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View Article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2011년7월 3일, 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일)

하늘기차 | 2011.07.03 15:11 | 조회 2678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

2011년7월 3일(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일) 왕상17:8-16

엘리야는 아합왕 때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왕16에 보면 아합왕에대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이전의 사람들 보다 더 악을 행했고 바알을 섬겨 숭배하였으며,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아합왕의 우상숭배정책은 이미 선왕인 오므리 때부터 계속되어온 정책이었습니다. 오므리는 아들 아합을 그 당시 강대국이었던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엣바알은 시돈의 바알 숭배의 제사장이며 시돈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세벨은 이스라엘로 시집오면서 바알 신앙도 함께 들여와 바알 숭배의 꽃을 피운 것입니다. 정략적 결혼에 힘입어 북이스라엘은 남북왕조 시대 최고의 영화를 누리는 군주국가가 되었습니다. 당대의 최대의 제국이었던 앗수르의 살만엣세 3세의 비문에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의 주축이 이스라엘이며, 그 이스라엘이 파견한 군사력이 마전차가 2,000이요, 보병이 10,000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오므리와 아합 당시의 이스라엘의 국력이 어떠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라의 경계도 북쪽으로는 거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까지 이르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암몬, 모압, 에돔을 속국으로 삼을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이 당시에 국가 는 항상 전시체제였고 영토와 국력은 확장 일로에 있었습니다. 실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에서의 고고학 발굴을 보면 당시의 왕궁과 요새의 규모나 세련미는 그 후대에 견줄만한 왕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지하수로와 마굿간의 규모를 보아도 왕조의 위용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 전쟁과 건축에 동원된 사람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나라의 국책 사업으로 얼마나 많은 인력이 소실되었을지 상상이 갑니다. 그러니 고아와 과부들이 얼마나 많이 발생했을가 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나라가 부국강병을 하면 백성들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고통스러움도 뜻이 있고 국민 대다수의 합의점을 도출하여 보람된 사업으로 창출된다면 적지않은 희생도 아름다울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17:1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전달됩니다. 앞으로 몇 년간은 당분간 비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이 흥왕하게 된 바탕은 농사입니다. 그 농사는 바로 바알숭배에서부터 온다고 믿었는데, 특히 바알제사장의 딸 이세벨의 덕분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번영의 원천인 농사를 강타한 것입니다. 얼마나 가물었으면 18장에 보면 아합왕 스스로 물의 근원을 찿기 위해 온 나라 구석구석을 살피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믐은 당장 예언자 엘리야를 힘들게 합니다. 이 재난에 예외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거처하는 곳을 떠나 요단 동쪽 그릿 시내가에 머물러 있으라 합니다. 7절 말씀에 보면 시냇물까지 말랐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번에는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라합니다. 그 곳에 가면 한 과부가 먹을 것을 줄 것이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시돈땅으로 가라 했을까요? 시돈은 바로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나라입니다.

7절 말씀에 보면 시냇물 까지 말랐다고 합니다. 물이 말랐다고 하는 말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하나님 신앙이 바닥났다는 것입니다. 실제 18장에서 엘리야는 물을 찿아다니는 아합왕을 만나 갈멜산에서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를 구분하자고 할 때 2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중간 하게 양다리를 걸쳐 어느쪽이든지 택하라 할 때 백성들이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물을 찿아 나선 아합왕의 신하 오바댜를 만났을 대에도 오바댜가 자기가 주님의 예언자 100명을 감추어 음식을 대주고 있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교회 홈피에 몽골의 사막화가 90%에 이르렀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는데, 그 90%가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인류의 영적 상태가 아닌가 십습니다. 땅이 사막화 되었다는 것은 인류의 마음이 황무지가 되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환경연대에서 이 사막화되어가는 몽골의 은총의 숲을 만들어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저희 교회도 이 제안에 적극 참여해야하지 않겠나 하는 바램입니다.

과부와 고아가 많다는 것은 당대에 사람들이 전쟁과 국책 사업에 끌려나가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이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대강 현장에서 아깝게 죽어간 젊은이들,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 또 퀵 서비스, 패스트 푸드 배달로인해 교통사고로 죽어간 사람들, 등록금 마련을 위해 아무리 아르바이트 해도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는 좌절 등 오늘의 우리 현실인 것입니다. 결국 항상 하층에서 고통과 아픔, 죽음이 따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만 남은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과 같습니다. 손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말 한 마디로 사람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에게 ‘마실 물 한 그릇 만 떠다 주십시오’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자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때 이 여인이 엘리야에게 하는 말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
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말고, 말 한 그대로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선 자기에게 먼저 가지고 오고, 그 다음에 당신과 그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시 비를 내려주실 때 까지 뒤주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15절에 보니 이 여인이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좀 황당하기도 하고, 앞 뒤가 안 맞고, 그러니까 상식적이지 못하단 말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으면 좋을 것 같습니까? 그런데 16절에 보니 주님 말씀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리송해 집니다. 그런데 이미 상식이 다 깨어진 시대이기도 하지요. 오늘 우리 시대가 그렇지 않은가요? 성경은 이 말씀을 통해 무엇을 말씀해 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요? 저는 우선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전 두렙돈을 드리는 어느 여인의 헌금을 예수님께서 칭찬하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 렙돈은 그 당시 로마의 가장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 이었는데 한 렙돈은 1/128데나리온이니까 우리나라 하루 품삯을 한 6만원 잡으면 한 500원 정도, 두렙돈이니까 한 1,000원정도일 것 같은데 막12:41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서 ‘이 과부가 오늘 헌금한 중에서 가장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바쳤다’고 하시며 여인을 칭찬해 주셨다고 합니다.

‘모두 다’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모두 다’입니다. ‘전부 다’가 아니면 신앙이 아니지요. 신앙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니 예수님 당시에도 ‘전부 다’를 보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보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단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역설적으로 우상 숭배의 나라로 보내어 번거럽게 사르밧 지방의 한 과부를 만나게 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신앙이 없습니다. 겨자씨만한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있는 척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더 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신앙 아닌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곳 사르밧 지방에서 신앙을 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신앙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이 곳으로 보내셨을까요? 밀가루와 기름은 그래도 여전히 있지 않았겠습니까?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 신앙이 없었던 것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디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것을 하찮게 여겼는지 주님께 가지고 나오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지요. 항아리에 물은 언제나 차고 넘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포도주로 바뀌는 물이 가나에만 있었던 것일까요? 가나의 물은 초정약수처럼 특별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인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지요. 12에 보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엘리야가 이 과부의 동선을 틀어버립니다. 방금 말한대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말씀이 개입해 들어옵니다. 이 거 엘리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입니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 같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보내지는 않았는지요? 사르밧 과부가 그저 먹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그 먹고 마시는 삶을 멈추게 한 것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여러분 먹고 마시는 일에 몰입되어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삶을 멈추게 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어찌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3에서 엘리야는 이 여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먼저’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산위에서 말씀하시면서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시면서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자들아!’하셨습니다. 염려하는 것이 바로 신앙하지 않는 것이요, 염려하지 않는 것이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엘리야가 이 여인에게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한 것처럼 예수님도 ‘먼저 하나님의나라와그 의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먼저 하지 않으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인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오늘 말씀 중에 인상적인 것은 1절 말씀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의 고백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선은 ‘내가 섬기는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도 보면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와 같은 신안을 고백합니다. 과연 오늘 이 시대에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주고 받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지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는 ‘전부 다’ 아니면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다가 고향에서 죽을 번 했습니다. 엘리야도 거짓 예언자들과 싸우다가 죽을 뻔 한 것입니다. 오늘도 참 신앙을 가지려 한다면 죽지는 않아도 죽을 뻔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옛날 평양의 산정현 교회를 시무하셨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의 겸손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는 장로님께서 마산에 있는 문창교회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당시 그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던 주기철 목사님을 자기교회로 청빙해 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습니다. 고당 조만식 장로님께서 오산 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은 그 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노 장로님은 젊은 목사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장로님, 편히 앉으십시오." 목사님의 말에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전에는 목사님이 학생이셨고 제가 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사님께서는 하나님의 귀하신 종이 되었고, 저는 그 종을 받들어 섬기는 장로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편좌하라 말씀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노 장로님의 믿음에서 나오는 겸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님의 겸손에 너무나도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의 권유에 따라서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하게 되셨습니다.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장로님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그만 예배시간에 늦어졌습니다. 장로님은 부랴부랴 교회를 뛰어왔지만 이미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 도중이었습니다. 장로님은 조용히 자리를 찾아서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다 마시고 장로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마시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노 장로님에게, 그것도 옛 스승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였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그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습니다. 목사님께서 다시금 장로님에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앞으로 나오셔서 기도하십시오."
장로님께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울먹거리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죄인이 애국운동을 한답시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목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면 설교하던 도중에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은혜스러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은혜 받는 것을 방해한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울먹거리는 장로님의 기도를 듣고 모두가 울었습니다. 목사님도 울었습니다. 성도님들도 울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똑같이 칭송을 했습니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요, 그 목사에 그 장로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서로가 서로를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전 부다’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이 여인의 신앙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 2절을 보면
“주님께서 엘리아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5절 말씀을 보면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가서, 그대로 하였다”고 합니다. 또 8절 말씀을 보면 또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10에 보면
“엘리야는 곧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다”고 말씀대로 합니다. 그런데 13에 보면 엘리야가 과부에게 먼저 나에게 먹을 것을, 그리고 물을 준 다음에 그대와 아들이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데, 15절에 보면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 가면
“주님께서 엘리야를 시켜서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말씀이 막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늘로부터 저 아래로 이어집니다. 은혜입니다. 바로 이 말씀의 은혜의 흐름 속에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바로 이 여인을 그 극심한 아합왕 때의 가믐을 이겨낸 것입니다. 24절은 이 사렙다 과부 이야기의 마지막 말씀인데
“그 여인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저는, 어른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시라는 것
과, 어른이 하시는 말씀은 참으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 흐르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979개(33/49페이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2016년9월4일) 사진 첨부파일 관리자 14628 2016.09.09 08:30
공지 나는 주의 사람이니(가야금, 대금 동영상) 첨부파일 하늘기차 25959 2007.10.16 12:24
공지 망대에 오르라(창립40주년 기념 예배 설교,유경재 목사) 고기교회 26338 2006.05.31 22:16
공지 교회와 세상을 향하여 하늘기차 24930 2005.09.02 16:30
335 [일반] 염려하지 말라(2011년9월11일, 성령강림절후열세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4 2011.09.11 16:03
334 [일반] 성령을 받았느냐?(2011년9월 4일, 성령강림절후열두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308 2011.09.04 16:11
333 [일반] 지성에서 영성으로 그리고 공동체로(2011년8월28일, 성령강림절후열한번 첨부파일 하늘기차 2065 2011.08.28 15:03
332 [일반] 인간은 우선적으로 영적 존재(2011년8월21일, 성령강림절후열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571 2011.08.21 13:57
331 [일반] 사울의 손만 보는 다윗(2011년8월14일, 성령강림절후아홉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608 2011.08.14 15:06
330 [일반] 저를 보내 달라하니, 보살펴 주심(2011년8월 7일, 성령강림절후여덟번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5 2011.08.07 13:40
329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4(2011년7월31일, 성령강림절후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59 2011.08.02 14:08
328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3(2011년7월24일, 성령강림절후여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59 2011.07.27 10:19
327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2 (2011년7월17일, 성령강림절후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48 2011.07.17 14:43
326 [일반]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1(2011년7월10일, 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98 2011.07.11 11:03
>> [일반] 밀가루 한 줌, 기름 몇 방울(2011년7월 3일, 성령강림절후네번째주일 사진 첨부파일 하늘기차 2679 2011.07.03 15:11
324 [일반]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2011년6월26일, 성령강림절후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29 2011.06.26 15:44
32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2011년6월19일, 성령강림절후첫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239 2011.06.26 15:01
322 [일반] 신음하는 피조물에게 자유와 평화를(2011년6월12일, 환경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373 2011.06.12 15:59
321 [일반]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2011년 6월 5일, 부활절일곱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35 2011.06.05 16:35
320 [일반] 노아의 집짓기(2011년 5월22일, 부활절다섯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795 2011.05.22 15:51
319 [일반] 생명의 잔치(힘 버리기,2011년 5월15 :스승의 날) 첨부파일 하늘기차 2482 2011.05.15 14:09
318 [일반] 소년시절의 예수(2011년 5월8, 어버이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463 2011.05.08 15:16
317 [일반] 십자가의 부활(2011년 5월1, 부활두번째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185 2011.05.01 13:58
316 [일반] 거룩한 죽음(2011년 4월17, 종려주일) 첨부파일 하늘기차 2082 2011.04.17 13:31