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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일어서라!(2009년 8월16일, 성령강림절후열한번째주일)

하늘기차 | 2009.08.18 12:20 | 조회 2123


사람아, 일어서라!

2009년 8월16일(성령강림절후열한번째주일) 겔2:1-5;막6:1-6

단7장에서 다니엘은 자기가 꿈에서 본 4 마리의 흉악한 짐승에대해 이야기 합니다. 첫 째는 사자와 같이 보이는데 날개를 가졌고, 둘 째는 곰과 같은데 뒷 발로 서 있고, 셋 째는 표범처럼 생겼는데 새의 날개가 있고 머리도 4이나 달렸고, 넷째는 아주 사납고, 힘이 아주 쎈데, 뿔이 열 개나 달렸고, 쇠로된 이빨로 먹이를 잡아먹고, 으스러 뜨리고, 먹고 남은 것을 발로 짓 밟아 버린다고 합니다. 아주 포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타나는 환상을 보니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아 있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그 앞에서 4 마리 짐승이 다 멸하여진 다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는데, 옛적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합니다, 이 환상을 가만히 보면 4 마리의 포악한 짐승들 다음에 인자가 나타납니다. 이 인자는 앞의 4 마리의 무서운 짐승들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그저 '인자 같은 이' 다시말해 '사람 같은 이', '사람 모습을 한 이'라는 말로서 한 사람을 뜻하는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구세주, 메시야입니다. 오히려 앞의 4 짐승과 비교해 볼 때 힘도 없고, 어떤 특별한 능력도 없는 글자 그대로 단순히 '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이 인류의 구세주요, 영원한 왕입니다.

그렇다면 이 포악하고, 흉측한 4 짐승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첫 번째 짐승은 다니엘을 잡아 노예로 삼은 바벨론입니다. 둘 째 짐승은 페르시아요, 셋 째는 그리이스요, 가장 흉포한 4번째 짐승은 바로 로마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강대국들이 결국은 무너지고 오히려 사람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를 세운 사람은 왕이나, 지도층의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겔2:1에 보면 '사람아'그럼니다.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 한 사람, 사람의 아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일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내게 들은 말을 가서 전하라 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안 듣든지 가서 전하라 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 안듣는 패역한, 배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한 사람을 세웠습니다. 바로 에스겔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라고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든, 듣지 않든, 강력히 거부하고, 반대하며 배척할 지라도 게의치 말고 전하라고 합니다. 이 것을 통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되는 것은 전하는 자에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으면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전하는 자를 통해, 들려지는 말씀을 통해 살아계십니다. 듣고, 안 듣고가 아니라 먼저 말씀이 선포되고 있느냐, 아니냐가 중심입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말하고 듣기 보다는 영상매체의 시대입니다. 즉 보는 시대입니다. 미디어 매체들이 대부분 동화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동화상, 동영상을 자유 자재로 편집하여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표현하여 자신의 개인 블러그나 카페에 올리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듣는 것에 소원해집니다. 영적인 일은 보는 것 보다는 듣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찿아온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눈으로 보려합니다. 그런데 어떨까요? 2000년 당시에 VIDEO 카메라가 있었다면 당시 예수의 활동을 다 찍어 두었다가, "보아라! 예수님이 여기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도 못믿겠니!" 할 수 있을텐데 그러면 그 육성, 그 표정, 그 인품을 느낄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마 실제 예수님의 삶을 동영상으로 찍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그 반응이 어떨까요? "저거 편집했다"고 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그 어느 진실도 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예수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에게 감격도, 기쁨도 없습니다. 오히려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 예수님이 갈릴리리 지역에 꽤 알려지기 시작한 때 였습니다. 예수님이 모처럼 제자들과 함께 고향을 찿았습니다. 고향 회당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모든 것을 얻었을까? 이 사람에게 있는 지혜는 어떤 것일까?
그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까?"(막6:2)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는 전혀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어린 시절, 성장 과정을 다 본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잘 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냉담한 반응을 보일까요? 그 이유가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 그는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닌가? 또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와 같이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하며 달갑지 않게 여깁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서 우리는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라는 말을 듣습니다. 당시의 목수는 사회의 하층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수 출신인 예수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는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실제로 잘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의 문장의 단어 배열을 보면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닌가?'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보면 스 순서가 '이 사람은 목수요, 마리아의 아들 아닌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3절 말씀의 중심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라, 목수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55에서도 보면 '목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고, 누가복음 4:22에서도 보면 '요셉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것을 꺼리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복음서 중에 제일 처음 기록된, 아직 교회가 조직을 완전히 갖추지 않은 때에 기록된 마가복음은 예수의 직업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목수가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토를 달고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목수의 아들로 나오는데 당시만 해도 직업은 되물림 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이어 그 기술을 잇는 장인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kjv에도 보면 "Is not this the carpenter?'하면서 'the son of Mary'라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영어 성경, 그리고 독일어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목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목수인 예수가 어떻게 그 손으로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의 손은 어떠했을까요? 여러분 예수의 손이 어떠했을 것 같나요? 짧게 아주 짧게 1년 동안 그것도 매일이 아니구 띄엄 띄엄 목수 일을 해 보지만 그런 중에도 손을 잘 다칩니다. 톱에, 대패에 망치 질에 자주 멍이 들고, 찢겨 몇 번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 기억이 납니다. 아마 예수님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요셉을 도와 목수일을 배웠으니 그 손이 장난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궁금하시면 제 손이 아니라, 우리 이태훈 집사님 손을 한 번, 악수를 한 번 해 보시지요. 키가 작으신데, 그 손 아귀 힘이 대단합니다. 손도 체구에 비해 크십니다.

아마 예수님은 바로 그 거칠고 큰 손으로 병자들을 어루 만지시며, 그 병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투박한 목수의 손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고, 목수 이상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에 마땅해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이 흉악한 짐승을 멸하자 사람같은이가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입니다. 에스겔서에서도 사람을, 인자를, 사람같은 이를 부릅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가 조문을 할 용산참사 가족에대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동영상의 중간에 문자가 나타나는데

"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 제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누군가 대답해 주기를"하고 한탄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의 한국 교회들에는 하나님들로 넘쳐납니다. 그런데 사회는 점점 병들어 갑니다. 우상의 하나님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니 사람다운 사람은 없습니다. 독일의 D. Bonhoeffer 목사는 그래서 반 세기 전에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Ohne Gott, Vor Gott) 서자고 하였습니다. 마치 기계 장치 처럼 되어버린 하나님(Deus ex Machina)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사람으로 서자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나라, 이 세계, 이 지구 생태가 겪고 있는 고난과 견뎌내기 힘든 고통의 수많은 절규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짖는 소리, 탄식 소리, 신음 소리가 들리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체험합니다. 왜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의 모든 일들에 쉽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기계 장치의 신” (Deus ex Machina)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종교나, 정치적 이념이나, 시스템의 사회가 아니라 생명의 삶으로, 즉 평화와 사랑과 나눔과 관용의 삶으로, 에스겔서나,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목수로 오셨는가 라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당시 이스라엘에는 여러 직업들이 있는데, 어부, 특히 잘 인용되는 목자, 아니면 포도원이나 올리브 농장의 농부가 아니고 왜 목수였는가 말입니다. 언젠가 이야기 성경공부 중에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고서는 공백기가 있고 그리고 공생애가 시작이 되는데, 그러면 그 공백기간 동안 예수는 무엇을 했을까 라는 질문을 종종 하는 경우를 보았고, 이어서 들려오는 엉터리 대답은 그 때 예수가 인도로 가서 그 곳에서 부처의 제자가 되었다는 둥, 어느 힌두교 스승 밑에서 진리를 깨쳤다는 둥의 허황된 이야기를 말잘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단연코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목수의 수업을 받았고, 그리고 추측컨대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어 장남으로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어야 할 가장 역할을 하지 않았겠는가 라는 추측도 해 봅니다. 그래서 열심히 땀흘려 일을 해야만 했었고, 가족 생계를 위해 다가오는 경제적 압박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틈이 나는대로 구약의 말씀을 통해, 회당에서, 산과 들과 바다에서 묵상하며, 기도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기 정체성을 찿았으며, 하나님 나라의 뜻을 헤아리고, 깨우쳤을 것입니다. 예수는 땀흘려 일하며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의 아들로 스스로를 지키고, 세워 나간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다 익히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십니다. 목수는 다른 기능과 달리, 예를들어 대장장이는 쇠에 열을 가하고, 망치로 두드리고 해서 쇠의 모양을 만듭니다. 옹기장이도 흙을 주무르고 본을 떠서 원하는 모양을 만듭니다. 은 수공예의 경우도 도가니와 거푸집을 이용하여 원하는 공예품을 만듭니다. 그러나 목공은 다릅니다. 재료인 나무는 녹일 수도, 두두려 펼 수도, 주물로 짤 수도 없습니다. 목공은 나무의 모습 그대로, 그 나무가 갖고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기술입니다. 버려야 할 것, 파내야 할 것, 다듬어야 할 것, 깍고, 잘라 그 나무 안에 감추어져 있는 그 나무의 생김새를 따라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 냅니다.

목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인 목수로 다가옵니다. 목수이신 예수님은 우리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시어, 본래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 탄생시키십니다. 스스로 열등하거나, 아니면 교만하거나 한 사람을 주님은 본래 스스로의 모습으로 회복케 하십니다. 약물이나, 알콜, 도박, 아니면 컴퓨터 등에 중독되어 노예가된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성장과정 속에서 받음 마음의 상처나, 학대, 또는 감추어진 수치심 같은 마음을 나무 판제에서 옹이를 파내듯이 뽑아내 주십니다. 미쳐 고백하지 못한 죄의 짐을 내려놓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5:17에서 그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사람 중에도 목수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목수는 다른 기능인과 달리 마주 대하는 재료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재료 그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별로 소중이 여기지 않는 각재나 판재, 아니면 생 나무라도, 타다 버려진 나무 토막이라도 한 번 탁월한 목수의 손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재료는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탁월한 목수는 그 나무가 갖고 있는 내적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탁월한 영적 목수이십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할 때에도 그 여인이 묻고 답하는 내용 속에서 그 여인이 참으로 말 하고 싶은 속 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두레 박이 없는데 어떻게 나에게 물을 줄 수 있느냐고 했을 때, 주님은 그 여인의 마음 속에서 "마실 물 보다도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영적 물을 주세요"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삭게오에게서도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소외당해 외로워하는 삭게오의 속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삭게오의 집에 하루 묵어 삭게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많은 군중들을 헤집고 뒤로 다가와 치료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살짝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에도 이리 저리 밀치는 사람들의 거친 움직임 속에서 그 간절한 만짐을 구별하여 아시는 섬세한 분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점점 더 기계적인 일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자명종 소리에 정신없이 일어나고, 라디오 뉴스에 놀라고, 출근 길 교통 체증에 짜증을 내며, 어떻게 해서든지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치열함을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 바쁜 일상 속에서 핸드폰, 자동차, 인터넷, 인스탄트 음식... 많은 기계와 매체와 시스템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데, 참 인간의 숨결, 마음결을 느껴본 지가 오래입니다. 아이들도 학교, 학원, 놀이도 프로그램에 맞추어서 놀고, 특기 교육도 하나의 기득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린 그러한 틀 속에서 자라다 보니 아이들의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들어진 아이들로 자랍니다.

가끔 제3세계권의 영화나 다큐를 보노라면 그 속에서 보여지는 아이들의 모습과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전혀 차이가 납니다. 비록 가난하고, 문명의 기기들에는 익숙해 있지 않지만 그야말로 사람의 냄새를 풍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 하나님 신앙 때문이 아니라 하십니다. 성전과 제사와 율법은 넘치고 넘쳐 이제는 정말 보기도 싫다 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때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종교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이시기위해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한 사람으로, 인자같은 이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교회에 참 사람, 목수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헤아리고, 관용하고, 인정하고, 나누고, 소통하고, 사랑하고, 품어주는 그런 사람냄새나는 사람으로 하루 하루를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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