손에 체포당하였고, 채찍과 모욕과 굴욕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 없는 예수를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밖는 그 죄된 행위를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버려둠이라고 합니다. 롬1:28은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버려둠이 아니라 자기 좋은 일을 무한정 하고자 하는 인간의 물질 문명 앞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셨습니다.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원치 않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따른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꾸짖는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꾸짖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 21절은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있었다고 합니다. 그 소망이 꺽이자 모두 돌아섰습니다. 배반하고, 부인하였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지금 그 죽음의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두 제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음의 충격이 체 가시기도 전에 몇몇 여자들에 의해서 예수가 살아계시다는 또 다른 놀라운 소식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찿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듭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5장에서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12제자에게, 오백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에게, 그리고 야고보에게, 또 자기와 같은 달이 덜 찬 사람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요20에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에 두 번이나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요?

허탈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아니 모든 것을 버리고 쫓았는데, 남는 것은 자신들이 그렇게 소망하며 쫓던 지도자의 죽음이었습니다. 또 지금 자신들에게 돌아온 것은 혹시 예수를 쫓았다고 그래서 민심을 소란케한, 백성을 선동한 죄로 자신들도 체포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 스스로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였으나 결국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모두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에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유다는 배반하고, 베드로는 부인하고, 가장 사랑을 받던 요한은 겉 옷을 벗어놓고 달아날 정도였으니, 다른 제자는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것을 숨죽이고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수치스러움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제자들은 결론적으로 십자가에 등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가 다시 살아 자신들 곁에 찿아 온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믿기지 않는 사건이었지만, 부활은 더더구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찿아온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여인들이 천사들이 들려주는 소식을 들었는데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몇이 무덤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라.’, ‘그렇다 카더라’수준입니다.

그렇게 슬픔, 불안, 두려움,,,등의 심리 상태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는 두 제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주고 받으면서 가느냐고 하면서 이야기 속에 끼어들어 오셨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듣고 싶다 하니, 슬픈 기색을 띠며 예수의 행적과 최근의 십자가와 오늘 있었던 부활에대한 들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더디 믿는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영광의 자리에 앉을 것에 대하여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이야기 해 줍니다.

엠마오에 거의 도착하자 주님은 더 가는 척 하십니다. 그러자 그 제자가 예수를 붙잡고 그래서 함께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음식을 함께 할 때에 주께서 축복기도를 하고 떡을 떼어 나누어 먹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눈이 뜨이면서, 그가 주님인 것을 알게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주님은 이미 그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즉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니 그곳에 있던 11 사도가 주님 살아계심을 체험했다 하자, 자신들도 예수를 만나 함께 음식까지 나누어 먹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부할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무덤에 찿아온 여인들, 무덤가로 달려간 두 제자, 무서워 함께 문 걸어 잠그고 떨고 있던 제자들 모두 다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곁에 왔지만 모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부할 신앙을 통해 보아야 할 일을 부활을 보지 못하므로 닫히어 버리고, 막혀버리는 것은 없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지나간 일에대해 회상하며 자기 갈 길을 부리나케 가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착념하며 부활을 보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의 일에 깊이 빠져있으면 부활이 옆에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언젠가 소설 작가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요즈음의 가치 기준이 모두 돈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돈에도 인격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사랑에 울고, 웃는다’는 말이 있는데, 돈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웃고, 울고,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원수맺고 합니다. 전쟁도 불사합니다. 사람을, 삶을 움직입니다. 돈에 인격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죽음도 인격입니다. 죽음의 힘이 사람들을 죽게합니다. 죽음이 한 번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자리를 차지하면 우리는 그만 그 죽음에 붙들려 죽음의 일을 합니다. 절망, 혼돈, 공허, 미움...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전15:55에서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라고 합니다. 죽음을 마치 사람을 부르듯이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즉 사탄은, 죽음의 힘은 인격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우리의 인격과 교감하며 자기 일, 즉 죽음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죽음에 일침을 가합니다. “죽음아! 까불지 마!”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죽음은 그 정체가 탈로 났고(즉 죽이는 일)그리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죽음의 힘이 율법을 통해 그 힘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율법은 판단이며, 가치 체계이며, 합리성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합리적인 율법, 가치 판단이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 인간은 가치체계 속에서 어릴 때부터 무수히 많은 판단을 통해 자신의 삶을 형성해 왔습니다. 옳고, 그르다는, 좋고 나쁘다는, 악하고 선하다는, 잘했다 못했다고 하는, 끝없는 평가, 판단, 가치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살아왔는데, 그래서 항상 지치고 열매 하나 없이 인생을 소진시켜 버립니다.

죽음의 힘은 나의 삶 속에 들어와 나의 삶의 가치를 흔들어 놓고, 함께 하는 관계를 흔들어 놓습니다. 판단과 평가가 합리적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그 평가, 판단, 법에의해 곤고해 지며, 어두워지며, 절망, 좌절하여 삶을 소진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러한 가치체계를 일축해 버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고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결국 자기 삶, 자기 판단에 매몰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두제자를 따라 끝까지 함께합니다. 같이 음식을 나누고 하면서 두 제자는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우여러분 바로 그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일상의 삶 속에 지금도 함께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가치 체계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늘 말씀에 두 제자는 예수님이 말씀을 하는 동안에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합니다. 성령입니다. 요20장에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서 제자들은 두려워 문 꼭 걸어 잠그고 떨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자리에 찿아 오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평화를 인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생각과 합리성을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감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통해 부할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의 기쁨을 맛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경제적 가치 체계의 틀 속에 붙들려 있는 이 사회 속에, 그래서 죽음이 잔치 벌리는 이 세상에 붙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이 내 안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주연 목사님의 영적 짧은 글이 좋아 올려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합니다.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이는 동종동류가 아니면 적으로 보려는
불안 속에 떠는 인간 내면을
꿰뚫는 통찰입니다.

그러기에 이 봄,
꽃이 피는 모습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꽃은 어찌 그리 쉽고 아름답게
자기만의 색과 모양을 드러내는지요,
그 어떤 저항도 느끼지 않고
창조의 고통도 찾아볼 수가 없이!

그것은 자기를 잊고 섭리를 따르는
자유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요?
-산마루골에서 흙을 만지며-

마지막 단락에서 "자기를 잊고 섭리를 따르는 자유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요? "하고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 우리는 부활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복된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41/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33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63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42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34 2005.09.02 16:30
175 [일반] 살리시는 영( 2008년8월 3일, 성령강림주일후열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33 2008.08.03 16:06
174 [일반] 목자이신 임금(2008년7월27일, 성령강림주일후열한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3 2008.07.27 15:10
173 [일반] 전심으로 향하자(2008년7월20일, 성령강림주일후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94 2008.07.20 18:43
172 [일반]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시기를(2008년7월13일, 성령강림주일후아홉번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8 2008.07.13 16:26
171 [일반] 어리석은 것 (2008년7월 6일, 성령강림주일후여덟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87 2008.07.06 16:03
170 [일반] 새롭게 하는 삶( 2008년6월29일, 성령강림주일후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862 2008.06.29 17:32
169 [일반] 지금도 창조하시는 주님(2008년6월22일, 성령강림주일후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6 2008.06.22 14:37
168 피하고, 쫓고, 싸우고, 얻자(2008년6월15일, 성령강림주일후다섯번째 첨부파일 하늘기차 1853 2008.06.15 14:43
167 [일반] 지금 서 있는 은혜의 자리(2008년6월 8일, 성령강림주일후 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63 2008.06.08 13:44
166 아름다운 교회(2008년6월 1일, 성령강림주일후 세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53 2008.06.01 15:15
165 [일반] 믿음으로 바로 서자(2008년5월17일, 성령강림주일후 첫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00 2008.05.18 15:09
164 [일반] 아름다운 우리 가정(2008년5월11일, 성령강림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70 2008.05.11 13:39
163 [일반] 사랑받으며 자라는 자녀(2008년5월 4일, 어린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10 2008.05.04 16:21
162 [일반] 참되게 깨달은 그 날 부터(2008년4월27일, 부활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1915 2008.04.27 21:19
161 [일반] 주님이 주시는 멍에(2008년4월20일, 부활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57 2008.04.20 14:21
>> [일반] 엠마오로 가는 길(2008년4월 6일, 부활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490 2008.04.06 17:12
159 [일반]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2008년3월30일, 부활절둘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36 2008.03.30 13:12
158 [일반] 생명의 환희, 부활 (2008년3월23일, 부활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29 2008.03.23 13:40
157 [일반] 하나님의 어린 양(2008년3월16일,종려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11 2008.03.16 13:28
156 [일반] 솟아나는 생명의 샘(2008년3월 9일, 사순절다섯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3134 2008.03.09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