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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기둥, 불기둥(2009년11월29일, 대강절 첫 번째 주일)

하늘기차 | 2009.11.29 14:22 | 조회 2336


구름기둥, 불기둥

2009년11월29일(대강절 첫 번째 주일) 출13:17-22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때 모세가 바로에게 제시한 명분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준 비죤은 가나안 땅이지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제시한 요구는 출8:1에서 '나의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예배할 수 있게 하여라'고 말하는 것 처럼 예배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바로의 싸움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입니다. 오늘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 늘 한 영혼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를 드리려 할 때 극심한 방해꾼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한 영혼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쁨과 감사로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피곤, 건강, 개인적인 일, 밤샘, 갈등, , ,등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개구리 재앙이 내리자 바로는 모세에게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구리가 궁과 시내에서 물러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른척합니다. 그러자 이와 파리 소동으로 온 나라가 난리가 납니다. 그러자 결국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을 하는데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번에도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재앙의 강도가 점점 쎄지고 바로의 거짓말도 교묘해집니다. 가축은 데리고 가지 말고 아이들만 데리고 가라는 둥,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둥, 결국 태양이 가리워져 캄캄한 세상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첫 번째 태어난 것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나서야 이스라엘을 놓아줍니다. 그래도 미련이 생겨 이집트를 빠져나간 이스라엘을 다시 뒤에서 추격해 오다가 홍해 바다에 수장되어 버립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바로가 이스라엘을 그렇게 참혹할 정도의 재앙을 당하고도 풀어주지 않는 이유, 그래서 나중에 다시 추격해 오기까지 할 정도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노동력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기타 소수민족이 이집트의 경제의 바닥을 지탱해 오고 있었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나라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면 우리 경제, 사회, 정치, 문화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것입니다. 하물며 당시의 노동력으로는 가축과 인력 밖에 없는 때에 이스라엘이 빠져 나간다는 것은 바로의 정치 생명을 내 놓치 않고는 결단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바로왕 밑의 기득권 가진 사람들, 또 관료들이 얼마나 바로를 질타하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가서야 맏 아들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아갈 것을 허락을 합니다.

출7:5에 보면 "내가 손을 들어 이집트를 치고, 그들 가운데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낼 때에, 이집트 사람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요즈음 수요일에 에스겔 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이 말이 거의 15 번 이상은 나왔을 겁니다. '그제서야 내가 너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꼭 이렇게 처참함을 당하고서야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는 것이 아닌가 십습니다. 그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그 은혜 가운데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탄은 지금도 한 영혼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려 할 때 죽기로 방해를 합니다. 그래서 혹 여러분이 한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고자 할 때, 그저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고 하는 식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에서의 모세와 바로의 영적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 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향 할 때 가장 가까운 길이었던 블레셋 땅을 거쳐 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안 국가인 블레셋과 맞닥뜨려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마음을 바꾸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합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안타까운 것 중에 하나는 한 사람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중간에 발길이 뜸해지면서 다시 이 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럽니다. 신앙의 삶의 맛을 알려면, 교회에 한 지체로서 자리를 잡으려면 한 7년은 다녀야 조금 맛이라도 보지 않겠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가 하는 일에 함께 참여할 때 그것이 삶과 어우러져 조금씩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항상 이렇게 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신앙의 깊은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위치해 있습니까? 이방인의 뜰입니까? 글자그대로 여전히 교회와 말씀에 낯이 섧습니다. 세상과 교회의 사이에서 들고 나고 합니다. 아니면 여인의 뜰에 위치해 있습니까? 열심히 교회를 다닙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니까 열심을 냅니다. 왜? 좋으니까? 자기가 좋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은 것입니다. 자기가 싫으면 누가 뭐래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피곤해 지는 것이지요. 다음에는 유대인의 뜰입니다. 겉으로 보아 나름대로 흠 잡을 것 없는 신앙인입니다. 교회의 제도와 일과 가르침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의무적인 냄새가 납니다. 이러다 보니 여인의 뜰에서 맛 보았던 스스로의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의 중심인 성소의 자리입니다. 기쁨, 그러니까 나의 기쁨,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압니다. 기도와 말씀과 봉사, 선교, 그리고 성도의 교제 , , , 그야말로 교회와 하나가 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가 부족합니다. 이제 지성소로 들어가야 합니다. 지성소는 어떤 자리일까요? 가정과 사회와 신앙이 하나가 되는 자리 아니 이렇게 이야기 하면 윤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것이 아니고 한 마디로 십자가의 자리, 은혜의 자리입니다. 마27:51에서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 우리 모두를 이제 지성소로 나아오도록 초청한 사건입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며 동거동락하는 기쁨의 자리이며 십자가의 자리요 부활의 자리입니다. 죽음이 설 수 없는 자리입니다. 여기 까지 성도들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돌아가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물론 순례의 길이지만 이 길이 은혜의 길이요, 긍휼의 길이지 내가 노력하여 용 써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지혜, 이 길을 알려면 한 7년 걸리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7년이라 했는데 그 7년이 단순히 문자적인 7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때에 맞게 각자의 합당한 때에 되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아름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유대인의 뜰에 머물며 자기 좋은 맛에 그저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안타깝다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아이에게 심부름을 보냈는데, 심부름은 잊어버리고 친구들과 노는 일에 빠져있는 형상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자기 유골을 이집트에 묻지 말고, 약속의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집트를 떠날 때 유골을 가지고 떠납니다. 참 놀랍지 않은가요? 요셉이 유언한지는 400년 전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그 유언,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누가 유골을 잊지 않고 보전하고 기다렸을까요? 지금으로 치면 전혀 돈이 되지 않는 일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 성경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질문에 대해 김영순 장로님이 참 멋진 상상의 나래를 폈습니다. 즉 소수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상과 노예근성에 쩔어 있었지만 그 속에 소수의 minority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일까요?

바로가 히브리 백성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 태어나는 남자 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왕의 명령을 지혜롭게 거역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인가요? 히브리 산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기원 전 시대에 왕의 명령은 신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산파들이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산파에게 왜 살려두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산파들이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여인과 같지 않게 건강하여우리가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낫고, 매우 강해졌다고 출1:20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산파들이 바로를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남은 자들이 그 당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바로는 산파에게 뿐 아니라 이집트 모든 백성에게 히브리 남자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두 강물에 던지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와중에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산파들은 누구일까요? 당시 어떤 기득권도 가지고 있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성경이 말하는 남은 자들입니다. 사6:13은
"주민의 십분의 일이 아직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죽을 것이다. 그러나
밤나무 상수리 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
루터기가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남은 자가 바로 이방인의 뜰을 지나
지성소로 나아간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감추어진 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성소의 자리로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누구 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지중해 해안을 따라 블레셋 지역을 거쳐 지나가면 한 320Km 밖에 되지 않아 2 주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시고 멀리 40년 걸리는 길로 이스라엘을 내 모셨습니다. 물론 블레셋과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갈까 봐 먼 길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지만, 성경은 또 다른 이유를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상숭배요 또 다른 하나는 노예 근성입니다. 이 2가지는 이스라엘이 요셉을 통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살면서 몸에 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잘 못된 근성을 없애기 위해 40년을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가야할 땅 역시 우상숭배가 만만치 않은 곳인데 스스로 자주적으로 하나님 신앙을 따라 가는 삶이 몸에 익지 않고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도 역시 노예로 우상숭배자로 전락해 버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출애굽 사건은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40년, 철 들고 스스로 자기의 삶을 살만한 기간이 한 40년 되지 않나 싶은데 이제는 수명이 20-30년 더 길어져서 이것도 '맞지 않다' 싶습니다. 하여간 한반도 남쪽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체제의 대한민국에서 물신을 따르지 않으며 하나님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며 산다는 것이 그리 싶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남대문 방화, 용인참사, 4대강 개발, 최근에 다시 불거진 도곡동 땅 문제, 우리 동네 재개발, 미디어 방송법, 외고로 불거진 교육제도, , , 의료, 전기, 가스, 물을 모두 민영화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을 더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것 하나 돈과 땅, 투기, 불로소득과 연관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눈치 보지 않고, 그러니까 그러한 시대적 흐름에 노예처럼 무릎 꿇지 않고, 혈연, 지연, 학연에 매이지 않고, 아브라함 처럼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 지시할 땅으로 나아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의 마지막 절인 22절을 보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그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21절은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 길을 비추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대한 자세한 지도나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친히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물신과 노예근성, 즉 학연, 혈연, 지연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세상을 살 때 역시 불기둥과 기름 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의 내재,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세는 바로에게 예배드리러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예배드리는 백성입니다. 우상이 아니라 참 살아계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앞에서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며, 목 마를 때에 바위를 처서 샘물을 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잠3:5,6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윗치만 니라는 유명한 성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에게 결혼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그 여인에게 요청하지 않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의 생각이 계속 그의 마음 속을 지배했습니다. 그는 그 여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모두 맡겼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그는 우연히 다른 장소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두번째 요청을 했습니다. 이 때에 이 여인이 허락을 해서 10년 전에 사랑했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헌신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 인간적인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10년간이나 계속해서 그 여인을 따라 다녔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주의 뜻을 구하는 훈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의 방법으로 결혼을 하게 되어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야 복된 삶인 것입니다. 물신과 노예 근성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며 하나님 백성으로 살려면 지성소 깊은 자리로 나아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며 하나님과 은밀한 깊은 교제를 나누는 남은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예배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십니다. 이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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