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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은혜 Ⅱ(2008년 12월14일, 대강절세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8.12.14 14:09 | 조회 1798


볼 수 있는 은혜 Ⅱ

2008년 12월14일(대강절세번째주일) 막1:1-8

지난 주에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타지 않는 가시 떨기 불꽃 앞에서 신발을 벗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이 후 모세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계획하고 조직하고 사람을 모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지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와 큰 싸움을 싸우고 나서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칩니다. 나중에는 지치고 두려워서 거의 죽다 싶이 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에게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리 저리 이동하게 하시어 호렙산에 도착하게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엘리아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이 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거듭 두 번이나 이 질문을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그 때 엘리야의 대답은 자기가 이제껏 주 만군의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정의로운 칼을 빼들어 바알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를 쳐단했는데, 그런데 그 수고도 헛되게 그 원수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고 이렇게 도망쳐 나왔는데, 이제는 오도 가도 못하고 나 혼자 남아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왕상19:11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크고 강한 바람이 주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에야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또 자기가 열심에 열심을 다 하여 하나님께 죽기까지 헌신하였는데 이제 자기 혼자만 남았고 이제 내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 쫓겨 오 갈데도 없으니 이제 내 할 일 다 했고 이제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다마스커스에 가서 거기에서 하사엘이라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고 합니다.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에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을 7,000명이나 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일에 빠진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획하시며, 섭리하시며 주관하는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지나갈 것이니 서 있으라 할 때에 바람이 불고, 지진이 일어나고,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은 없다고 합니다. 말씀을 느껴 보니 이렇게 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고, 불이 나는 것은 바로 엘리야의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래가지고는 하나님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엘리야를 만나고 싶어하는데 엘리야 는 조용히 기다리시는 하나님 놓아두고는 혼자 방방 뜁니다. 못살겠다, 죽겠다 합니다. 그렇게 방방 거리는 것이 가라 앉자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하나님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멈추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교우여러분 이 번 대강절 기간이 나의 것이라 하는 것을 내려놓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에 서점에 가서 신앙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샀는데 그 중에 헨리 나우엔이 쓴 책을 몇 권 샀습니다. 그동안 벼르고 벼르던 책입니다. 도서관 종교관련 자리에 곧 갖다 놓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이라는 분과 함께 제가 가장 많이 읽는 저자 중에 한 분입니다. 조만간에 C.S 루이스의 저서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이 분은 바로 소설 나니아 연대기를 쓴 분인데 탁월한 신앙의 깊이로 글을 쓰시는 분입니다.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헨리 나우엔은 예수회에 속한 신부로서 예일대학의 신학교수였는데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데이브레이크’라는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아담이라는 전신마비 중증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담당합니다. 보지도, 말도, 듣지도, 움직이지도 그리고 자기 감정을 외부로 조금도 표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과의 만남을 통해 신앙의 내적 성찰을 하게 됩니다. 아담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움을 받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목욕을 하면 우선 옷을 차례로 벗기어 주고, 온몸을 들어 천천히 욕조에 넣어줍니다. 그리고 씻겨서 다시 욕조 밖으로 내어서 수건으로 닦고 옷 을 입히고 또 식사를 할 때도 그 모든 것에 도움을 받지 않고는 식사를 할 수 없는 아담과 함께 생활을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아담과 함께하는 생활 속에서 은혜를 입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온전히 하나도 빠짐없이 다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목욕을 할 때 아담이 스스로를 자기에게 완전히 맡기는 것을 봅니다. 나우엔은 그러한 아담을 통해 참 평화를 바라보게 됩니다. 나우엔은 아담을 통해 사도 바울이 이야기 했던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느낍니다. 아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아버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는 전폭적인 신뢰가 바로 신앙이요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95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광야 40년 생활에대한 시가 나옵니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대해 ‘나의 길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길만 보았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못 보고 길의 상황, 길의 어려움만 보았던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는 11절에서 ‘그들은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다가오는, 나타나는 삶의 여러 상황에 부딪히면서 그 속에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 참 평안이 없습니다. 우왕좌왕합니다. 무질서, 혼돈, 공허가 엄습해 옵니다. 평화가 없습니다. 결국 반역에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이야 말로 하나님을 바라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보는 만큼의 신앙인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넘실대는 요단강에 이르릅니다. 거기서 그들은 사흘 동안 진을 치고 머무릅니다. 어떻게 건널 것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진을 친니 사흘 후에 백성들에게 ‘이 전에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 여호수아는 바로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여라. 주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합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보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성결케 하라고 합니다. 깨끗게 하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깨끗한자가 복이 있다 하시며 무어라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깨끗한자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깨끗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5절을 보면 ‘기다린다’고 합니다. 누구를 기다린다고 합니까?
주님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3,4절에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용서는 단지 내가 윤리적으로 무엇을 잘못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곤고함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1절에 보니 단지 윤리적인 죄 몫이 아니라, 지금 깊은 수렁에 빠져 하나님을 찿으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외심은 내 안에서 공손히 머리 숙이는 그러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독재자가 총, 칼을 휘둘러 백성들을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그런 두려움이 아닙니다. 언젠가 중고등부 학생들과 함께 어느 청소년 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집회에 참석한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녁 모임이었는데, 강사분이 나와서 청소년들에게 그러더라두요,“오늘 너희들 죽었어, 오늘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놈은 오늘 이 자리를 뜰 생각 마, 오늘 끝장내는거야”하더라구요, 정말 아이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날 때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 그물을 던지라고 할 때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결국 엄청나게 많은, 두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에게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도저히 주님 앞에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이니 자기 자신의 모습도 보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주님께서 품으십니다.

스스로 죄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이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만인 것입니다. 말씀이 아니고서는, 사랑어린 권면과 쉬임없는 기도가 아니고서는, 그래서 주님에 대한 살 떨리는 경외함이 내 안에서 넘쳐나지 않고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 삶의 지난 경험들이 그대로 있어서 자기 일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5:21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정신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라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서로를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말씀은 단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상대방의 생각과 판단 앞에 내 판단과 기준을 놓아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우리는 늘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렇게 의견차이로 힘들어 하고, 못살겠다 하지 않나요? 그런데 어떻게 상대방의 생각과 판단을 편견없이, 이기심 없이, 오해 없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의 체제를 뛰어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시면 밝은 빛으로 우리 어두운 마음을 밝히 비추어 그동안 내가 괴로워 했고, 힘들어 했으며, 무서워 했고, 두려워 하기 까지 했던,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 서 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나를 옹졸하게 했고, 편협하게 했던 미움과 증오와 실망으로 가득차게 했던 나의 판단, 선택, 기준, 조급함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유하게 합니다.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빛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기자는 그래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마치 파숫군이 새벽의 빛을 기다리듯이 기다립니다.

이 대강절 기간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이 나라와 민족과 이웃들,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살 떨리는 기다림의 기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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