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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나아오자(2010년9월12일, 성령강림절후열여섯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0.09.12 14:19 | 조회 1984


빛으로 나아오자

2010년9월12일(성령강림절후열여섯번째주일) 요3:16-21

밤에 바리새인으로서, 공회원이며,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대화의 내용으로 짐작해 보면 니고데모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에게 꽤 호의적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언행 속에서 하나님이 보낸 분인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 고백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1절 이하에서 예수님에 대해 ‘위에서 오시는 이’, ‘ 하늘에서 오시는 이’, 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라고 증언하는 것을 보면 니고데모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고백에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에대해서는 앞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사건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신 사건을 통해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 니고데모의 신앙, 바리새인으로서, 지도자로서, 의회원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에서 우리는 기적에 사용된 물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압니다. 바로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커다란 항아리 6개로부터 떠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만큼이나 정결예식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깨끗함에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 15:11에 보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지요, 겉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유대인들의 정결예식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거의 순교적이기 까지 합니다. 어느 랍비가 감옥에 가게되었는데, 그에게 주어지는 하루 물의 양이 있는데 먹기에도 부족한 최소의 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랍비는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정결예식을 위해 손을 씻는 물로 사용해서 거의 아사상태 까지 간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예법과 의식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이제 그러한 법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 쫓으셨습니다. 성전 내에서 그냥 아무나 장사할 수 없지요, 이 사람들은 성전과 이미 계약을 하고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파트 단지내에 주기적인 상설 매장이 열리는데 그게 그냥 자의적으로 여는 것이 아니라 입주자대표회의와 계약을 했게 때문인 것 과 같습니다. 그러니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혹자는 아니 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하면 되지 할 지 모르겠지만, 비둘기와 양을 팔고, 당시에 유통되던 돈을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바꾸던 이방인의 뜰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사람들이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에 이방인들이 기도할 장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당시의 성전은 돈과의 관계에 얽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없는 형식적인 제사만 남아있는 성전은 더 이상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전폐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참에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난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여러 종교단체들이 있었고, 세례 요한을 통해 물로 세례 받는 의식 등 중생에대한 가르침은 어느 종교 단체를 막론하고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라’는 말을 잘 받지를 못합니다. 사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니고데모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극적 효과를 더 하기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 다시 태어나는 기존 종교의 가르침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에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바람이라 했습니다. 자유이지요.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그러니까 인간의 인과율, 즉 논리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그 거룩한 영으로 태어나라는 것입니다. 깨끗이 씻는 윤리적 거듭남은 어느 종교든 다 이야기 하고 있지만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하나님에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말을 끊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으로 태어나 바람 같은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 다시 태어나는 일인데, 예수님은 그 일에 대해 무어라 말씀하는가 하면 땅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예수님이 니고데모의 말을 끊은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땅의 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도 모르면서 어찌 하늘 운운 하느냐는 것입니다. 불경스럽다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모르면 불경스러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발상의 전환인 것입니다. 나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전환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성령은 커녕 물 세례도 제대로 감당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자기의 생각과 습관, 의지, 그리고 관계 까지도 끊고 달라지려고 하는데, 얼마 못가서 여전히 이전의 일을 반복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내가 싫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땅의 일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늘의 일을 알고자 한다면 이제 허구적인 땅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마13장에서 예수님은 ‘밭에 감추인 보물’에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서 보물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대로 숨겨 놓고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것입니다. 또 어느 상인이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입니다. ‘다 팔아서 산다’는 것입니다. 어느 바리새인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구’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어라 말씀하시나요? 가진 것 중에 있는 것 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나요? 아닙니다. ‘네가 가진 것 다 팔아서’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3에서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위미할까요? 왜 해로운가요, 해롭다고 그동안 내가 입고, 배우고, 쌓은 것을 버리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학문, 지식, 능력이 얼마나 귀합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바울의 가진 것을 사용하십니다. 버린다, 해롭다는 것은 바로 복음에 비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 팔아서 나누어주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다 팔아서 산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요? 그만큼 하나님 나라는 보물과 같이 귀하여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라를 간직하려면 다 팔아야 합니다. 어떻게 나의 것을 다 팔 수 있을까요? 언젠가 거듭남에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재가 사는동안 한 5 번 정도 탈바꿈을 하는데, 거의 죽을 힘을 다해 껍질을 벗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 죽기도 하고, 껍질을 벗고 나서도 탈진하여 다른 생물체에게 그대로 먹히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죽을 힘을 다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거듭남에 대해 힘들어 하잖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람같이 태어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영의 감동에 따르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라고 강요하거나, 요한 처럼 ‘독사의 자식들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시대는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의 출발을 축제요, 잔치로 풀어내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은 꺼져가는 혼인 잔치를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포도주를 잔치 자리에 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일은 무엇일까요? 결국 땅의 일을 넘어 하늘의 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모세가 장대에 매달아 높이 들어 올린 구리뱀으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왜 모세가 구리뱀을 장대에 달아 높이 높이 들어 올렸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는데, 정도가 심했던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에 불뱀을 보내 진멸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구리뱀을 높이 들어 올리게 한 것입니다. 구리 뱀을 보는 자는 살 것 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자기가 구리 뱀 같이 높이 들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왜 높이 들려야 할까요? 오늘 말씀입니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일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종교적, 세상적 바라보기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 십자가가 하늘의 일이라는 것을 모를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자기를 내어놓는 이 일이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저 니고데모처럼 종교적인 것, 인위적인 종교에 천착합니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감동, 그 바람 같은 자유의 세례, 물에 풍덩 들어갔다 나오는 것 같은 감동의 세례를 받지 못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어찌 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생각했던 것 처럼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한이 알고 바라던 구약의 메시야는 심판의 메시야 이지만, 예수님은 사랑과 평화, 용서, 죄인과 함께 잔치를 벌이시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대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3:19에 보면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어두운 일에 머물러서 산다는 것입니다. 딤후3장 첫 말씀에 보면 고통스러운 때에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면 하나님 사랑하지 않고, 돈을 더 사랑하고, 교만, 이기심, 무정하며, 난폭하다고 하면서 쭉 언급하는데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십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이라는 것이 어떤 우주적 파국, 종말론적인 심판이 아니라, 이미 심판은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악과가 에덴동산 저 신화 속의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복판에 실존적으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우리 소위 부르심 받은 성도들입니다. 이미 부름받은지 오래 되었건만 여전히 어두움의 자리에 연연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불러내었는데, 그 귀한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것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에 집착하니 주께서 감동을 주어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친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이 광야로 나아가 그 독성이 강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 가 라는 것입니다.

내 재산 다 팔지 못하고 여전히 주판알을 만지작 거린다면, 소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에 붙들려 있다면 평생 하나님 나라를 들어가기는 커녕, 볼 수도 없을 것이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고통에 아파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내 삶이겠거니 하고 어두움의 자리에 머물며 참 복된 삶을 잃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나의 것이라는 것 내려놓고, 바람 같이 자유로운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는 빛의 삶들이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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